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뒤집어보니 길이 보이더군요”

2006.04.23 17:50

1960~70년대 부산 동구 범일동 일대를 떠올리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포진한 신발공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높이 치솟은 공장 굴뚝에선 검은 연기가 오르고, 출근길 공원들이 줄지어 정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당시 범일동의 낯익은 아침 풍경이었다. 태화고무, 국제고무, 동양고무…. 부산에서 자란 40, 50대들은 이름만 들어도 ‘아, 그 공장’할 정도로 유명했다.

[사람속으로] “세상을 뒤집어보니 길이 보이더군요”

당시 산업역군이자 근대화의 상징적이었던 이들 공장에서 만들던 신발들을 떠올려 보면 호랑이가 그려진 범표(삼화고무), 말이 그려진 말표(태화고무), 왕자표(국제고무), 기차표(동양고무) 등이 있었다. 기억이 아련한 만큼 오래된 이들 신발공장은 역사의 뒤편으로 밀려났다. 이른바 신발산업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발산업은 절대 사양산업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국내 등산화 시장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는 트렉스타의 권동칠 대표(51)가 그 주인공이다. 부산의 새로운 산업 메카 녹산공단에 자리잡고 있는 트렉스타 본사에서 그를 만났다.

#세상을 뒤집어 보는 ‘삐딱이’의 창의성

“일반적으로 신발산업을 사양산업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신발산업과 신발제조업을 구별하지 못해서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신발제조업은 신발산업 전체에서 보면 비중이 5% 정도밖에 안됩니다. 신발산업이란 제조외 마케팅, 디자인, 신기술개발 등 산업 전반을 뜻하는 겁니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신발산업은 사양산업이 아닙니다.”

그의 설명을 듣다보니 신발산업이란 게 새롭게 보였다. 크지 않은 키에 다부진 몸매를 가진 권대표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확고한 신념과 자신감이 실려 있었다.

그는 화법부터 특이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잘못돼 있다.’ 이를 보통사람들의 문법으로 풀어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개선할 여지가 있다’란 뜻이다. 그는 이런 논법으로 종업원들에게 “지금 신발은 모두 잘못되었다. 그 잘못된 점을 찾아라”라고 주문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황당하기도 하겠지만 그의 이런 개선의지는 등산화의 역사를 바꾸었다.

1994년 트렉스타에서 등산화를 만들기 전 세상의 모든 등산화는 무겁고 딱딱한 통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는 ‘산을 오르며 왜 이렇게 무거운 신발을 신어야 하나. 이건 잘못된 것 아니냐.’ 이런 의문을 갖고 가볍고 소프트한 등산화를 개발했다. 그리고 불과 10년 만에 전 세계 등산화의 주류를 가볍고 소프트한 쪽으로 바꾸어버렸다. 세계에서 가장 가벼운 등산화도 트렉스타에서 개발했다. 시장의 흐름을 바꾸었을 뿐 아니라 기술력으로도 선두에 나선 것이다.

‘삐딱이’ 같은 그의 시각은 인라인 스케이트화 부문에서도 새 지평을 열었다. 90년대 초반 인라인 스케이트화는 딱딱한 플라스틱 소재로 바람이 통하지 않아 쉽게 땀이 차고 신기에도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는 ‘인라인 스케이트화라고해서 딱딱한 소재를 써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하며 신발 부위를 소프트한 소재로 만들었다. 공급자개발방식(ODM)으로 협력을 맺고 있는 세계적인 인라인 스케이트업체인 K2에서도 깜짝 놀랐다. 현재 인라인 스케이트화의 세계시장 95%가 트렉스타에서 개발한 소프트형으로 바뀌었다.

