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권력의 부패와 환경파괴에 맞서…3000만그루의 ‘민주주의’를 심다

2021.02.16 06:00 입력 2021.02.16 08:58 수정
장영은

왕가리 마타이

케냐 ‘그린벨트 운동’을 이끈 왕가리 마타이는 민주주의 가치를 나무로 환기시킨 정치인이었다. 그는 나무도, 민주주의도 자라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언젠가 반드시 결실을 맺는다는 진실을 이야기했다.   ⓒGreen Belt Movement

케냐 ‘그린벨트 운동’을 이끈 왕가리 마타이는 민주주의 가치를 나무로 환기시킨 정치인이었다. 그는 나무도, 민주주의도 자라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언젠가 반드시 결실을 맺는다는 진실을 이야기했다. ⓒGreen Belt Movement

케냐 독재 정권의 탄압에 맞서며
‘그린벨트 운동’ 이끈 환경운동가
현실정치 뛰어들어 녹색당 창설

“나는 케냐인들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좋은 사람은 정치를 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마치 모든 정치인이 다 사기꾼이고 거짓말쟁이라는 듯이 여기는 통념에 도전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케냐에서는 국민의 열망을 억압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정책을 주도한 이들이 바로 정치인들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너무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 바로 그들의 결정이었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그 상황을 오해하는 것이다. 왜 당신의 운명을 거짓말쟁이나 사기꾼의 손아귀에 맡겨야겠는가?”

1997년 12월, 케냐는 새로운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과 원조국들의 압박에 못 이겨 케냐 정부는 모든 정당이 후보를 낼 수 있는 “공식 절차를 모두 승인”했다.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위해서는 야권 통합이 관건이었다. 케냐 정부의 탄압에 맞서며 그린벨트 운동을 이끌어 온 왕가리 마타이는 야권 통합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5년 전인 1992년 야권 단일화에 실패하고 부패한 독재 정권에 또 한 번 권력을 내주었던 쓰라린 경험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단일 연합당’을 만들지 못하면 이번에도 승산이 없었다.

왕가리 마타이는 1992년에도 곳곳에서 국회의원 및 대통령 출마를 요청받았지만, 자신은 환경운동가로서 사회 변화에 일조하겠다고 답하며 줄곧 ‘정치권 밖’을 지켜 왔다. 하지만 케냐 국민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1997년 9월) 엘도레트의 시민 1000여명과 무랑가 지역의 시민 1000여명이 집회를 열어 내게 하원의원과 대통령직에 출마할 것을 요청했다.” 지지자들은 마타이가 일관되게 추진해 온 그린벨트 운동을 “주류 정치에서 실현”해주기를 원했다. “왕가리 마타이는 국회의원도 아니면서 그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았는가? 그가 국회의원이 될 경우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을지 상상해보라!”

