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은 시쓰는 마음으로…자연과 사람이 함께 살아야죠

2020.05.09 06:00 입력 2020.05.09 06:34 수정
장은교

조경가 정영선씨의 집 정원에는 쉽게 보기 어려운 한국의 토종 풀꽃이 많다. 조경설계일을 하며 현장에 맞는 풀꽃을 구하기 어려울 때는 정씨의 정원에서 공수할 때도 많다. 정씨는 매일 새벽 3시간씩 직접 정원을 관리한다. 장은교 기자.

조경가 정영선씨의 집 정원에는 쉽게 보기 어려운 한국의 토종 풀꽃이 많다. 조경설계일을 하며 현장에 맞는 풀꽃을 구하기 어려울 때는 정씨의 정원에서 공수할 때도 많다. 정씨는 매일 새벽 3시간씩 직접 정원을 관리한다. 장은교 기자.

■자연과 공존하는 삶 생각…조경은 시·그림 같은 것

‘땅 위의 시인’ 조경가 정영선

정영선은 일을 맡으면 먼저 땅을 본다. 보고 또 본다. 보고 또 보고 또 본다. 그 땅과 함께할 사람을 생각한다. 그 땅과 함께할 사람의 일상을 그린다. 그 땅과 함께할 사람의 자손의 미래를 그려본다. 다시 땅을 본다. 흙을 만지고 냄새를 맡는다. 그 땅과 사람과 어울리는 시와 그림을 떠올린다. 땅과 사람과 어울리는 시와 그림과 풀과 꽃과 나무를 생각한다. 그 풀과 꽃과 나무는 한국적인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땅도 살고 사람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올해 나이 여든. 조경가 정영선(사진)은 50년 가까운 시간을 이렇게 일해왔다. 한국전쟁 이후 공사 먼지가 끊이지 않았던 ‘개발공화국’의 한가운데서 정영선은 ‘사람’과 ‘자연’을 끊임없이 얘기하고 관철시켜왔다. 예술의전당, 86아시안게임 기념공원, 88올림픽공원, 93대전 EXPO, 인천국제공항, 선유도공원, 여의도 샛강공원, 노무현 전 대통령 자택과 묘역, 호암미술관 희원, 아모레퍼시픽 사옥, 서울식물원 등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장면마다 정영선의 손길이 담겼다.

지난달 29일 서울식물원에서 만난 그는 호미를 들고 땅에 쭈그려 앉았다. 탁탁탁. 호미질 세 번에 노란 미나리아재비꽃이 잔뿌리 하나 다치지 않고 땅 위로 올라왔다. “예쁘죠. 참 예뻐. <빨강머리 앤>에서 ‘버터컵’이라고 나오는 꽃이에요. ‘빠다’ 색깔 닮았다고. 옛날엔 흔했는데 매연에 약해서 이제 보기가 힘들어. 참 마음이 아파. 구하기가 어려워서 우리집에서 뽑아온 거예요.”

서울대 환경대학원 1호 졸업생(1975년)이자, 최초의 여성 기술사(국토개발기술사 1호, 1980년)인 그는 현역이다. 삽과 호미와 설계도를 들고 전국을 누빈다. 환갑만 지나면 일을 그만두고 앉아서 글을 써야지 먹었던 마음이 벌써 20년 전 일이 됐다. 종이 대신 땅 위에 시를 쓴다. 코로나19로 달라진 일상을 보며 정영선은 자신의 고집이 틀리지 않았음에 안도하면서도 안타까워한다.

‘조경의 대가’로 불리지만 ‘조경(造景)’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경치는 일부러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사람이 함께 사는 삶을 고민하는 것이 조경가의 일이자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지난달 29일과 30일 손끝마다 까만 흙 때가 묻은 정영선을 만나 그의 마지막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조경가 정영선씨는 경기 양평에 작은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며 산다. 첩첩산중에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던 습지를 오랫동안 가꾸고 다듬어 풀꽃이 자랄 수 있는 땅으로 만들었다. 현장에선 강단 있는 조경가인 그는 개인적인 삶을 풀어놓을 때는 부끄러운 듯 자주 웃었다. 장은교 기자.

조경가 정영선씨는 경기 양평에 작은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며 산다. 첩첩산중에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던 습지를 오랫동안 가꾸고 다듬어 풀꽃이 자랄 수 있는 땅으로 만들었다. 현장에선 강단 있는 조경가인 그는 개인적인 삶을 풀어놓을 때는 부끄러운 듯 자주 웃었다. 장은교 기자.

■“샛강을 주차장 만든다는 말에 앞이 캄캄…김수영의 시 ‘풀’을 읽어줬죠”

선조들은 담을 낮게 두르고 주변 풍경을 내 정원으로 생각했는데
우린 높은 담을 둘러쌓고 햇볕 한 점 안 들어오는 캄캄한 데 살면서
비싼 소나무 심으면 아파트 등급이 올라갈 거란 착각 속에 살아

- 지금 작업 중인 곳은 어디인가요.

