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또 계획범죄 드러난 ‘교제 살인’, 법 사각지대 조속히 고쳐야

2024.05.09 18:15

지난 6일 서울 강남역 인근 고층건물 옥상에서 20대 남성이 이별을 통보한 여자친구를 살해했다. 전형적인 교제살인이다. 범행 전에 미리 흉기를 구입한 계획범죄였다. 지난 4월 경남 거제에서도 남자친구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한 20대 여성이 숨졌다. 그 한 달 전엔 경기 화성에서 헤어지자는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여자친구 어머니에게까지 흉기를 휘두른 남성이 구속됐다. 잇단 교제살인의 심각성이 도를 넘었는데도 범죄자 신상 얘기로 사건의 본질이 희석되고, 정부 역시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지난 3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남성 파트너에게 살해된 여성은 지난해에만 최소 138명이었다. 교제폭력으로 검거된 피의자는 1만3939명으로 2020년 대비 55.7%나 증가했다. 교제폭력은 스토킹처벌법이나 가정폭력처벌법 대상이 아니어서 접근금지·분리조치 등이 불가능하다. 또 일반 폭행 사건과 같이 반의사불벌죄라 피해자가 원치 않으면 처벌할 수 없다.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교제폭력 특성상 가해자의 회유·협박 등으로 범행이 곧잘 은폐되고 있는 것이다. 경남 거제에서 살해당한 여성이 죽기 전까지 11차례나 남성을 신고했지만 매번 처벌 불원으로 종결된 것이 그 예다.

그러나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에서도 교제살인·폭력의 원인 분석과 대책 마련은 겉돌고 있다. 가해자가 ‘명문대 의대생’이란 점만 톺아지고, 피해 여성의 신상까지 유포됐다. 정부도 다를 것 없다. 주무부서인 여성가족부는 사건 발생 후 사흘 동안 침묵만 지키다가 9일에서야 “정책 사각지대를 발굴하고 보완하겠다”고 밝혔다. 하기야 2022년 인하대 캠퍼스 살인사건 당시에도 “학생 안전의 문제지, 남녀를 나누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여성 폭력에서 ‘여성’을 지우려 했던 여가부에 무엇을 더 기대하겠는가. 현재 국회에는 교제폭력 방지 관련 법안이 여러 건 발의돼 있다. 더 늦기 전에 잠자고 있는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 언제까지 이 죽음의 행렬을 지켜봐야만 하는가.

이별을 통보한 여자친구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20대 남성 A씨가 8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이별을 통보한 여자친구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20대 남성 A씨가 8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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