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추가 좋으면 씻는 재미가 있어. 아기 같아서.”
상추를 내밀던 고깃집 사장님이 혼잣말인 듯 한마디 하신다. 나온 상추를 씹다 깜짝 놀랐다. 그야말로 최고였다. 어디서 이런 상추가 났어요! 하고 감탄하니 수줍게 반응하신다. “사 온 거 아녜요. 친구가 텃밭에서 키운 거예요.” 이어 덧붙이셨다. “상추가 좋으면 아기 씻기는 것 같아. 내가 애를 둘 키웠어.” 나는 기어코 ‘아기 같다’의 속뜻을 캐물었다. 잠시 갸웃하던 사장님의 말씀이 이랬다. 좋은 상추는, 정말 보드라운데, 그러면서도 적당히 버티는 힘이 있고, 한 줌 쥐는 손아귀의 맛이 있고, 내 손끝 타고 씻는 대로 깨끗해지니 그 때문에도 기분이 좋아진다고. 직업이 병이다. 멋진 관능 표현을 만나며 귀가 번쩍한다. 연하고 부드럽되 씹는 맛이 있고, 달보드레하면서도 쌉싸래한 가운데 채소다운 풍미가 감도는 이 상추는 씻는 재미까지 있었구나. 동네 고깃집에서 상추를 얻어먹으며 생각했다. 한반도의 여름을 지나며, 쌈 없이 어쩔 뻔했어.
고마운 상추며 쌈을 둘러싼 기록은 뜻밖에,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사소절(士小節)> 같은 문헌에서도 찾을 수 있다. ‘교양 있는 사람(士)’의 ‘일상생활 예절(小節)’을 시시콜콜 거론하고, 이것만은 지키라고 신신당부한 <사소절>에 따르면, 쌈은 이렇게 싸야 한다. “상추(苣萵)·취(馬蹄菜)·김(海苔) 따위로 쌈을 쌀 때 손바닥에 바로 놓고 싸지 말라. 단정하지 못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이어 신칙한다. “입에 넣을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싸서 볼이 불거져 보기 싫은 꼴 하지 말라”고. 그러니 숟가락으로 밥을 떠 동그랗게 뭉쳐, 젓가락으로 상추 등을 덮어 싸라고 했다. 이런 당부는 20세기 전반까지도 이어졌다. 방신영(方信榮, 1890~1977)이 1930년대에 펴낸 <일일활용조선요리제법> 속의 상추쌈 싸 먹는 법은 이렇다. “먹을 때에는 손에 놓고 하지 말고 젓가락으로만 먹도록 할 것이니 밥 위에 고추장을 조금 놓고 상춧잎을 젓가락으로 한 잎씩 집어서 밥 위에 놓고 젓가락으로 밥을 싸 잡아서 먹는 것이 좋으니라.” 이런 문단은 뒤집어 독해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제법 교양 있다는 사람일지라도, 쌈 앞에서는 입 한껏 벌리고, 눈 부릅뜨고, 목구멍 열 만큼 열고, 볼때기 미어터지는 꼴을 사양하지 않았다는 말이겠다.
쌈을 싸는 손은 직관적으로 안다. 쌈은 체면 차릴 것 없이 먹는 음식이다. 쌈은 손에서 쌈을 이루어, 그대로 입으로 가야 한다. 밀어 넣어야 한다. 교양이고 뭐고 일단 볼때기 미어터져야 제맛이다. 오늘날의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 귀양살이 한 적 있는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그곳 농민의 한 끼를 이렇게 노래했다. “상춧잎에 보리밥 둥글게 싸 삼키고는( 苣葉團包麥飯呑)/ 고추장에 파뿌리 찍어 먹는다(合同椒醬與葱根).” 이렇게 한 끼 해치우고, 장기의 농민들은 밭으로, 논으로, 가자미 작업장으로 달려갔다. 그러고 보니 고추장도 눈에 박힌다. 쌈에는 역시 별미장이다. 고단하고 분주한 가운데서도 쌈에다가는 고추장과 같은 귀한 별미장을 양보하지 않았다. 이렇게 여름을 건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