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우주의 생명 품은 웅덩이에 푹 빠져들고 용암과 파도가 빚은 동굴서 황홀에 젖었네

2018.02.22 21:07 입력 2018.02.22 21:09 수정
문경수 과학탐험가

태곳적 바다 ‘조수웅덩이’

색달동 해변 갯깍주상절리대에 있는 조수웅덩이. 밀물 때 들어온 바닷물이 썰물 때 고여 만들어진다. 제주 해안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웅덩이는 해양동물의 주요한 서식처이자 은신처이다.

색달동 해변 갯깍주상절리대에 있는 조수웅덩이. 밀물 때 들어온 바닷물이 썰물 때 고여 만들어진다. 제주 해안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웅덩이는 해양동물의 주요한 서식처이자 은신처이다.

“길이 맞나? 너무 좁은데….”

갯깍주상절리를 답사하기 위해 서귀포시 색달동 해변으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이 경사가 심한 좁은 길로 계속 안내했다. 동행한 후배 전재영이 길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차를 세우고 주변을 살폈다. 왼쪽으로 덤불이 우거진 숲과 절벽 아래로 하천이 보였다. 먼발치로 내려다보니 해변에 작은 주차장이 보여 계속 이동하기로 했다. 주차장 한쪽에 주상절리 사진과 함께 안내판이 보여 마음이 놓였다. 이곳은 갯깍주상절리대로 해안을 따라 걸으며 주상절리대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주상절리대 안내판을 읽고 있을 때 재영이가 옆에 있는 작은 안내판을 보라고 말했다. 예래마을 조간대 조수웅덩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보였다. 조수웅덩이라는 생소한 단어가 눈에 띄었다. 조간대는 조수간만에 의해 바다가 잠겼다가 다시 드러나는 지역을 말한다. 밀물 때 들어온 바닷물이 썰물 때 바위 주변 웅덩이에 고여서 작은 물웅덩이를 만든 셈이다. 제주의 해안은 다양한 형태의 화산암석으로 이뤄져 조수웅덩이가 많이 발달했다. 조수웅덩이는 해양생물의 중요한 서식지 역할을 한다. 용암이 굳으면서 만들어진 크고 작은 구멍과 바위틈은 작은 해양생물의 든든한 은신처가 돼준다. 거친 파도를 피해 조수웅덩이에서 몸집을 키운 해양생물은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

갯깍주상절리대로 가기 전에 조수웅덩이를 먼저 보기로 했다. 마침 썰물 때라 주변 해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친 아아용암지대를 지나 몇 걸음 걸어가자 작은 조수웅덩이가 보였다. 무릎을 꿇고 눈을 웅덩이 수면 가까이 대고 보니 여러 종류의 해양생물이 살고 있었다. 생물들의 이름을 일일이 알 수는 없었지만 제주 바다를 축소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우주에 있는 수천개의 은하계를 보는 것 같다. 웅덩이마다 고유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지만 다른 웅덩이의 모습을 볼 수는 없다. 자기들이 사는 웅덩이가 바다의 전부라고 생각할 것이다. 지구에만 생명체가 산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과 닮았다. 하지만 기회는 있다. 밀물이 들어오면 바닷물을 따라 다른 웅덩이로 이동할 수 있다. 작은 생물은 큰 웅덩이로 이동해 더 큰 세상을 볼 수도 있고, 몸집이 큰 생물이 작은 웅덩이로 이동해 좁은 공간과 먹이 부족으로 운명을 달리할 수도 있다. 스스로 운명을 선택할 순 없지만 자연의 섭리에 따라 종은 다양해지고 생태계는 유지된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조수웅덩이는 해양생물과 육상생물이 서식하는 경계지점에 해당해 세계 다른 해역과 비교해도 월등히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곳이다. 그만큼 보존가치가 높은 지역이지만 해마다 생물종이 줄어들고 있다. 무분별한 해안지역 개발과 사람의 손길 때문이다. 조수웅덩이는 사람이 가지고 노는 수족관이 아니다. 건강한 해양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생태자원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많은 기관과 연구자들이 조수웅덩이 보존에 노력을 하고 있었다.

조간대를 따라 1시간 정도 산책을 했다. 별빛이 쏟아지는 밤에 다시 이곳에 오고 싶어졌다. 우주의 은하계와 바다의 은하계가 만나는 이곳에서 태곳적 자연의 소리를 듣고 싶다.

