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끈한 ‘볼튼식’, 붕괴론의 ‘리비아식’···북한 비핵화 해법 이면

2018.04.01 09:47 입력 2018.04.02 19:07 수정
이대근 논설주간

장도리

장도리

리비아식 해법이 불가능한 이유

■화끈한 볼튼식 해법

존 볼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는 다음과 같이 시원 명쾌한 북핵 해법을 내놓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과의 첫 만남에서 시간 낭비를 할 수 없다. 북한이 진정한 비핵화 의지가 있다면, 비핵화를 위한 대화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핵무기 프로그램들을 폐기할 것인지 방법부터 논의하자고 요구하게 될 것이다. 북한이 비핵화를 한다고 해서 미국이 경제적 지원을 제공할 필요는 없으며 북한과 평화조약을 체결할 필요도 없다. (김정은에게는) 오히려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을 한 것이 행운이다.”

세상에 이렇게 단순 과격한 해법이 또 있을까? 볼튼은 한마디로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이 무조건 핵 폐기하고 항복 선언을 하면 끝이라는 것이다. 대가? 국물도 없다. 대북 경제지원도, 평화조약 체결도 하면 안 된다. 트럼프가 김정은을 만나주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마치 전승국이 패전국과 종전 협약을 맺는 것 같은 방식이다.

그러나 이렇게 패전국이 자기 운명을 승전국에게 온전히 맡기는 방식은 결코 리비아식 핵폐기 방법이 아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지구상에는 존재한 적이 없는 볼튼식 해법이다. 볼튼식은 정상회담에서 핵폐기 계획 확정, 그 다음 폐기 계획 실행의 2단계 뿐이다.

■ 리비아식은 단계적·동시적이었다

2003년 3월 영국 중재로 리비아와 미국간 핵폐기를 위한 비밀 협상을 시작한지 9개월 지난 2003년 12월 19일 카다피는 핵포기를 선언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미국은 4개월 뒤인 2004년 4월 대리비아 경제 제재 조치를 완화하고 트리폴리에 미국 연락사무소를 개설한다고 발표했다. 다시 4개월 뒤인 2004년 8월 리비아 핵 사찰을 마친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핵개발장비와 문서를 미국에 전달했다. 그에 호응해 미국은 한 달 뒤인 9월 테러지원국·군사 및 안보물품 거래 제한은 유지한 채 대리비아 제재를 해제한다. 이에 맞춰 2005년 10월 리비아는 핵 폐기를 완료하고, 미국은 핵폐기 완료 대가로 7개월 뒤인 2006년 5월 트리폴리에 미국 대사관을 설치했다.

이 과정을 보면, 만일 북핵 폐기를 리비아식으로 한다해도 단계적·동시적으로 할 수 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리비아 핵 폐기 과정에서 동시적이라는 말은 같은 시각에 동시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시차를 두고 상호 조응하는 행동을 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선 비핵화 조치에 맞춰 미국이 그에 상당한 보상을 했다는 의미에서 동시적이다.

북핵 문제에 대해서도 북한의 선비핵화 조치에 미국이 대가를 지불하든, 미국의 북한 체제 안전보장 조치에 따라 북한이 비핵화 단계를 밟든, 북한의 비핵화와 미국의 대북 안전보장 조치를 동시에 하든, 단계적이고 동시적 행동은 불가피한 과정이다. 청와대 관계자도 “북한의 핵 문제가 25년째인데 TV코드를 뽑으면 TV가 꺼지듯이 일괄타결 선언을 하면 비핵화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런데도 일각에서는 김정은이 단계적·동시적 조치를 언급한 것을 두고 비핵화를 회피하려는 계략이라는 식의 비관론이 갑자기 제기되고 있다. 북미 정상회담 한번으로 북한이 핵폐기를 결심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막연한 낙관론이 ‘김정은의 단계론’으로 실망감이 커진 결과로 보인다. 지구상에 존재한 적이 없는 볼튼식을 유일 해법이라고 믿는다면 단계론은 실망스러운 방안일 것이다. 하지만 지구상에 존재하는 핵폐기 해법을 찾는다면 단계적·동시적 조치의 과정은 불가피하다.

김정은이 정말 TV코드를 뽑아버리듯이, 패전국이 항복하듯이 다 버리고 떠나면 좋겠지만 그건 꿈일 뿐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결코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이다. 깨진 유리잔이 저절로 다시 복원되는 것은 물리법칙에 위배되지 않는다. 그러나 유리잔 복원은 이론상으로만 가능할 뿐 현실에서는 발생할 확률이 너무 낮아, 보통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 때문에 유리잔이 깨진 뒤 저절로 복원됐으면 하고 소망한다 해도, 저절로 복원되지 않았다고 해서 ‘이 세상은 다 엉터리’라고 비관주의자로 전락할 필요는 없다.

