내 마음속 ‘파블로 네루다 문학학교’

2024.03.18 20:16 입력 2024.03.18 20:17 수정

청소년을 위한 파블로 네루다 평전을 쓴 적이 있다. 안타깝지만 출간은 아직 못했다. 세계의 혁명가와 위인들에 대한 평전을 제안받고는 두말없이 나는 파블로 네루다를 써보겠다 했다. 사랑과 혁명의 시인으로 동시에 불리는 그를 꼭 한번은 사숙해 보고 싶었다. 더불어 그의 시와 삶을 좇다보면 자연스레 근대 남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구체적인 공부가 되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는 처음엔 사랑의 시인으로 시작했다. 그의 첫 시집인 <스무 개의 사랑노래와 한 개의 절망노래>는 지금까지도 전 세계 언어로 번역되어 읽히는 사랑에 관한 최고의 작품이다. 하지만 네루다는 일찍 얻은 명성에 안주하지 않았다. 근원적인 외로움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 외로움을 떨쳐보기 위해 머나먼 아시아로 새로움을 찾아 떠났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얀마의 랑군과 실론섬 그리고 싱가포르였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더 깊은 소외의 늪을 경험하게 된다. 기묘하고 신비로운 의식들과 문화, 종교들. 거기에 가난과 질병과 오랜 식민지 생활 속에서 무엇을 빼앗기는지도 모르는 채 쓰러져가는 불행한 인간가족들의 삶이 빚어내는 여러 세계의 모순과 비참이 그를 더욱 고독하게 했다. ‘대양을 응시하는 텅 빈 조개껍질’ 같았고, ‘삶의 공허가 검은 바다처럼 차오르’던 청년 시절. 그 공허와 혼돈이 모아져 이상야릇한 초현실주의 문학의 한 전범으로도 불린 시집 <지상의 거처>가 쓰여졌다.

축축한 비애 넘어 뜨겁게 분노

거기서 멈췄더라면 그는 고통은 있되 대안은 없는, 현상에 대한 반응은 있되 근원에 대한 천착과 희망은 없는 그럴듯한 감상주의자나 모더니스트에 멈추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스페인 내전 때 피카소와 루이 아라공 등 여러 문학예술인과 연대하여 공화파를 지지하며 비로소 시인이기 전에 공화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양심을 배우게 되었다. 당시 스페인 내전은 세계의 미래와 과거가 맞붙은 힘의 대결장이었다. 근대 왕정과 공화정의 갈림길에서 세계의 깨끗한 양심들과 부패와 폭력과 타락으로 찌든 짐승들이 격돌한 현장이었다. 1929년 미국의 대공황 이후 지속되어 온 서구 자본주의의 위기를 다시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무한착취로 만회하려는 제국주의자들 편과 좀 더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로 나아가려는 사람들 간의 대리전이었다. 그 연대의 과정에서 공화주의자가 아니면서 시인이 된다는 것은 ㄱ, ㄴ, ㄷ을 모르면서 시를 쓴다는 것과 같은 말이라는 걸, 자유의 과녁이 되지 않으면서 자유를 읊는 것은 위선이거나 사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집 <가슴속의 스페인>에서 그는 이제 축축한 비애가 아닌 뜨겁게 분노하는 시인으로 변모되었다.

한편 그는 눈앞의 불의에나 즉자적으로 분노하고 대항하는 나 같은 얼치기 투쟁시인이 아니었다. 고국 칠레로 돌아와 그는 콜럼버스의 일명 ‘신대륙 발견’ 이후 수백년에 걸친 유럽 제국주의 식민 지배와 학살 속에서 자신의 뿌리를 잃어버린 중남미 대륙의 거대한 뿌리 찾기에 나선다. 쿠바 혁명을 이루고도 세계 혁명을 위해 볼리비아 정글에서 다시 게릴라 투쟁을 하다 숨진 아르헨티나 태생 체 게바라의 가방 속 노트에 몇편이 필사되어 있던 대하시집 <모든 이들의 노래>가 그 여정 속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줄자로 긋듯 반듯이 잘라놓은 칠레라는 국경을 넘어 중남미 대륙의 시인이 되었다. 그가 칠레 공산당의 맹원으로 여러 탄압과 긴 망명 생활을 거친 후 아옌데와 더불어 노동자 민중의 대통령 후보로까지 나섰던 것은 네루다에게서 가장 중요한 ‘혁명’을 거세하고 사랑과 모더니즘의 시인만으로 소비하고자 하는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야기다. 올해 30주기를 맞는 김남주 시인께서 왜 한국 독재의 감옥에서 스페인어를 독학해 네루다 시들을 번역했는지 알 듯도 하다.

그의 역사·혁명 시대 다시 앓고 주유

그런 사랑과 비애와 모던과 초현실과 역사와 혁명의 시대를 다시 앓아보고 주유해보는 길동무 청년문학학교를 3년째 열고 있다. “산(酸)에 닳아지듯 손의 노동에 닳아지고, 땀과 연기가 배어 있고, 법의 테두리 안팎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일들로 얼룩진, 백합과 오줌 냄새를 풍기는 그런 시다. 음식 얼룩과 수치를 지닌, 주름살, 법의 준수, 꿈, 불면, 예언, 사랑과 증오의 고백, 어리석은 언동, 충격, 목가, 정치적 신념, 부정, 의혹, 긍정, 무거운 짐을 진 몸뚱이처럼, 낡은 옷처럼 불순한 시”(네루다 글 중에서)와 소설과 르포, 그리고 저 많은 양아치들의 역겨운 서사와는 전혀 다른 정치의 말들을 꿈꿔보는 새로운 문학의 전당.

물론 네루다가 말년에 다다른 <소박한 것들을 위한 송가>의 세계처럼 작고 소박해도 괜찮은, 내 마음속 파블로 네루다 문학학교.

송경동 시인

송경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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