주차장에서 갯깍주상절리대로 향하는 길엔 폭이 제법 넓은 하천과 다리가 있다. 차로 내려오며 봤던 예래천이다. 다리를 건너 해변에 이르자 본격적으로 높이 40m에 이르는 주상절리대의 모습이 펼쳐졌다. 해변 초입부터 약 1.75㎞에 이르는 구간에 주상절리대 수직절벽이 이어진다. 주상절리대 옆으로 둥근 모양의 몽돌이 해변을 이루고 있다. 이는 제주의 다른 해안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다. 몽돌의 기원은 바로 옆으로 난 주상절리대에서 떨어져 나온 암석이다. 육각형의 암석 조각은 파도의 침식을 받아 둥근 모양으로 다듬어진다. 침식 정도에 따라 크고 작은 바위로 이뤄진 해변길은 걷기에 제법 난이도가 있다.

갯깍주상절리대에 있는 해식동굴. 높이 15m인 이 동굴은 제주의 해식동굴 가운데 유일하게 양쪽을 관통하고 있다. 권홍진 제공

갯깍주상절리대에 있는 해식동굴. 높이 15m인 이 동굴은 제주의 해식동굴 가운데 유일하게 양쪽을 관통하고 있다. 권홍진 제공

전망대에서만 볼 수 있는 다른 지역과 달리 이곳은 직접 주상절리대를 만져볼 수 있다. 무엇보다 파도의 침식으로 만들어진 15m 높이의 해식동굴이 장관이다. 제주 해안에는 크고 작은 해식동굴이 많지만 주상절리대 양쪽을 관통하는 해식동굴은 이곳이 유일하다. 파도가 몽돌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해변을 따라 걷자 해식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굴 입구는 세로가 길고 가로가 짧은 사각형에 가깝다. 숙련된 석공이 만든 아치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윤곽이 또렷하다. 입구 쪽으로 걸어가니 천장과 어우러진 웅장한 동굴 내부가 보였다. 특이한 점은 천장을 이루는 주상절리 단면이 육각형보다 원형에 가깝다는 것이다. 중문 대포해안에서도 거북등 모양의 주상절리대 단면을 봤지만 전혀 다른 느낌이다. 마치 캡슐 로봇을 타고 혈관 속을 탐험하는 기분이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니 웅장함과 불안감이 공존한다.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하는 안정적인 구조지만 바닥에 깔려 있는 암석들이 천장에서 떨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계속 천장을 올려다보게 했다. 곡선으로 이뤄진 동굴을 15m쯤 지나자 반대편 입구가 훤히 보였다. 천장에서 떨어져 쌓인 돌무더기가 경사면을 만들었다. 동굴 전체가 보이는 경사면에 앉았다. 입구를 통해 불어오는 해풍이 클래식 음악처럼 귀로 스며들었다. 동굴의 크기를 가늠하며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파도와 바람의 힘을 버텨냈을지 생각해 봤다. 30여m 구간의 짧은 동굴이지만 반대편 출구로 나오니 다른 세계를 엿본 기분이다.

탐라시대 항아리 토기들이 발견된 색달동 다람쥐굴 내부.

탐라시대 항아리 토기들이 발견된 색달동 다람쥐굴 내부.

우린 풀숲을 따라 난 오솔길을 따라 해변으로 내려왔다. 해변 안쪽 풀숲 사이로 작은 동굴이 보였다. 멀찌감치 흰색 안내판이 보였지만 인적이 드문지 탐방로가 넝쿨과 들풀로 덮였다. 해변에서 바라볼 때 입구는 작았지만 호기심을 자극했다. 천천히 발길을 내디디며 동굴로 향했다. 안내판에는 색달동 다람쥐굴이라고 적혀 있었다. 다람쥐굴에서는 1985년 동네 주민에 의해 탐라시대 항아리 토기 10점이 발견돼 향토기념물로 지정됐다. 다른 자연동굴과 달리 인간의 흔적이 담긴 동굴이라니 더 궁금했다. 높은 위치에 동굴이 생긴 걸 보니 과거 지금보다 해수면이 높던 시절에 만들어진 동굴이다. 햇빛이 드는 동굴 입구에는 무성한 넝쿨식물이 동굴 바닥을 덮고 있다. 가방에서 헤드랜턴을 꺼내 쓰고 한 걸음씩 동굴 내부로 향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때문에 바닥은 축축했고 물이 고여 있었다. 내부로 들어갈수록 좁아지고 온도가 내려갔다. 혹시라도 동굴벽화가 있나 싶어 벽면 내부를 유심히 비췄다. 벽화 흔적은 없지만 하부에 식량저장고로 쓰일 법한 작은 동굴이 뚫려 있다. 동굴 끄트머리에서 잠시 바닥에 앉아 숨을 골랐다.

