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제주 용암지대가 빚은 습지···사람·동물 모두에게 생명수였다

2018.11.01 21:24 입력 2018.11.02 09:19 수정
문경수 과학탐험가

조천읍 ‘먼물깍습지’

예로부터 조천읍 선흘리 주민들은 물론 동물들에게 생명수 역할을 해온 ‘먼물깍습지’. 제주 방언으로, 흔히 동백동산습지로 불린다. 용암지대에 생긴 습지여서 보전가치가 높은 데다 한 번도 마른 적이 없을 정도로 풍부한 수원 덕분에 생태계가 잘 보전돼 최근 람사르습지로 선정됐다.

예로부터 조천읍 선흘리 주민들은 물론 동물들에게 생명수 역할을 해온 ‘먼물깍습지’. 제주 방언으로, 흔히 동백동산습지로 불린다. 용암지대에 생긴 습지여서 보전가치가 높은 데다 한 번도 마른 적이 없을 정도로 풍부한 수원 덕분에 생태계가 잘 보전돼 최근 람사르습지로 선정됐다.

홍수조절·이산화탄소 양 조절 등
경제·문화·과학적 보존 가치 높아

‘동백동산’ 개발 안돼 원형 잘 보존
람사르습지로 지정되어 보호받아
세계 유일 ‘제주고사리삼’ 서식도

주민들도 생태계 중요성 깨달아
환경교육 프로그램 ‘물숲새’ 운영

먼물깍습지는 조천읍 선흘리에 있는 곶자왈 내에 있는 습지다. 선흘리는 제주사람들도 잘 모르던 작은 마을이었다. 2007년 7월 근처에 있는 거문오름 일대의 화산활동 흔적들이 세계자연유산으로 선정되면서 유명세를 탔다. 제주의 다른 관광지와 달리 내륙에 위치했고, 유락시설이 없다 보니 여행객도 붐비지 않았다. 그만큼 무분별한 개발이 진행되지 않아 제주 숲 생태계의 원형인 곶자왈지대가 발달할 수 있었다. 동백나무가 많아서 일명 동백동산이라고 부르는 선흘곶자왈은 제주도 내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곶자왈지대다. 게다가 물이 쉽게 투과되는 지역으로는 드물게 습지가 발달해 이미 학자들 사이에서는 가치를 인정받은 지 오래다. 동백동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두 군데다. 원래 입구는 동백동산습지센터지만, 우리는 습지를 관찰하기 위해 출구 쪽으로 갔다. 출구로 가는 길 주변은 인가가 드물었다. 2차선 도로만 없다면 무성한 밀림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처음 오는 사람이 봐도 곶자왈지대를 지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 것만 같았다. 목적지에 도착할 무렵 선흘리 마을 어귀가 보인다. 마치 동화 속 마을을 옮겨 놓은 것 같다. 건물을 새로 짓지 않고 원래의 가옥을 보수한 집이 많았고, 담벼락마다 개성 있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제주고사리삼

제주고사리삼

세계에서 제주도에만 사는 제주고사리삼

습지로 가기 전에 제주고사리삼을 보기 위해 탐방로를 벗어났다. 해가 중천에 떠있지만 숲속은 컴컴했다. 낙엽은 축축했고, 물을 머금은 나뭇가지가 검은색처럼 보였다. 직감적으로 고사리 같은 식물이 살기 좋은 땅이란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국내 양치류의 80% 정도가 곶자왈에서 발견된다. 그중 세계에서 유일하게 제주도 일부 지역에서만 자라는 제주고사리삼이 발견된 것이다. 특히 제주고사리삼은 물이 고였다 빠지기를 반복하는 곶자왈 숲 틈의 ‘반습지’ 같은 극히 제한적인 환경에서만 자란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2001년에 새로운 고사리 표본을 발견했다고 학계에 처음 보고하니 학자들이 믿지 않았다고 한다. 새로운 종이 발견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종의 상위 개념에 해당하는 속이 발견된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외국의 한 고사리전문가는 한국 연구팀에 사진을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는 말을 전했지만, 사진을 보고 난 뒤에는 믿을 수 없다는 감탄사만 연발했다는 후문이다. 한국 식물학계의 위상을 떠나 그만큼 자연의 원형이 보전됐다는 측면에서 국가적인 신임도를 얻는 발견이었다. 워낙 개체 수가 적어 세계자연보전연맹 적색목록 심각한 위기종, 환경부 멸종위기야생식물 2등급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최근에는 동백동산에서 멀지 않은 구좌읍 김녕리 일대에서 제주고사리삼 4000개체가 자라는 군락지가 발견돼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동백동산에 있는 제주고사리삼 군락지는 보호를 위해 가림막을 해놨다. 우리는 가림막 근처에 식생하고 있는 제주고사리삼을 찾아 주변을 탐색했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김완병 박사는 숲을 헤치고 인공적으로 만든 돌담을 넘어가 낙엽이 쌓인 내부를 둘러 봤다. 이 돌담은 물이 귀한 제주사람들이 식수를 얻기 위해 돌을 쌓은 연못터다. 잠시 후 김 박사가 뭔가를 발견했다.

