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 시대

2024.05.07 20:15 입력 2024.05.07 20:19 수정

[송두율 칼럼]격동의 한 시대

특별히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사건을 기억하고 기리는 일은 개인적 차원에서도 가능하지만, 대개는 집단으로 수행된다. 이 집단적인 기억은 또 종합적이고 적확한 기록을 지향하는 역사와는 달리 어떤 특정한 사회 집단이 지닌 가치나 서사에 근거해서 진행하는 특성을 지닌다.

개인들이 지난날 있었던 특별한 사건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면서 자기가 속한 집단의 목적, 행위나 정체성 수립에서 중요한 기억을 보존한다. 개인이 잊힌 기억을 되살리는 것처럼 집단적 기억도 수시로, 또 기억의 선호도나 경중에 따라 선별적으로 저장하고 불러모을 수 있다.

특히 전쟁, 정변, 위험, 재앙, 추방 등과 같은 극히 중요하고 절박하다고 판단된 사건은 어떤 특정한 집단만의 기억이 아니라 전 사회적인 기억으로, 이른바 기억 문화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 이 기억 문화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교정되기도 하고, 기념 동상이나 기념물이 철거되는 것처럼 폐기되기도 한다.

이들 가운데 최근 지구적인 범위에서 이루어진 집단적 기억으로 코로나 팬데믹의 경험을 우리는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인류가 함께 경험한 최대의 비극이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제로부터 조선이 해방되자 부모 품에 안겨 귀국한 어린 나에게 한국전쟁은 우리 땅에서 처음 경험한 집단적인 기억이었다. 그 후로 청소년기를 거쳐 2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경험한 4·19와 5·16은 정치적 혼란과 정변으로 채워진 집단적인 체험이었다.

이른바 ‘68혁명’의 사상적 진원지 중 하나였던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학위를 마치고 대학 강단에 섰던 1970년대 - 물론 남한 사회가 겪고 있었던 갈등에 비하면 심한 것도 아니었지만 - 서독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사회적 갈등이 첨예했다.

1974년 3월1일, 서독 수도 본에서 유신정권에 반대해서 집회와 시위를 벌이고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발족시켜 반동의 시대에 저항하는 데 멀리서나마 동참했던 일은 그래서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올해로 50주년을 맞는 이 집단적 체험을 상기해서 금년 5·18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자리를 빌려 조촐한 모임이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반동의 시대’ 저항은 소중한 기억

지난 4월25일은 또 내가 5년 가까이 사는 포르투갈이 1974년에 있었던 ‘카네이션 혁명’ 50주년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이날을 맞아 포르투갈은 물론, 여러 나라의 매체들은 특별 프로그램을 통해 이때의 집단적인 기억과 50년이 지난 오늘의 포르투갈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보여주었다.

35년 동안 철권을 휘두르며 통치했던 살라자르가 1968년부터 건강이 악화되면서 점차 실권을 잃게 되었고 1970년에 사망했다. 그 뒤를 이은 케이타누 역시 반공과 국가 예산의 절반을 삼킨 앙골라·모잠비크 등지에 대한 식민지 유지정책에 매달렸다. 이에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청년 장교단이 무혈 쿠데타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거의 같은 기간에 걸쳐 스페인을 통치했던 독재자 프랑코도 1975년 사망했다. 약 20만명으로 추산되는 희생자를 낳은 스페인 내전(1936~1939)을 통해 집권한 그의 철권통치는 군의 무혈정변에 의해 종식된 포르투갈과 달리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왕정 복귀와 연결되었다. 포르투갈의 독재 종식 방식이 급진 사회주의적인 데 비하여 스페인의 그것은 점진적이고 보수적이었다.

독재체제의 종식에 이은 과도기를 거쳐 정치적으로 점차 안정되는 두 나라의 민주적인 정치 지형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회당을 적극 후원했던 빌리 브란트의 역할은 특기할 만하다. 독재체제하에서 정치활동이 불법화되었기에 외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던 사회주의자와 노동운동가들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의 많은 지원을 받았다.