2010년 개봉한 <잊혀진 동굴을 찾아서>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세계적인 영화감독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로, 프랑스 쇼베동굴 탐사를 소재로 만든 영화다. 헤어조크 감독은 프랑스 문화부의 승인을 받고 쇼베동굴을 발견한 과학자 장 마리 쇼베와 동굴 촬영을 시도한다. 동굴의 보존을 위해 출입 인원과 촬영 시간을 정해 놓았다. 좁은 동굴 통로를 지나 쇼베동굴 벽화 앞에 이르자 장 마리 쇼베는 모두에게 눈을 감으라고 말한다. 눈을 감고 동굴의 침묵에 귀를 기울이면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릴 거라고 얘기한다. 침묵한 채 동굴에 새겨진 벽화를 바라보자 동물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재현되는 느낌을 받는다. 고대인들에게 벽화는 그들의 기록이자 극장 스크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쇼베동굴 탐사에는 고고학자, 지질학자, 고생물학자, 미술사학자가 참여해 각자의 발견과 의미를 공유하며 쇼베동굴의 실체를 하나씩 해석했다. 당시 고고학자로 참여한 줄리앙 몽니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 동굴 탐사의 주된 목표는 과학적 이해를 넘어 줄거리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대 인류가 동굴에 이르게 된 이유를 유추하고 같은 인간으로서 그들이 느꼈을 당시의 환경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현장에 주어진 최소한의 단서만 갖고 그들의 줄거리를 얼마만큼 이해할 수 있을까. 고대 인류의 삶에 영향을 주는 변수는 훨씬 다양했다. 동굴 내부의 단서가 전부가 아니라 동굴 밖에 있는 단서를 이해해야 고고학자들이 말하는 줄거리를 찾을 수 있다. 오래전 용암이 굳어져 만들어진 주상절리대부터 지금보다 해수면이 높은 시절에 만들어진 동굴의 형태까지 동굴 밖에서 찾을 수 있는 단서는 많다. 셀 수 없이 많은 단서가 얽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다람쥐굴은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일까. 동굴이 만들어진 과정과 인간이 거주하게 된 상황, 이를 발견한 사람들을 아우르는 거대한 줄거리를 떠올려본다. 동굴을 처음 발견했던 사람의 마음은 어땠을까. 마을의 일상적인 풍경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수도 있다. 그 뒤로 동굴에서 토기를 발견한 사람은 동굴의 가치를 새롭게 봤을 거다. 그리고 현재의 나처럼 안내판을 보고 우연히 들어와 고대 인류의 발자취를 떠올려볼 수 있다. 단순히 고대 인류의 삶을 엿보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다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라는 개념을 걷어버리고 같은 인간이라는 종으로 그들의 삶과 동굴문화를 엿보면 어떨까. 호주 탐험을 하며 호주 원주민 애보리지니의 삶과 동굴벽화를 엿볼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우리와 동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들 조상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삶의 여정과 기억을 바위에 새기며 조상과 앞으로 태어날 미래세대와 영적 교감을 시도한다. 앞으로 또 다른 누군가가 다람쥐굴을 다시 발견할 것이다. 그들은 다람쥐굴을 보고 어떤 느낌을 받게 될까.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지는 않을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인위적인 훼손은 최대한 방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거대한 줄거리의 다음 페이지를 써갈 그들에게 남겨줄 단서이기 때문이다.

다람쥐굴을 나와 해변을 따라 걸었다. 병풍처럼 펼쳐졌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주상절리 절벽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바위에 앉아 지저귀고 있었다.

▶필자 문경수

[전문가의 세계 - 문경수의 탐라도 탐험] (7) 우주의 생명 품은 웅덩이에 푹 빠져들고 용암과 파도가 빚은 동굴서 황홀에 젖었네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과학동아’에서 기자로 일한 과학탐험가다. 지난 10여년간 과학을 주제로 서호주·몽골·알래스카 등 지질학적 명소들을 탐험했다. 아시아인 최초로 미국 우주항공국(NASA) 우주생물학그룹과 과학탐사(2010년)를 했고, <효리네민박>(JTBC), <어쩌다 어른>(tvN), <세계테마기행>(EBS)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문경수의 제주과학탐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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