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윤호진 - 원망스러웠던 한국

2012.05.24 21:41
윤호진 | 에이콤인터내셔널 대표

“도대체 난 왜 이런 나라에서 태어나서!”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이렇게 원망이 가득 담긴 후회를 해본 적이 있다.

사실 연극을 만들며 연출가로서의 미래를 찾던 나에게 1980년대의 한국은 그리 호의적인 곳은 아니었다. 항상 배가 고팠고, 집에 갈 차비도 없어서 먼 길을 걸어 다녔다. 그 와중에도 극단 사람들의 열의만으로 부족한 다른 부분을 채워가며 공연을 올렸다. 한마디로 전망은커녕 고달픈 삶이 보장되는 지름길이나 다름없었다.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66) 윤호진 - 원망스러웠던 한국

그러던 중 1982년 처음으로 해외연수차 바다를 건너 다다른 영국은 딴 세상이었다. 연수생으로선 운 좋게도 내셔널시어터에서 하는 프로덕션의 제작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는 옵서버의 기회를 얻었는데, 연출가의 상상이나 아이디어가 제시된 다음날이면 그것이 그대로 무대에 형상화되는 놀라운 과정들을 지켜보았다. 이전까지 매번 연극을 올릴 때마다 이런저런 한계에 봉착해 처음에 품은 큰 그림은 사라지고 앙상한 뼈대만 남게 되는 게 당연했던 나에겐 이렇게 맘먹은 대로 연출이 되는 체계적인 제작 시스템들이 생소하고 신기하고 몹시 부러웠다. 이후 런던에서 처음 본 뮤지컬 <캣츠>에 큰 자극을 받아 뉴욕으로 건너가 뮤지컬 공부를 시작했다. 충격적일 만큼 큰 감흥을 줬던 뮤지컬들이 하루에도 수십편씩 공연되는 브로드웨이에 언젠가 내 손으로 만든 우리나라 뮤지컬을 올리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때가 1987년이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세계시장에 내놓을 우리 뮤지컬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명성황후>라는 뮤지컬이 탄생했고, 국내 성공을 발판 삼아 기필코 뉴욕 무대에 올리겠다는 일념으로 1997년 미국으로 떠났다. 우리나라를 대표해서, 우리의 이야기를, 한국 뮤지컬로는 처음으로 뉴욕 브로드웨이에 올린다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10년 만에 내 스스로 다짐했던 약속을 지킨 것 같아 다소 들떴고, 역사적인 공연이니만큼 큰 반향이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문화산업의 잠재성이나 홍보효과에 대해 주목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변변한 후원을 받지 못해 공연비 모금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뉴욕 링컨센터 대관도 수월치 않았다. 온갖 멸시를 감내하면서 간신히 대관을 하고 나니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껏 배고파도 후회한 적 없었고 돈이 없어도 후회한 적 없었다. 런던과 뉴욕에서 그네들의 제작시스템과 현저한 격차를 느꼈으면서도 신기하고 부러웠을 뿐, 항상 한국만의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생각이 절실했고 나는 그것을 기필코 해냈다. 그러나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한껏 구애하고 온 마음을 바쳤던 상대로부터 냉대를 받고 돌아선 기분이었다. 차라리 다른 나라에 태어났더라면 이렇게 냉대받으면서 작품하진 않았을 터인데, 그간 쌓이고 쌓인 서운함이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이 나라에 태어난 게 후회된다는 원망이 절로 터져나왔다. 그러나 뉴욕에서의 공연 성적은 누구도 예상 못할 만큼 성공을 거두었고, 그 뒤로 한국에서 17년 동안 뮤지컬 <명성황후>가 공연되고 있다. 그리고 2009년부터 <명성황후>의 옥동자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안중근 의사를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영웅>까지 두 번째로 브로드웨이 무대를 밟았다. 이 작품 또한 뜨거운 반응을 얻었으며 지금도 앙코르공연 때마다 국내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돌이켜보면 우리만의 이야기였기에 뉴욕 무대에 내세울 희소성이 있었고 역시 우리들의 이야기였기에 오랫동안 한국에서 공연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다 보면 환경의 제약 때문에 뜻대로 일이 안 풀리는 경우가 많은데 부질없이 원망하고 후회할 때가 있다. 하지만 후회보다 오기를 품고 상황을 뚫어내고 나면 그렇게 야속해보였던 것들이 오히려 나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준 고마움으로 돌아오곤 한다. 나의 15년 전의 후회가 정반대로 뒤집혔듯이 말이다. 나는 한국에서 뮤지컬을 해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아니, 한국에서 뮤지컬을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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