장고(長考)에 들어갔다. 왕가리 마타이는 제도권 밖에서 권력을 감시하며 환경 보호와 빈곤 퇴치, 여성인권 향상에 기여하고자 했지만, 마타이의 꿈은 케냐의 정치가 제대로 기능할 때만 실현될 수 있었다. 케냐 정부는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합법적으로 또 불법적으로 숲이 파괴되고 있었다.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케냐의 땅과 주요 시설이 권력의 측근들에게 헐값으로 팔려나가고 있었다.” 케냐에는 정말 ‘좋은 정치인’이 필요했다. 환경 보호와 빈곤 퇴치, 여성인권 향상이 민주주의와 맞물려 있다고 믿어 온 마타이는 ‘정치권 안’으로 뛰어들기로 결심을 굳혔다. “나는 그냥 앞만 보고 전진하다가 어느 문이든 열린 문이 있으면 그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선거운동을 시작하면서 맞닥뜨린 정치 현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1997년 11월, 왕가리 마타이는 자유당 후보로 대통령 경선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27개 당에서 15명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후보 단일화를 위해 가까운 지역의 후보들부터 만나기 시작하자 ‘부족주의자’라고 공격받았다. 선거자금은 심각하게 부족했다. 마타이를 더 놀라게 한 사건이 벌어졌다. 과거에 우호적이었던 언론들마저 마타이의 출마 동기를 의심하며 “왕가리 마타이가 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그린벨트 운동에만 집중한다면 나라를 위해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일부 언론사들은 마타이가 또 다른 여성 후보인 채러티 응길루를 “고의적으로 방해하기 위한” 후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기득권의 배타성과 케냐 사회의 고질병인 부족주의와 개인숭배를 선거를 치르면서 절실하게 깨달았다. 야권은 전체 유권자 가운데 3분의 2에 가까운 표를 얻었지만, “통합에 실패했기 때문에” 패배하고 말았다. 마타이는 우선 그린벨트 운동 사무실로 복귀했지만, “낡은 정치문화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케냐의 미래에 희망은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왕가리 마타이는 선거 패배 후, 마징기라(스와힐리어로 ‘환경’) 녹색당을 창설했다. 그린벨트 운동의 기본 가치와 동일한 강령을 채택했다. 아프리카 녹색당 연맹에도 합류했다. 녹색당은 독일과 같은 유럽 선진국에서만 가능하다는 조롱 섞인 비난이 쏟아졌지만, 마타이는 케냐야말로 녹색당이 필요한 곳이라고 대중에게 부지런히 설명했다. “과거 독재 정권은 권력을 유지하는 동안 정기적으로 수천 에이커의 숲이나 공원을 자신들의 지지자와 측근들에게 사유지로 나눠 주었다. ‘토지횡령’의 폐단은 케냐에 만연해 있다.”

1999년 카루라 숲의 용역들과 대치 중인 왕가리 마타이.  왕가리 마타이 재단 홈페이지

1999년 카루라 숲의 용역들과 대치 중인 왕가리 마타이. 왕가리 마타이 재단 홈페이지

카루라 숲에 대한 ‘토지횡령’ 적발
유엔 등 국제사회에 큰 반향 불러
숲에서 진행되던 건축 중단시켜

1998년 여름, 왕가리 마타이는 “너무나 노골적이며 광대한 지역에 걸친 토지횡령”을 적발한다. 케냐 정부는 수도 나이로비 북쪽에 위치한 카루라 숲에 정권 실세의 동맹들에게 사무실과 사택을 짓도록 했을 뿐 아니라, 카루라 숲의 그린벨트 지역을 민간 개발업자들에게 할당했다. 마타이는 법무부 장관에게 편지를 썼다. 언론에도 제보했다. 마타이와 동료들은 카루라 숲에서 경찰과 대치하다 끌려갔다. 유엔환경계획(UNEP)은 카루라 숲이 “나이로비가 잃어버려서는 안 될 귀중한 천연자원”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마타이는 그들과 함께 카루라 숲에 나무를 심었다.

케냐 정부는 반격에 나섰다. “사유재산을 지키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자 책임”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개별적으로 용역을 구해 “자기 땅은 자기가 지키라”는 뜻이었다. 폭력을 용인하는 발언이었다. 나무를 심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환경운동을 이끌어 온 왕가리 마타이는 “칼과 곤봉, 채찍, 단도, 활, 화살로 무장한 200여명의 수비대와 마주쳤다”. 마타이는 그저 나무를 심으러 왔을 뿐이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용역 깡패들’에게 무자비하게 폭행을 당했다. “나는 머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경찰들은 수수방관했다. 마타이는 언론 보도로 용역 깡패들이 미리 “경찰의 허락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건은 케냐 전역은 물론이고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공개적으로 폭력 사태의 책임을 추궁했다. 케냐의 모이 대통령은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사과문이 아니었다. 자신은 환경운동단체들이 카루라 숲 개발에 왜 반대하는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으며, 나이로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카루라 숲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학생들이 거리로 달려 나왔다. 나이로비에 “최루탄과 총탄이 난무했고, 대학들은 휴교령을 내렸다”. 국가 폭력이 국민들 분노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다. 1999년 8월, 모이 대통령은 “공공부지에 대한 모든 매각을 금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숲에서 진행되던 모든 건축이 중단되었다.”