■ 리비아식으로 해도 시간이 필요하다

볼튼식은 핵폐기 결정 및 폐기의 2단계로 순식간에 끝난다. 그러나 리비아식조차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폐기 합의에서 폐기 종료까지는 22개월 걸렸고, 협상을 시작해서 핵을 폐기하고 미국과 리비아간 국교 정상화까지는 38개월이 걸렸다. 리비아는 당시 북한과 달리 핵개발 초기 단계였는데도 그랬다. 북한 핵 개발 수준을 고려하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장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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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과 리비아는 여건이 다르다

북한은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완성단계에 이르렀고, 핵무기를 10~20개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잠수함 발사 미사일도 개발했고 생화학 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 병력은 120만에 이른다. 반면 리비아는 핵무기 개발 기술이 부족해 핵개발에 속도가 나지 않는 상태였다. 병력은 15만에 불과하고 대량 살상무기도 없었다. 리비아는 미국의 공격에 너무나 취약하고 미국 공격 시 보호해줄 주변 강대국도 없다. 북한과 달리 리비아는 자주국방을 할 수 없었다. 북한은 오래 버틸 수 있지만, 리비아는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폐쇄 경제인 북한이 유엔 제재를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는 체력을 갖고 있었던 것과 달리 북한에 비해 개방 경제였던 리비아는 유엔의 경제 제재에 의한 경제난을 버티기가 힘들었다.

리비아는 북한과 달리 언제든 협상이 가능한 상태였다. 북한은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었지만, 리비아는 아니었다. 서방의 자본이 리비아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고, 서방세계와의 교류도 활발했다. 영국 중재로 미국과 핵폐기 협상을 시작하기까지 미국과 리비아는 최소한의 신뢰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북한과 미국은 지금 대결 상태에 있으며, 상호 불신이 쌓여 있다. 북미 정상회담 전후로 상호 불신을 해소하기를 기대하지만, 한번 만남에 불신을 해소하지 못했다고 북한의 비핵화는 사기라고 단정 짓는 것은 너무 이른 것이다.

■ 리비아식 해법의 이면- 북한 붕괴론

리비아는 미국과 핵폐기 협상을 타결 짓고 국교 정상화를 한지 5년만인 2011년 내전에 휩싸이고 카다피는 미국 주도의 서방 군사 공격에 사망하면서 카다피 정권이 무너졌다. 이 과정을 북한의 시선으로 보면 이렇다. 카다피 정권이 핵 개발의 속도를 내지 못하고 미국의 꾐에 빠져 핵폐기를 한 결과, 무장해제 당하고 결국 미국의 공격에 무너졌다. 카다피 정권이 핵무장을 했으면 정권이 무너질 이유도 없고 살해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국이 리비아를 공격하던 2011년 3월 22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리비아가 핵을 포기한 과정은 미국이 안전담보와 관계개선이란 사탕발림으로 상대를 무장해제시킨 뒤 군사적으로 덮치는 거라는 게 드러났다.” 북한에게 리비아식 해법이란, 핵폐기와 번영의 해피엔딩이 아니라, 정권붕괴와 지도자 살해의 비극적 결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리비아식 해법을 운운하는 것은 북한에 대한 가장 노골적인 적대 행위와 다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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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핵 해법은 원래 단계적·포괄적이었다

북핵 당사국인 6개국은 이미 13년전 비핵화 접근법에 관한 원칙에 합의한 바 있다. 2005년 9·19 공동성명에 그게 잘 담겨 있다.

“6자는 6자회담의 목표가 한반도의 검증 가능한 비핵화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달성하는 것임을 만장일치로 재확인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을 포기할 것과, 조속한 시일내에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조치에 복귀할 것을 공약하였다. 미합중국은 한반도에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으며 핵무기 또는 재래식 무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공격 또는 침공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대한민국은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따라 핵무기를 접수 및 배치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재확인하고 자국 영토내에 핵무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비핵화에 관한 포괄적 합의를 담고 있는 조항이다. 그 다음에는 각 당사국별로 비핵화를 위해 취해야 할 단계적인 조치를 담고 있다. 단계적 조치는 각 당사국들이 해야 할 과제를 맞물려놓았다. 공약에는 공약으로, 행동에는 행동으로 상호 조응하도록 한 이른바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이다. 바로 김정은이 말한 단계적·동시적 조치다. 9·19 공동성명은 한마디로 단계적·포괄적 조치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

북한은 김정은이 협상 국면으로 전환하기 전까지만 해도 9·19 공동성명과 후속 합의가 미국에 의해 부정당했다며 더 이상 기존 합의에 따른 비핵화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반면 북한을 제외한 5개국은 공동성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김정은이 이같은 입장을 뒤집고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라고 밝히며 단계적·동시적 조치를 통해 비핵화가 가능하다고 밝혀 공동성명의 원칙으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북한을 비난할 일이 아니라,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다.

