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뇌, 그 은밀한 독자성

2023.10.04 20:27 입력 2023.10.04 20:30 수정

[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 제2의 뇌, 그 은밀한 독자성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는 변비로 죽었다. 불과 42세 나이에 엘비스는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 자택의 가장 넓고 호화로운 화장실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부검해본 결과 그의 대장은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졌던 것으로 드러났다.

발생 과정에서 대장의 일부 혹은 전부에 신경세포가 도달하지 않는 히르슈슈프룽병(Hirschspsrung’s disease) 환자는 대변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대장 연동운동에 장애가 생긴 탓이다. 대장 끄트머리에 멈춰선 대변에서 물기가 빠지면서 곧바로 변비로 이어지는 것이다.

내외 중배엽에 이어 제4배엽으로 알려진 신경 능선에서 유래한 신경세포가 식도에서 대장 끝까지 터를 잡고 암약해야 ‘먹고 싸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입에서 꿀떡 삼킨 음식물이 어디에 어떤 상태로 있는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신경세포들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음식물을 소화하고 흡수한 뒤 찌꺼기를 처리하기까지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사실상 거의 없다. 생리학자들은 이 소화기 신경계를 ‘제2의 뇌’라고 부르며 그 은밀한 독자성을 칭송한다.

본성상 뇌는 움직임과 관련이 깊다. 고착생활을 하며 바닷물을 걸러 먹고 사는 멍게는 중추신경계인 뇌가 없다. 하지만 올챙이처럼 생긴 멍게 유생은 놀랍게도 뇌가 있다. 바위에 몸을 붙이는 순간 멍게는 곧바로 자신의 뇌를 소화해 버린다. 지느러미를 움직일 필요가 더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골격근을 움직이는 데 신경세포가 필요하다는 증거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는 또 다른 근육이 있다. 바로 평활근이다. 우리 몸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8m 길이의 소화기관을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근육이다. 이 평활근이 움직일 때도 신경계가 필요하다. 뇌와 같은 중추신경계가 없는 히드라, 뇌를 버린 멍게도 소화기 신경계는 있다. 약 6억5000만년 전에 등장한 히드라는 신경망을 갖고 신경 전달물질을 매개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소화관 근육층을 움직인다.

그런 방식으로 히드라는 물속의 미생물을 먹은 지 약 6~9시간이면 찌꺼기를 몸 밖으로 내보낸다. 콜히친이라는 독성물질을 처리하여 신경세포를 없애버리면 히드라의 소화기관은 거의 움직이지 않아 먹잇감을 앞으로 밀거나 뒤섞지 못한다.

중추신경계보다 훨씬 먼저 소화기 신경계를 진화시킨 다세포 동물은 신경 전달물질도 다채롭게 합성했다. 히드라나 성게, 불가사리 같은 극피동물도 세로토닌을 만든다. 행복 호르몬으로 알려진 바로 그 화합물이다. 뇌에 세로토닌의 양이 줄면 인간은 우울증에 걸린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세로토닌은 주로 뇌에서 만들어져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 몸에서 만들어지는 세로토닌의 9할 이상은 히드라처럼 소화기관에서 합성된다. 척추, 무척추동물 할 것 없이 동물계에서 오랫동안 보존된 세로토닌은 소화기관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것일까?

짐작하듯 세로토닌은 소화기 신경계와 면역 반응을 조절하고 장 상피세포가 건강하도록 돕는다. 염증성 장 질환을 앓는 환자는 장 세균 다양성도 줄어들고 세로토닌 대사도 흐트러져 있다. 소화기관에서 벌어지는 이런 상호작용은 늘 그렇듯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지는 않는다. 적기는 하지만 세균도 세로토닌을 만들고 장이 이 화합물을 더 만들도록 장 대사산물을 조절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균 상태로 키운 쥐에 세로토닌의 양이 부족한 점도 이런 사실을 방증한다. 최근에 밝혀진 세로토닌의 새로운 역할은 가뿐히 소화기관을 넘어선다. 혈소판은 혈액으로 들어온 상당히 많은 양의 세로토닌을 전신으로 보내 뼈를 재생하거나 물질대사 항상성을 조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뇌-혈관 장벽을 통과하지는 못한다. 뇌의 세로토닌과 소화기관의 그것은 일하는 장소가 각기 다른 것이다.

캄브리아기 이전에 등장한 초기 동물들은 세로토닌 말고도 옥시토신이나 바소프레신 같은 신경 전달물질을 만들었다. 이런 물질이 중추신경계에서도 발견되고 신경 발생이나 세포 유형이 비슷하다는 점도 밝혀졌기에 원시 신경계가 소화기 신경이나 뇌로 발전해 간 것이 아닐까 추론하지만 뚜렷한 결론은 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동물계에 소화기 신경계가 뇌보다 먼저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먹고 싸는 일은 인간의 몸 중심에서 신경계와 근육의 활발한 움직임, 세균의 견제와 협조를 동반한 그야말로 핵심 사업이다. 눈앞에 보이는 골격근의 우람함 뒤에는 군말 없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소화기관 평활근이 있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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