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플라스틱 협약

2024.05.02 20:39 입력 2024.05.02 20:42 수정

어릴 적 나의 전문직에 대한 ‘인증샷’은 의사 가운이나 판사복이 아니었다. 다크서클이 코밑까지 내려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상태로 해외출장을 다녀온 모습이었다. 막상 어른이 돼보니 해외출장이란 현지 시간에 맞춰 일하고 시차가 다른 한국 시간에도 맞춰 일하는 24시간 노동이었다. 때마침 ‘플라이트 셰임’이라고 환경을 위해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는 흐름이 생겨 자연스레 나의 철없던 로망도 사라졌다. 하지만 최근 해외출장을 떠나고 싶어졌다.

캐나다 오타와에서 국제 플라스틱 협약의 내용을 정하는 정부 간 협상위원회가 막 끝났다. 각국이 따로 규제하면 서로 눈치나 보다 끝나거나, 보수적 정부가 들어서면 그간 노력이 물 건너간다. 일회용품 규제와 단속이 정지된 국내 상황을 보라. 그래서 전 세계적 문제엔 전 세계 정부에 통용되는 기준선을 정하기로 했다. 플라스틱 생산과 소비, 폐기에 걸쳐 전 생애를 규제하는 만국 공통 제도를 정하기로 합의한바, 바로 국제 플라스틱 협약이 성사되었다. 그 협약의 합의안을 5번의 회의에서 정하는데 4번째 회의가 캐나다에서 열렸다.

지금은 기후위기로 멸망한다고 걱정하지만 ‘라떼는 말이야’ 산성비에 타죽거나 오존층이 뚫려서 죽는 줄 알았다. 나름 진지했다. 하지만 그때의 미래인 지금 눈부신 발전에도 산성비와 남극 오존층 구멍이 줄어들고 있다. 미리 국제협약으로 대응했기 때문이다. 화석연료를 태울 때 발생하는 유황과 질소의 배출량을 규제해 산성비를 줄였다. 1987년 역사상 가장 성공한 환경 협약으로 뽑히는 몬트리올 협약을 체결해 오존층을 파괴하는 프레온가스 사용을 금지했다. 두 협약의 공통점은 전 세계적으로 산업계, 과학자, 정책 입안자들이 강력한 규제에 합의한 후 신속하게 행동했다는 점이다.

텀블러와 용기를 내는 개인의 실천도 소중하지만 전 세계적인 플라스틱 규제야말로 문제 해결의 기반이 된다. 개인의 실천이 진심이라면 플라스틱을 규제하는 협약은 진심을 증명하는 축의금 같은 거다. 진심은 협약을 통해 구체적인 정책과 규제가 되어야 한다. 가장 첨예한 쟁점은 플라스틱의 99%를 차지하는 석유화학산업의 플라스틱 생산량을 줄이는 것, 말로만 말고 법적 구속력을 갖는 협약을 체결하는 것, 번지르르한 재활용 기술에만 기대지 않고 재사용과 리필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이에 대항해 석유화학업계, 플라스틱 산업, 산유국들이 만수르처럼 넘치는 돈으로 협약에 어깃장을 놓고 있다. 캐나다 회의장에는 국가 대표단, 과학자, 활동가보다 화석연료 업계의 로비스트 수가 2~3배 이상 많았다. 등록된 산업 로비스트만 해도 지난 3차 회의 때보다 약 40%나 증가했다. 가장 고통받는 저소득 국가에서 온 활동가와 원주민은 비자 문제로 캐나다 입국마저 늦어졌다.

국제 플라스틱 협약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제2의 몬트리올 협약이 돼야 한다. 사람과 지구냐, 플라스틱이냐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자식들이 ‘라떼는 말이야’ 플라스틱 괴담을 말하면 귓등으로도 안 듣고 웃어젖히는 미래를 꿈꾼다. 국제 플라스틱 협약의 마지막 회의는 올해 11월 대한민국 부산에서 열린다. 비행기 타고 해외출장 가지 않아도 된다. 바로 여기 부산에서 산업계 로비스트 수보다 더 많고 강력한 시민들의 로비력을 보여주자.

고금숙 플라스틱프리 활동가

고금숙 플라스틱프리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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