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

약 30년간 무임승차해왔던 ‘무보수 가사노동’은 결혼과 함께 가정을 꾸리며 끝내 나의 일도 되었다. 엄마는 가족을 위한 일이라면 귀찮고 힘든 게 없어 보였는데, 이건 나의 완벽한 착각이었다. 해도 해도 할 일이 생겨났으며, 열심히 해도 큰 변화는 없었지만 모른 척했을 땐 금세 표시가 났다. 맞벌이였지만 가사노동의 주역은 나였고, 남편은 조연에서 더 이상 욕심내지 않았다.

출산과 함께 일과 가정, 육아라는 세 개의 공을 저글링하는 상황이 되자 나는 또 엄마에게 손을 벌렸다. 육아도우미 도움을 받았다면 국내총생산(GDP)에 기여라도 했겠지만, 엄마에게 드리는 용돈은 공식적인 노동으로 기록되지도 못했다. 온기가 있는 집에서 가족을 먹이고, 나가서 일과 학업에만 집중할 수 있게 사람을 돌보는 데에 엄청난 공짜노동이 녹아 있다는 걸, 그 혜택을 누리면서 ‘엄마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이아름 기자

이아름 기자

📌[플랫]여성들은 왜 ‘가사노동’을 떠안을 수밖에 없나

최근 전 세계적으로 ‘무보수 가사노동’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아이를 낳아 기르고, 음식을 만들고, 청소와 빨래를 하고, 부모를 부양하는 일이 인간의 생존과 삶의 질에 얼마나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코로나19 사태는 인간이 누군가의 돌봄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계기가 됐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고, 저출생이 심각해지면서 일·가정의 양립이 중요한 화두가 된 점도 가사노동의 가치를 부각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저출생·고령화로 급격히 늘고 있는 노인 돌봄 수요에 대한 고민은 국가적 과제가 됐다. ‘엄마의 헌신’에 기댄 ‘무보수 가사노동’으로는 더 이상 저출생을 막을 수도, 일과 가정의 양립을 가능케 할 수도, 노후의 돌봄을 기대할 수도 없게 됐다는 점이 확실해진 것이다.

통계청의 지난해 발표를 보면 2019년 기준 국내 가사노동 가치 총액은 GDP의 25.5%에 해당하는 490조9000억원으로 추산됐다. 나라 경제 규모의 4분의 1 규모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356조원으로 72%에 달했고, 남자는 134조9000억원으로 28%의 가사노동 가치를 창출했다.

이처럼 그간 경제활동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무보수 가사노동의 중요성은 인정하면서도, 한국 사회는 여전히 어떻게 하면 더 싸게 가사노동을 쓸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4일 경제 분야 ‘민생토론회 후속 조치 점검회의’ 모두발언에서 “국내에 거주 중인 외국인 유학생과 결혼 이민자 가족들이 가사·육아 분야에 취업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며 “가정 내 고용으로 최저임금 제한도 받지 않고 수요·공급에 따라 유연한 시장이 형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학생이나 결혼이민자 가족을 최저임금 미만의 가사·돌봄 노동자로 일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늘어나는 가사·돌봄 수요에 대한 해결을 ‘시장화’로 접근하는 것인데, 이는 가사노동,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깔고 있다.

📌[플랫]끊임없는 비판에도…‘필리핀 가사노동자’ 올 상반기 도입하는 서울시

📌[플랫]학대와 차별, 고민해 본 적 없는 ‘외국인 가사노동자제도’의 민낯

우선 은연중에 여전히 밖에서 보수를 받는 직업에 비해 가사노동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치 ‘워킹맘’이라는 표현 안에 집에 있는 엄마들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반영된 것처럼 말이다. 또 외국인 노동자를 합법적으로 최저임금 미만의 보수로 일하라고 하는 것 역시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담고 있다.

낸시 폴브레 매사추세츠대 경제학 교수는 저서 <돌봄과 연대의 경제학>(에디토리얼)에서 “선진국에서 돌봄을 제공하기 위해 ‘저렴한 이민자’를 수입하는 해결책은 전 지구적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으로 석탄 대신 값싼 천연가스를 수입하는 해결책과 마찬가지다. 글로벌 돌봄 사슬에 의존하면 돌봄 부족을 타인에게 전가하여 힘이 없는 집단과 저소득 국가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소득 수준이나 가족 형태에 상관없이 누구나 기본적인 돌봄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래서 정부의 가사 노동에 대한 성급한 시장화 추진은 우려스럽다. 저출생 문제 해결에도 외국인 가사도우미 도입은 근본적 해결책이 되기 어렵다. 부모가 가사와 양육에 더 신경쓰며 일할 수 있는 사회적 변화를 끌어내는 게 먼저다. 가사·돌봄 노동에 대한 정부 논의가 사회적 연대와 복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되길 희망한다. 우리는 누구나 돌봄을 필요로 한다.

▼ 이윤주 정책사회부장 runyj@khan.kr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