왕가리 마타이가 2009년 9월22일 유엔에서 열린 기후변화 정상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왕가리 마타이가 2009년 9월22일 유엔에서 열린 기후변화 정상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가치 나무 통해 환기
‘빈곤의 역사 개혁 운동’ 앞장서
2004년 노벨 평화상 수상하기도

왕가리 마타이는 한발 더 나아갔다. 마타이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양극화 문제를 깊이 연구하고 있었다. 케냐와 아프리카는 왜 이토록 가난한가? 1998년 ‘주빌리 2000 아프리카’ 캠페인의 공동의장으로 취임한 마타이는 2000년 부유한 국가들에 제3세계의 부채를 탕감해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탄원운동을 전 세계적인 규모로 추진했다. “1970년에서 2002년까지 아프리카 국가들의 총부채는 약 5400억달러에 달했고, 부채와 이자 가운데 5500억달러를 갚았다. 그러나 채무국들은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2002년 말 현재 3000억달러에 가까운 빚이 남아 있었다.” 마타이는 아프리카에 민주주의와 유능한 정부 기구가 들어선다 할지라도 채무 부담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빈곤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고 ‘빈곤의 역사 개혁 운동’에 뛰어들었다. 아프리카의 구조적 문제에 전 세계인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U2의 보노는 마타이의 문제의식에 깊이 공감하며, ‘주빌리 2000 아프리카’를 적극 후원하기도 했다.

왕가리 마타이가 정치 활동을 본격적으로 재기(再起)하자, 정권의 탄압도 거세졌다. 2001년 7월 마타이는 불법집회를 주최했다는 이유로 또다시 체포되었다. 정권 교체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2002년 12월 마타이는 통합 야당인 ‘전국무지개연합당’의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한다.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한 심정이었다. 마타이는 지역구인 테투 선거구에서 98%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자신의 당선보다 더 큰 경사(慶事)가 있었다. 케냐 국민들은 “만약 정부가 제대로 통치하지 못할 경우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정부를 교체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한 달 후인 2003년 1월, 마타이는 환경 및 천연자원부 차관에 취임했다. 그린벨트 운동을 이끌며 아프리카에 3000만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은 마타이는 아프리카의 환경, 여성인권, 빈곤 퇴치, 교육, 민주주의 등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1940년 케냐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왕가리 마타이는 어린 시절부터 ‘글 읽는 사람들’을 동경했다. 1959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마타이는 케냐 임시정부의 국가인재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 후, 마타이는 대학 교수로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마타이는 케냐의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와 독재 정권의 부패를 용인하지 않았고,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연이은 이혼과 실직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았다.

왕가리 마타이는 천천히 싸워도 끝까지 하면 세상이 아주 조금씩 변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며, 케냐 사람들에게 민주주의의 가치를 나무로 환기시켰다. 민주주의는 단숨에 이룰 수도 혼자서 완성할 수도 없으며, 만병통치약도 아니었다. 마타이는 협치를 강조한 정치인이었다. “살면서 그리고 일을 하면서 알게 될 겁니다. 그 어떤 일도 혼자서 해낼 수 없음을 저는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일을 혼자 하면, 제가 그 자리를 떠났을 때 그 일을 맡아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2011년 왕가리 마타이는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뜻을 잇는 왕가리 마타이 재단과 그가 심은 3000만그루 이상의 나무들이 지구를 지키고 있다. 마타이는 나무도 민주주의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반드시 결실을 맺는다는 아름다운 진실을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장영은

[여성, 정치를 하다](21)권력의 부패와 환경파괴에 맞서…3000만그루의 ‘민주주의’를 심다


성균관대학교에서 논문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비교문화연계전공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쓰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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