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여 전쯤 워싱턴에서 차를 운전해 귀가하던 중 뒤에서 오는 대형 밴에 들이받히는 사고를 당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가해 차량 운전자와 내게 이것저것 묻고는 사고 경위를 적은 리포트를 건넸다. 경찰의 도움으로 사고 피해 수습을 위한 첫 고비를 넘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리포트 작성자란에 적힌 경찰관의 이름이 한국 성씨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일말의 반가움도 느꼈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내가 한국계인 경찰로부터 편의를 제공받은 것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소수자의 얼굴’을 한 미국 경찰을 대하면서 법 집행기관의 다양성 확보가 다인종·다문화 사회인 미국의 숙원 과제인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다.
흑인 등 소수인종에 대한 경찰의 처우를 둘러싼 논란은 미국 인종 갈등의 뿌리와 맞닿아 있는 문제다. 경찰 조직이 다양성의 외피를 두른다고 단번에 해결될 리는 없다. 직원 훈련과 조직문화 개선, 나아가 인종 불평등과 범죄의 악순환을 끊어내려는 노력이 더 시급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럼에도 경찰이 공정하게 대우할 것으로 믿는다는 응답이 백인은 90%, 흑인은 61%(2023년 갤럽 조사)로 격차가 큰 상황에서 미국의 인구 구성을 반영하는 법 집행인력 확충이 필요하다는 데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다. 2022년 미 법무부 자료를 보면 흑인·히스패닉·아시아계 등 유색인 경찰은 전체의 30%(2020년 기준)에 이른다. 1960년대 무렵까지 백인 경찰이 비백인 출신보다 10배 이상 많았던 것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변화다.
미국 사회 전반에서 ‘DEI(다양성·공정성·포용성) 역풍’이라고 부를 만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 주입에 따른 피로도, 연방대법원 보수화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그럼에도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행정·입법·사법 등 공적 영역에서 다양한 배경을 지닌 이들의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지난해 1월 개원한 제118대 미 의회는 초유의 하원의장 해임과 예산안 처리 갈등 같은 파행이 계속되고 있지만, 역사상 가장 다양한 의회라는 업적을 세웠다. 퓨리서치에 따르면 상·하원을 통틀어 여성 의원이 28%, 백인이 아닌 소수인종 배경 의원은 25%로 역대 최고치다. 지난해 국빈방미한 윤석열 대통령의 의회 연설을 하원 본회의장 2층 구석의 기자석에서 지켜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도 미 의회의 다양한 얼굴이었다.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이민 국가인 미국의 정체성, 그리고 세상의 절반이 여성이라는 현실에 꽤 가까워 보였다. 11월 미 대선과 함께 진행되는 상·하원의원 선거에서 더 많은 소수자 출신 정치인이 배출되리라는 것도 예상되는 수순이다.
그런데 곧 총선을 치르는 한국의 상황에 비춰보니 별세계 이야기처럼 들린다. 거대 양당 지역구 공천자의 약 70%가 5060 남성이고, 여성은 10%, 청년은 3%에 그쳤다. 하기는 구조적 성차별의 존재를 부인해온 대통령은 여전히 여성가족부 폐지에 매달리고 있고, 성인지 감수성 부재를 드러내온 제1야당 대표는 “여성이 살림은 잘해”라는 식의 시대착오적인 막말을 내뱉는 현실이니 애초부터 기대를 접는 편이 현명했을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