만일 북한이 과거처럼 단계마다 보상만 받고 비핵화 실행은 하지 않는다면 우려할 만한 일이다. 그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앞으로 당사국들의 노력에 달려 있다. 단계적이라는 한마디만 듣고 북한의 비핵화를 거짓이라고 주장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 단계적·포괄적 접근은 한미 합의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7년 7월 1일 워싱턴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북핵 문제를 단계적·포괄적으로 해결한다는 원칙에 의견을 모은 바 있다. 문 대통령은 기자 회견에서 이렇게 밝혔다. “우리 두 정상은 제재와 대화를 활용한 단계적이고 포괄적인 접근을 바탕으로 북핵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나가자는데 뜻을 같이 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비핵화를 위해 단계적·포괄적 접근을 한다는데 김정은, 문재인, 트럼트 3인이 원칙적인 합의를 봤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변덕스러운 트럼프는 이제와서 다른 말을 할 수도 있지만, 분명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단계적·포괄적 접근은 피할 수 없다. 그러니 ‘단계적·동시적’이라는 말에 너무 놀라지 말기 바란다. 북핵 협상을 해본지 오래돼서 잊고 있었을 뿐 매우 오래전 합의한 접근법이다. 물론 볼튼식으로 북한이 일거에 다 포기하겠다고 나서면 환영할 일이지만, 그러지 않는다고 해서 화내거나 모든 게 잘못됐다고 슬퍼할 필요는 없다.

■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은 사기인가?

김정은이 ‘비핵화는 선대 수령의 유훈’이라며 비핵화 의지를 과시한 것에 대해 일각에서 북한이 그동안 유훈을 내세우면서도 핵무장을 한 만큼 믿을 수 없는 속임수를 쓰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은 과거 비핵화 단계를 밟을 때는 물론 핵 개발을 강행할 때도 비핵화는 유훈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얼핏 모순적으로 들리지만 북한에게는 나름의 일관성 있는 논리이다. 4차 핵실험을 한지 6개월만인 2016년 7월 6일 발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대변인 성명의 내용이다. “조선반도 비핵화는 위대한 수령님과 어버이 장군님의 유훈이며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의 령도 따라 나아가는 우리 당과 군대, 인민의 드팀없는 의지이다. 우리가 만난을 이겨내며 외세의 핵위협과 핵 선제 공격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강위력한 억제력을 갖춘 것도 조선반도에 영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나아가서 반도 전역의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핵 억지력 확보가 비핵화를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핵 억지력을 활용해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을 철폐하면 자연히 핵무장할 필요도 없어진다는 뜻을 담고 있다. 역설적 주장이지만 우리는 이 주장이 담고 있는 비핵화 명분을 주목해야 한다. 북한의 핵무력 완성 선언에도 불구하고, 아니 핵무력 완성 선언이 비핵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논리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핵화 유훈 발언 자체를 사기라고 할 수는 없다. 유훈은 핵무장을 위해서도, 비핵화를 위해서도 동원할 수 있는 이중용도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 무장으로 비관론이 팽배할 때 북한 스스로 비핵화 명분과 논리를 갖고 있다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 북중 정상회담은 비핵화에 나쁜 영향을 주나?

북중 정상회담으로 북한이 뒷문을 확보함으로써 비핵화에 부정적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효과도 있다. 중국이 대북 지렛대를 회복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중국을 통해 비핵화 압박이 가능한 통로가 확보했다는 뜻이다. 북한이 중국의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가는데 제약이 생기는 것이다.

북한에게 중국이라는 배후가 없으면 북한을 완전 고립시켜 항복을 강요하기 쉽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북한이 그런 고립감을 느낀다면 양보를

이대근 논설주간

이대근 논설주간

잘 하지 않으려 할 것이고, 따라서 협상도 어려워질 수 있다. 퇴로가 막히면 앞으로 나아가길 꺼리겠지만, 퇴로가 있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문제는 미국이다

■ 해법 없는 미국

작년 7월 한미 정상은 다음과 같은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양 정상은 한국과 미국이 대북 적대시 정책을 갖고 있지 않으며, 북한이 올바른 길을 선택한다면 국제사회와 함께 북한에게 보다 밝은 미래를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강조하였다. 양 정상은 고위급 전략 협의체를 통해, 비핵화 대화를 위해 필요한 여건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를 포함한, 양국 공동의 대북정책을 긴밀히 조율해 나가기로 하였다”

이로부터 8개월이 지났지만 미국의 대북 정책은 압박외에 아무 것도 없다. 5월 말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도 마찬가지다. 겨우 볼튼식 해법이 떠돌 뿐이다. 비핵화 해법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명백한 쪽은 미국이다.

■ 비핵화 여건 조성해야 할 한미

북한이 비핵화하겠다고 나섰다. 당연히 무조건 비핵화는 아니다. 묻지마 비핵화도 아니다. 조건이 맞으면 비핵화 하겠다는 것이다. 비핵화는 물건너 갔다는 기존의 비관론을 깨뜨리는 대역전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비핵화의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김정은이나 트럼트 모두 두 번 다시 과거의 실패 반복하지 않겠다고 벼르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어떤 조건하에 비핵화 할지 준비를 해야 한다. 한미가 빈 공간을 채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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