포르투갈의 사회당(PS)은 1973년 4월 서독 본 근처에 있는 바드 뮌스터펠트에서 재창당했는데 마리오 소아레스가 이끈 이 당은 1976년에 치러진 총선에서 35%를 득표하면서 제1당이 되었다. 또 ‘빌리 브란트의 양자’로 불렸던 스페인의 ‘사회노동당’(PSOE)의 펠리페 곤살레스도 1982년부터 무려 14년 동안이나 총리를 지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나타난 이 같은 정치적 변화는 나에게도 큰 관심사가 되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1969년 가입까지 했던 통일사회당의 김철은 1980년 신군부의 ‘국보위’ 위원이 되었다. 비록 엄혹한 국내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남한에서 사회민주주의의 지평을 찾는 일은 상당히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판단했다.

서유럽에서 전후에도 오래 지속된 두 독재국가의 이런 변화와 함께 1975년 4월30일 사이공 함락으로 끝난 베트남 전쟁은 이 시대의 강렬한 집단적 기억이었다. 2차 세계대전 후에 프랑스와 8년에 걸친 해방전쟁에서 승리한 후 다시 미국과 장장 20년에 걸친, 엄청난 희생을 치렀던 투쟁은 결국 베트남의 승리로 귀착했다.

반제와 민족해방 투쟁의 역사에 한 장을 기록한 이 베트남 전쟁에 연인원 32만명의 한국군이 참전했다. 당시 외신에 간간이 보도되었던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수치와 곤혹스러움을 심히 느낀 시절이기도 했다.

당시 나는 소련과 중국 사회주의의 유사성과 차이점에 관한 경험적인 연구에 많은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소련이 강력히 지원했던 베트남이 폴 포트 치하의 캄보디아를 점령하자 캄보디아 후원국이던 중국은 1979년 초에 베트남의 국경지방을 한때 점령했다. 중·소 분쟁은 반제투쟁과 민족해방전쟁 중에도 여전히 지속됐다.

변혁 열기·실존적 해명 공존 시대

1970년대 있었던 또 다른 큰 비극적 사태는 남미에서 발생했다.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수립된 칠레의 사회주의 정권이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 군부의 유혈 쿠데타로 무너지고 아옌데 대통령도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렇게 1970년대 지구촌의 ‘주변부’와 관련된 집단적 기억의 줄거리는 이른바 ‘중심부’ 서유럽과 동시대적인 맥락 속에서 만나게 되었다. ‘도시 게릴라’라는 표현처럼 주변부의 해방전략을 중심부의 해방전략의 본보기로 삼은 ‘적군파’는 정치적 수단으로 테러도 선택했다.

이런 상황을 ‘통치 불능’으로 정의하고 공세를 펴기 시작했던 신보수주의는 복지국가의 재정적 토대를 흔들었던 1973~1974년의 1차, 그리고 1979년의 2차 유류파동을 거치면서 더욱 힘을 얻었다. 이때 속도 제한이 없는 고속도로에서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전후 고도성장 경제의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에 대한 처방이 바로 1980년대 시작과 더불어 등장한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로 표현된 신자유주의였다.

격동의 1970년대가 이렇게 마감하는 모습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서독의 비판적 지성 32명이 시도한 시대진단을 담은 <‘현대의 정신적 상황’에 대한 항목들>이 1979년 발간되었다. 이 책의 서문에서 하버마스는 개인의 자유가 너무 많아 사회적 갈등이 심해졌다고 주장하는 신보수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이런 시대진단의 전형은 놀랍게도 전통적인 의미에서 1970년대를 풍미했던 좌파의 철학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실존철학’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카를 야스퍼스의 <현대의 정신적 상황>이 1970년대의 시대진단을 위한 본보기였다. 나치 집권 직전인 1931년에 출판된 이 책에서 야스퍼스는 인간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고, 일상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을 지배하는 상황을 비판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희망의 원칙’을 설파한 마르크스주의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진솔한 후기 부르주아’라고 칭했던 야스퍼스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적인 언술 체계를 빌리지 않고도 자연 파괴, 거대 기술, 에너지와 자원 고갈, 심지어 가족정책과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현존재의 질서 안에 도사린 위기에 대해 진단했다. 오늘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대안적 사회 운동에 대한 모색을 담은 시대진단이었다.

밖으로 분출된 변혁의 혁명적 열기와 실존적 해명이 함께하면서 격동의 1970년대는 이렇게 끝났다. 이 시대를 함께 보냈던 독일과 국내외의 동지와 지인들이 하나둘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며 반세기 전의 집단적 기억을 내 나름대로 불러모아 본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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