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파주에서 오는 까닭

2014.10.24 20:43 입력 2014.10.24 21:14 수정
서해성 | 소설가·한신대 초빙교수

일찍부터 책이 있고 가을이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가을은 파주에서 시작된다.

[시론]가을이 파주에서 오는 까닭

이 가을을 위하여 잉크 냄새 가득한 축문 한 묶음을 바친다. 출판사 일조각 도서목록이다. 목록이름 1953-2003. 때로 목록만으로도 살아 있는 지식역사와 조우하고 묵직한 제목과 제목 사이에서 시를 만나는 경우가 있다. 오직 책이름만이 그러하다. 목록의 주인은 환갑을 넘긴 출판사와 그 출판인 한만년이다. 책도시에서 그 둘을 하나로 기리는 제사이자 잔치이자 전시회 이름은 출판인 한만년과 일조각(열화당책박물관, 10·2~12·26)이다.

책이란 기록과 기억의 저장 장치다. 이를 다시 기록과 기억하는 일로 형상화해낸 이기웅(열화당 대표)은 제 몫을 오직 한 글자로 줄여 말했다. 염(殮). 기록과 기억을 추스르고 다듬어내는 염습이라는 뜻이렷다. 가히 지상에서 가장 짧은 제문이다. 반세기 동안 2000여 책을 세상에 내놓은 한 출판인의 일생에 대한 후학의 옷자락 빈틈없이 가지런한 말이다. 때로 한 글자만으로도 문자향은 족히 깊다. 경포호를 건너가 만나던 배다리집 선교장 선비가 이렇듯 허사도 후렴도 없이 단정한 데는 내력이 있다.

한 물결로 지은 활자의 집 일조각은 한국 출판에서 돛대 같은 구실을 하며 시대와 사람과 문자와 지식 사이를 예순 해 넘게 헤쳐왔다. 우선 그 출판사의 첫 책이 한만년의 장인이요, 소설가이자 제헌헌법을 기초한 헌법학자 유진오의 <(신고)헌법해의>다. 이 책은 애초 명세당에서 찍었던 것인데 한만년이 출판을 배운 고종사촌이 운영하던 탐구당으로 옮겨갔다가 세 번째 펴내면서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장인을 책으로 모셔온 셈이다.

암스테르담 프리젠 운하를 따라가면 합스부르크 왕관을 쓰고 있는 서교회 바로 건너편에 안네 프랑크네 집이 있다. 그 꼭대기 다락방에서 보이는 교회 시계탑이 십오 분마다 울리는 종소리를 안네는 친구 같다고 일기에 적었다. 그 문장을 한국어로 처음 들려준 건 한만년의 아내 유효숙의 번역으로 나온 <별은 창 너머(안네의 일기)>(1954)였다. 눈매 깊은 안네의 단발머리 사진이 표지에 박힌 초간본(영어와 일어 중역)은 전시장 서가에서 뽑아볼 수 있다. 일조각 첫 책은 장인이 썼고 두 번째는 아내가 번역한 책이다. 한만년은 처가에 글 빚을 졌고 실로 이는 드문 축복이었다.

일조각이 이뤄낸 가장 굵은 공적으로 꼽아야 하는 건 한국사를 식민사학에서 일어서게 한 줄기찬 기획과 성과다.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을 필두로 몇 권만 수평으로 펼쳐 봐도 목록이 그대로 한국사 연구가 된다. 한국역사와 문화와 관련한 책이 1500여 종에 이를 지경이니 그 출판사집 아들(한홍구, 현대사학자)이 대학에 다니는 동안 강의 대부분을 자기 집에서 나온 책으로 배웠다는 말은 한낱 허투가 아니다.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지성이라는 양대 잡지 또한 초기에 이 출판사 품에서 발행되었다. 이 일련의 활동은 일조각이 한국 지성사의 저수지요, 거대한 지적 물결이었다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준다.

임정 법무위원을 지낸 독립운동가로 귀국해 동아일보 창간기자였고 동아일보 시대일보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일하던 한기악은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둘째아들 한만년은 집 없이 떠돌면서도 먼저 활자로 된 집을 짓고 이윽고 아버지 아호를 새겨 월봉저작상을 제정했다. 첫 수상작은 <서간도시종기>였다.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이 쓴 이 책은 그 여섯 형제의 독립운동에 대해 한땀 한땀 뜬 기록문학이다. 한국출판금고 설립, 출판업 면세 혜택, 저작자 원고료와 인세에서 소득세 면제 등도 출판인 한만년의 생각과 손을 거쳐갔다. 소격동 가는 길 사간동 벽돌집 출판문화회관은 그를 중심으로 쌓아올린 책과 지성의 오랜 토론장이다.

말을 심고 문자를 일으키는 일이 출판이다. 인간사유의 통합적 집약체인 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도시이자 국가요, 지성의 뜨락이자 광야요, 옆집 세간살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골목이자 끝없는 대로이고, 무엇보다 집요한 향연이다. 이를 재구성하는 기억의 역사를 전시로 만나는 일은 책도시(파주북소리 2014)가 주는 가을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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