“찾았어요.”

“이 조그만 새싹이 제주고사리삼인가요?”

손아귀에 들어올 만큼 아주 작았다. 일반적인 고사리순은 꼬불꼬불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감자 모종 크기의 식물 줄기에 초록빛 잎사귀가 네다섯장 달려 있다. 5평 남짓한 연못터 안에서 억겁의 시간 동안 살아온 식물을 마주하니 경외감이 들었다. 새로운 행성을 발견한 천문학자의 마음이 이랬을까. 끝없이 팽창하는 우주를 이해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무엇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만인에게 이해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최초의 발견도 중요하지만 발견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기존의 발견과 어떤 점이 다른지, 그래서 모든 발견은 숙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한 세대가 지나야 발견의 가치가 인정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늘 탐험에 나선다.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쉽게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이번 탐험을 통해 얻은 가장 큰 보물은 자연을 감상하는 방법이다. 제주에만 사는 희귀종뿐만 아니라 모든 종에는 그들만의 역사가 있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시간과 지형의 변화, 그리고 공존과 경쟁을 통해 지금 바로 이 자리에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꺾고 밟는 들풀도 하나의 종인 것이다. 김 박사도 말없이 한참을 서 있었다.

생명의 젖줄, 먼물깍습지

연못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동백동산습지가 있다. 이곳 역시 보전가치가 높아 람사르습지로 지정해 보호받고 있다. 흔히 동백동산습지로 불리지만 제주 방언으로 ‘먼물깍’이라고 부른다. 김 박사에게 어원을 물어보니 마을에서 멀리 있다는 뜻인 ‘먼물’과 끄트머리라는 뜻의 ‘깍’이 더해진 이름이다. 깍의 어원을 듣고 나니 쇠소깍 같은 관광지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방언대로 해석하면 소를 의미하는 쇠, 웅덩이를 뜻하는 소, 바다와 민물이 만나는 끄트머리라는 뜻의 깍이 더해진 지명이다. 먼물깍습지는 1100고지습지와 마찬가지로 구멍이 많은 용암지대에 생긴 습지환경이라 보전가치가 높다. 특히 거문오름 폭발로 흘러내린 묽은 파호이호이 용암이 넓은 판 형태로 굳어졌고, 그 위에 물이 고여 습지가 만들어졌다. 다른 습지에 비해 넓이는 작지만 한 번도 물이 마른 적이 없을 정도로 수원이 풍부해 생태계가 잘 보전돼 있다. 먼물깍습지의 물은 사람과 동물 모두에게 생명수였다. 과거 상수도가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선흘리 주민들은 마을 경조사 때 먼물깍습지의 물을 길어 물보시를 했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동백동산 일대에 서식하는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가 서식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줬다. 특히 여름철새로 유명한 팔색조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라 탐조하기 좋은 지역이다. 팔색조라는 이름이 뭔가 모르게 신비로운 느낌이다. 김 박사가 말하길 여덟 가지 색을 갖고 있어 미의 극치를 상징하기도 하며, 서구에서는 무지개 색깔의 선녀라고 불린다고 한다. 흰털이 화려해 천적에게 잘 노출될 것 같지만 전체적인 깃털 색깔이 뛰어난 보호색을 지녔다. 조류학자와 동행한 덕분에 보이지 않는 새까지 설명을 듣는 호사를 누렸다. 잠시 후 기다리던 팔색조가 나타났다. 몇 분 간격으로 습지로 물을 마시러 온 팔색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쌍안경으로 보니 안내판에 있는 모습보다 훨씬 깃털이 수려했다. 우리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처음보단 시간차를 두고 물가로 날아왔다. 반대편 바위에 몸을 숨기고 쌍안경에 시선을 집중했다.

