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적 민족주의

2015.08.25 21:22 입력 2015.08.25 21:31 수정
박원호 | 서울대 교수·정치학

[정동칼럼]전투적 민족주의

몇 년 전 동일본 대지진 소식이 전해지던 날, 나는 강남역에서 운 좋게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열도 침몰” 등의 단어가 난무하는 라디오를 듣던 택시기사 왈, “잘됐다. 그냥 가라앉아버려.”

어떤 자연재해보다도 더 잔혹한 것이 인간의 마음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바는 아니나 그런 마음이 모는 차를 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500원을 건네주며 갑자기 내려야겠다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택시기사는, 의외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토록 전투적인 우리의 민족주의는, 혹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르는 이 습관은 왜란과 호란, 서구 열강의 각축과 일제강점의 역사가 우리의 집단적 유전자에 각인시켜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국가의 경계가 흐려지고 자본과 생각이 지구 구석구석을 빛의 속도로 운항하는 시대에, 우리의 민족주의는 여전히 건재하며 오히려 진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전 세대의 전통적 민족주의와 다르다는 의미에서 이것을 편의상 ‘신’민족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전통적 민족주의가 고통과 눈물 속에서 단련된 대응적이고 수세적 민족주의였다면 새로운 민족주의는 경제성장과 월드컵과 한류로 요약되는 자긍심의 다른 이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민족주의는 공격적이며 비타협적이고 어떤 자리에서든 느닷없이 “두 유 노우 싸이?”를 물을 수 있을 정도로 대담하기까지 하다. 고단한 삶과 답답한 현실을 ‘헬조선’으로 묘사하면서도 ‘필승 코리아’를 외치는 모순에서 새로운 민족주의는 시작된다.

새로운 민족주의의 ‘민족’에는 북한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이전 세대가 적어도 북한 주민들에 대한 온정적인 연민을 지니고 있었던 직간접적인 이산가족이었다면, 젊은 세대들에게 북한은 성가시고 못난 이웃나라에 불과하다. 여론조사에서 ‘반드시 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견이 점차 낮아지고 있으며, 특히 20~30대들이 북한에 대한 식량원조 등에서 60~70대들보다 더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만약 통일이 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합당한 이유와 비전-예컨대 “대박”-이 있어야 할 것이다.

북한과의 대치 국면이 계속되면서 연일 SNS를 수놓았던 ‘군복 인증’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징후적이다. 언론에서는 청년층이 (바람직하게) 달라졌다는 제목을 뽑고 있지만 이러한 전투적 민족주의가 우리 주변을 배회한 지는 제법 되었다. 독도를 빼앗으려는 일본과의 외교단절을 주문하고 고구려 역사를 왜곡하는 중국과의 일전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확성기 문제로 시작된 전쟁에 기꺼이 온몸을 바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물어봐야 할 것은 과연 이들이 전쟁과 눈물과 고통의 구체성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여부일 것이다. 정말 당신은 당신의 동생을 꼭 빼닮은 누군가를 죽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걱정스럽고 우려되는 사실은 우리의 정치가, 혹은 우리 공동체가 올라탄 차를 모는 이들이 ‘신민족주의적’이라는 사실이며 상당한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현 정부의 외교·통일 정책이 각종 조사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우리의 대북·대일 정책의 핵심 기조는 김정은과 아베라는 매우 다루기 힘든 상대들을 아예 다룰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위와 같은 여러 이유들로 대북·대일 경색 국면에서 현 정부는 전혀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놓친 시간과 줄다리기에 든 비용이 언젠가 우리에게 청구될 것이며, 그때는 이미 현 정부가 운전대를 내려놓은 다음일 것이다.

사실 민족주의란 말이 부정적 의미를 띠게 된 지는 매우 오래된 일이며, 민족주의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개화기 지식인들의 주장이다. 글로벌 시대에 맞지 않는다거나 집단주의적이라는 비판도 늘 듣던 이야기이다. 그러나 정작 내가 견딜 수 없는 부분은 모든 것들을 피아(彼我)로 추상화시키는 그 편리한 둔감함이다. 지진 피해를 입은 어느 일본인의 눈물이 내가 그 자리에 있을 때 흘릴 눈물과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어느 외국인 노동자의 고통은 그냥 보편적인 아버지의 고통이기도 하다. 이를 어떤 이들은 ‘감성팔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민족이라는 감성보다는 고통의 보편성이라는 감성을 언제 어디서든 주저 없이 택할 것이다. 고통을 덜고 눈물을 닦아주는 일은 그것을 공감하고 느끼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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