88년 아내와 직원 4명을 데리고 창업한 동호실업을 모태로 성장한 트렉스타는 중국 현지에만 2개의 공장에 직원 5,500명을 두고 있다. 이 정도면 성공했다고 할 만한데 그는 이제 시작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신발산업도 사양길이 아니라 이제 유아기라고 주장한다. 기술력이 뒷받침되면 특수화의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신발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제품의 브랜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브랜드 파워는 국력뿐 아니라 생활 문화수준이 뒷받침되어야 생겨나는 겁니다. 80년대 중반까지 국력이 채 커지 못했을 때 신발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브랜드 파워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국내에서 1등 해도 세계적인 브랜드가 들어오면 바로 시장을 잠식당합니다.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세계 10위권 무역강국으로 성장한 만큼 기술력이 뒷받침되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날의 에너지는 그날 소진하라

[사람속으로] “세상을 뒤집어보니 길이 보이더군요”

권대표는 일찍이 주문자생산방식(OEM)을 벗어나 자체 브랜드를 개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자가 브랜드는 자식과도 같다. 바이어는 왔다가는 손님이지만 자가 브랜드는 키워놓으면 그게 재산이라는 것이다. 이런 그의 시각은 안정적인 직장을 박차고 나가 창업을 하게 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그도 금융회사 등 몇군데 회사의 취업시험에 합격했다. 졸업을 기다리던 중 신발제조업체인 세원이라는 중소기업에 시험을 보았다. 거기도 합격했다. 그가 신발과 인연을 맺게 된 첫날이었다. 조금만 다니다가 합격했던 큰 회사로 옮겨야지 했는데(당시는 졸업하기 전 취업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작은 회사는 관계없었다) 직장생활은 첫날부터 재미있었다. 일을 할수록 성취감이 커졌고 그는 점점 일에 빠져들었다. 해외영업을 담당했던 그는 바이어들을 집에 데려가 식사대접을 하기도 했고, 새벽에 출근해 다음날 새벽에 퇴근하는 생활을 자청했다. 결혼하기 전에는 1주일에 3~4일은 회사에서 자고 바로 출근했을 정도였다. 신혼여행을 갔을 때도 하룻밤을 지내자 출근해야겠다며 돌아왔을 정도니 남들이 볼 때는 ‘일에 미쳤다’고 할밖에. 그 결과 입사 2년6개월 만에 부서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일은 보람 있었고 회사에서도 충분한 인정을 받았기에 창업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창업의 계기는 정말 운명처럼 다가왔습니다.”

그의 창업 계기는 좀 독특했다. 당시 바이어였던 영국의 등산화 전문 브랜드 ‘HI-TEC’라는 회사에서 그에게 2억5천만원의 창업 자금을 대주었다. 여러 종류의 신발 가운데 등산화 분야만큼은 기술력으로 승부를 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그가 주력한 것도 등산화 부문이었다. 하청업체로 출발했지만 창업 초기부터 독자 브랜드를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회사 대표가 되어서도 일에 빠져 살았다. 매일 매일 전력투구를 해야 직성이 풀렸다. 잠자리에 들어도 그는 열을 세지 못한다. 누우면 바로 ‘곯아떨어진다’. 그리고 눈 뜨면 바로 새로운 열정으로 일을 찾아 다닌다. 그 결과가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등산화 트렉스타다.

#산악인들처엄 새 영역 개척

권대표는 등산화를 주력상품으로 만드는 만큼 지인들 중에도 산악인들이 많다. 특히 엄홍길씨를 기술이사로 영입, 그의 생생한 경험을 제품 개발에 응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에는 3억원의 ‘휴먼장학금’을 조성, 히말라야 등정 중 숨진 고 박무택씨 유족과 한국원정대를 지원하다 희생된 네팔 셰르파의 유족을 돕고 있다. 그는 제품 개발뿐 아니라 애프터서비스도 타사와 차별화하고 있다. 밑창을 갈아주는 시스템 외에도 주말이면 전국 국립공원을 순회하며 등산용품을 나눠주고 있는데, 이런 행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트렉스타만 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중국뿐 아니라 일본 등 아시아 시장에선 어느 정도 경쟁력에서 우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미국시장도 다지고 인도, 유럽, 러시아 멀리 브라질까지 트렉스타의 시장을 개척할 겁니다.”

경향신문이 창간 60주년 행사로 후원하는 엄홍길 로체샤르원정대는 현재 베이스캠프를 기반으로 정상 정복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이 신고 있는 등산화도 트렉스타다. (해발 6,000m 이상은 특수화를 신지만) 이들이 세계 16좌 등정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빙벽을 오르는 것처럼 ‘글로벌 시장의 등정가’ 권동칠 트렉스타 대표는 세계 시장점유율 1위라는 고지를 향해 큰 걸음을 내딛고 있다.

〈인터뷰/이동형 매거진X부장 spark@kyunghyang.com〉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