팔색조

팔색조

조천읍, 최근 람사르습지도시로 선정

최근 동백동산이 있는 제주시 조천읍은 람사르습지도시 인증을 받았다. 두바이에서 열린 제13차 람사르협약 당사국총회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제주시를 포함해 순천시, 창녕군, 인제군이 각각 선정됐다. 제주에는 1100고지습지를 비롯해 숨은물벵듸습지, 동백동산습지, 물장오리오름, 물영아리오름 등 5개의 습지가 람사르습지에 선정됐다. ‘물새 서식지로서 중요한 습지보호에 관한 협약’인 람사르협약에 따라 독특한 생물지리학적 특성을 가진 곳이나 희귀동식물종의 서식지, 또는 물새 서식지로서의 중요성을 가진 습지를 보호하기 위해 람사르습지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축축이 젖은 땅이라는 고정관념과 달리 습지는 경제, 문화, 과학적으로 보전가치가 높은 환경이다. 인간의 삶에 비춰 본다면 홍수조절 기능과 가장 밀접하다. 습지는 토사와 물을 저장하는 기능이 있어 홍수가 났을 때 하류로 흘러가는 물의 속도를 낮춰준다. 또한 습지는 지상에 존재하는 탄소의 40% 이상을 저장해 대기로 탄소가 유입되는 것을 막아줘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 양을 조절해 준다. 그밖에도 수질정화, 생물종다양성 유지 측면에서 우리의 삶과 뗄 수 없는 관계다. 이번 인증을 통해 국제사회가 인증하는 ‘람사르’란 브랜드를 6년간 사용할 수 있다. 선흘리는 오름과 습지, 동굴, 곶자왈 등 제주 자연의 원형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이 중심에는 선흘리 사람들의 마을 사랑이 한몫했다. 선흘리 주민들은 오랜 시간 동백동산 자연의 중요성과 습지보전, 그리고 자연유산 활용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지속적인 습지 모니터링을 통해 생태계 보전에 앞장섰고,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생태탐방 프로그램도 정기적으로 운영한다. 또한 환경부 인증을 받은 환경교육 프로그램인 ‘물숲새’도 운영하고 있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물숲새 교육은 습지, 곶자왈, 새를 테마로 구성돼 자연과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대표 프로그램이다. 습지탐사를 마치고 선흘리 마을기업인 까망고띠 카페를 찾았다. 까망은 ‘검은색’을 의미하고, 고띠란 ‘곶자왈’이라는 뜻으로 검은 숲을 떠올리게 하는 제주말이다. 제주 전통방식 그대로 좁쌀을 써서 오메기떡을 만드는 체험과 전통예절을 체험할 수 있다. 무엇보다 세계자연유산인 거문오름 일대의 풍경을 마주하며 제주다움을 보고 느낄 수 있다. 까망고띠를 운영하는 선흘리 전 이장 김상수씨는 현재 거문오름 탐방 해설사로도 활동하며 생태관광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요즘은 국내 어딜 가도 어렵지 않게 생태관광을 접할 수 있다. 또한 지자체마다 생태관광이 지역경제 활성화의 황금알로 여겨진다. 하지만 생태관광의 품질을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속가능성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그만큼 중요하다. 김상수씨는 지속가능한 생태관광이 되려면 마을주민뿐만 아니라 여행자의 인식변화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자연을 소비의 대상이 아닌 자연이 담고 있는 가치와 역사를 이해하는 대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의 말을 듣다 보니 생태관광은 자연 보전과 더불어 자연과 사람이 담고 있는 이야기가 함께 공존해야 가능하다. 선흘리 주민들이야말로 자연과 공존하고 그 자연 속에서 자신들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 문경수

[전문가의 세계 - 문경수의 탐라도 탐험] (14)제주 용암지대가 빚은 습지···사람·동물 모두에게 생명수였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과학동아’에서 기자로 일한 과학탐험가다. 지난 10여년간 과학을 주제로 서호주·몽골·알래스카 등 지질학적 명소들을 탐험했다. 아시아인 최초로 미국 항공우주국(NASA) 우주생물학그룹과 과학탐사(2010년)를 했고, <효리네민박>(JTBC), <어쩌다 어른>(tvN), <세계테마기행>(EBS)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문경수의 제주과학탐험>이 있다.


[전문가의 세계 - 문경수의 탐라도 탐험] (14)제주 용암지대가 빚은 습지···사람·동물 모두에게 생명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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