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2024.03.24 20:04 입력 2024.03.24 20:05 수정

이웃에 사는 농부들과 ‘7일 단식’을 시작했다. 단식하기 한 달 전부터 육식을 하지 않고 음식도 조금씩 줄여 나갔다. 3일 전부터는 죽을 먹었고, 단식하는 날부터는 물과 죽염만 먹었다. 먹을 양식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단식을 하느냐고? 바쁜 농사철이 되기 전에 지친 몸과 마음을 스스로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길이 단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식을 하는 방법이나 까닭은 사람마다 다르다. 나이가 다르고 몸과 마음 상태가 다르므로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단식하기 전에 이런 다짐을 했다.

‘누군가의 덕으로 여태 먹고살았으니 작고 하찮은 일에 날을 세우지 말아야지. 알게 모르게 남한테 상처를 주었으니 남한테 받은 상처를 되갚지 말아야지. 단 하루도 죄짓지 않고 산 날이 없으니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지. 마음을 다해 아픈 사람 위로할 수 있게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아야지. 마음 여리고 어진 사람 주눅 들지 않게 다른 사람보다 똑똑하지 말아야지. 가는 곳마다 여유와 낭만이 찾아올 수 있게 잘난 척 어깨 힘주지 말아야지. 나를 잃어버리지 않게 바쁘거나 부지런하게 살지 말아야지.’

아내와 나는 혼인 20주년과 30주년 되던 해에 7일 단식을 해 본 경험이 있어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더구나 경남산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료사협) 이사장인 화목한의원 김명철 한의사가 안심하고 단식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줘 마음 놓고 하게 되었다.

지역에 의료사협이 있어 참 좋다. 의료사협 조합원들은 자기가 사는 곳에서, 이웃과 함께, 아플 때 믿고 치료받을 수 있고, 건강이 더 나빠지지 않고 좋아지며, 설령 아프더라도 나답게 살다가 좋은 마음을 주고받으며 행복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다. 함께 만드는 건강, 더불어 만드는 행복한 삶,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꿈꾸는 의료사협이 있어 삶과 죽음이 두렵지 않고 든든하기만 하다.

단식을 같이하는 농부들과 날마다 산길을 걸으면서 여태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먹은 게 없으니 힘이 빠지고 조금은 어지러웠지만, 언제 우리가 이렇게까지 가까워졌나 싶을 만큼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낭만이란 이렇게 하던 일을 멈추면 아니, 멈추기만 하면 그저 찾아오는 것인데 여태 바쁘다는 핑계로 잊고 살았구나 싶었다.

7일 단식이 끝나고 한 달 동안 보식기간(회복기간)에 들어갔다. 보식기간 동안 육식은 물론 달걀과 우유와 생선도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된다. 술과 커피와 빵과 과자와 같은 가공식품은 아예 먹을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죽과 나물과 현미잡곡밥은 100번 이상 천천히 천천히 씹어서 먹어야 한다. 음식을 꼭꼭 씹지 않고 먹으면 없던 병도 생기고, 50번 씹으면 있던 병을 낫게 하고, 100번 씹으면 다가올 병도 예방할 수 있다고 한다.

어느덧 3월 중순이다. 오늘 아침에 아내랑 300평쯤 되는 산밭에 씨감자를 심고 점심밥을 먹었다. 단식하는 동안 얼마나 먹고 싶었던 밥인가! 이 밥 속에 온 우주가 들어 있다는 생각을 하니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 여태 돈과 권력과 명예 따위에 기대어 산 게 아니라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살았구나!’ 싶다. 예순여섯, 이제야 조금 철이 들어간다.

서정홍 산골 농부

서정홍 산골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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