“남양성모성지(천주교 남양순교지), 식물원 일이 있고요. 도산공원, 목동 파리공원 (리뉴얼)작업도 해야 돼요. 개인주택 정원 일이 대여섯곳 정도 될 거예요. 승효상 선생(건축가)과 함께 장미희 선생(배우)의 작은 정원을 만들고 있어요. 요즘 나를 제일 괴롭히는 건 ‘사후에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거예요. 삶도 중요하지만, 죽음도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되도록 봉분 없이 돌아가신 분을 편하게 모시고 추억할 수 있는 정원으로 만들려고 해요. (사후정원이라고 보면 될까요?) 네. 큰 산을 마구 잘라서 포개듯이 묘를 쓰거나, 상업적인 납골당은 우리 전통과도 거리가 멀다고 봐요. 서울부터 제주, 경북(경주), 강원까지 하루에 세 곳도 다니고 정신이 없네요.(웃음)”

- 삽과 호미를 들고 일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현장을 직접 다 다니시는군요.

“조경이라는 게 방안에 가만히 앉아서 도면만 그리고 이야기하는 걸로는 될 수가 없어요. 조경은 계속 바뀌어요. 설계하고 중간에 공사할 때 보고…우리 직원들이 다 잘하지만, 직접 보면서 마무리해야 하는 일도 있어요. 나랑 같이 현장에서 꽃 심고 풀 뽑고 일하시는 분들 중에 80세, 90세 다 된 분들이 있어요. 오래 전국을 같이 다녔죠. 식물을 다루는 일인데, 모르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일 맡기고 그렇게 못해요. (자택의 정원 일도 직접 다 하시죠.) 아침에 다섯 시쯤 일어나서 세 시간 동안 물 주고 돌봐요. 겨울은 겨울대로 할 일이 있고, 봄은 봄대로 할 일이 있어요. 요즘은 원예종을 많이 수입하고 우리 풀꽃재배를 잘 안 해서, 우리 산천의 풀꽃으로 설계를 해도 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요. 그럴 땐 내가 사는 곳 정원에서 캐서 가죠.”

- 선생님만의 작업루틴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일을 받으면 먼저 그 땅을 여러 번 가 봐요. 나는 작은 정원일수록 더 신경을 써요. 거기서 주변환경이라든가, 그 땅에서 어떤 자연변화를 느낄 수 있는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가. 그 가족들이 꿈꾸는 세계는 무엇인가. 그 집과 땅과 사람에 어떤 시가 어울릴까. 어떤 그림이 어울릴까. 몇 천만원짜리 소나무로 과시한다든가, 유행을 따라간다든가 그런 것은 절대 안 해요. 한번은 어느 집 정원을 맡았는데 유치원과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셋 있더라고요. (정원에서) 하고 싶은 걸 다 적어보라고 했어요. 어떤 아이는 환경오염 때문에 뭘 심어야겠다, 누구는 채소를 심고 싶다, 누구는 벌레를 키우고 싶다고 고사리손으로 다 써주더라고요. 어른들 말은 안 들어도 아이들 말은 다 들었어요. 그 아이들은 지금도 자기들이 꽃 심고 텃밭 가꾸고 해요. 나는 그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 땅 공부, 사람 공부에 땅과 사람이 만나서 만드는 일상까지 다 염두에 두시는군요.

“나는 일종의 ‘연결사’라고 보면 돼요. 땅이 갖고 있는 역사나 문화를 이해하고 우리 자연과 이웃과 잘 조화되는 걸 생각하죠. 우리 조상들은 담을 낮게 두르고 주변의 풍경을 내 정원으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난 ‘차폐(가림)’라는 개념을 잘 안 써요. 요즘 서울에선 보기 싫은 걸 다 가려버리잖아요. 높은 담으로 둘러쌓고 햇볕 한 점 안 들어오는 캄캄한 데 살면서 비싼 나무 썼다는 걸로 아파트 등급이 올라가는 착각 속에 살죠.”

-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조경을 예쁜 꽃과 나무를 심는 작업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조경은 무엇인가요.

“조경은 예쁜 화장이 아니에요. 조경은 그저 예쁘다는 것을 넘어서야 해요. 그 공간, 자연과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해야 하는 작업이에요. 나는 작업을 맡으면 시 쓰듯이 생각을 해요. 사람들이 그곳에서 위로를 받고 편안하게 거닐면서 영감을 얻고 건강도 되찾을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만드는 것이 조경의 업무라고 생각해요. 그 땅을 그 땅답게,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해야 하는데 어떤 외국꽃이 유행하고 사진찍기에 좋다고 그 땅의 역사나 맥락과 상관없이 죽 심었다가 다시 갈아엎고 그런 일이 반복되고 있어요. ‘조경’이라는 게 참 난처한 말이에요. 1970년대 큰 국책사업을 하면서 고속도로도 만들고 문화재도 복원하고, 국제적인 행사도 유치하고 그러다 보니까 나무 심고 건설현장에 뒤처리하는 게 필요했죠. 그땐 워낙 개발드라이브가 강할 때였으니까요. 미국에 ‘landscape architecture’이 있는데 직역하면 경관건축이죠. 그것도 좀 이상한데, (1970년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조경’이라고 만든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조경이라고 하면 자꾸 뭘 인위적으로 만드는 걸로 생각해요. 조경학회에서 이름을 바꾸자는 얘기까지 나왔는데 지금도 잘 안 되고 있어요. 좋은 공간을 만들려면 조경과 건축이 처음부터 같이 고민하고 협력해야 돼요. 조경이 건축의 뒤처리만 해서는 절대 좋은 작업이 나올 수가 없어요.”

관 공사는 윗사람 바뀔 때마다 ‘빼라’ ‘넣어라’ 주문 달라져
선유도공원에 죽으려고 갔던 분이 기도하고 싶었단 말에 같이 눈물
아산병원엔 서로 조금 숨어서 안 보이게…‘울 수 있는 곳’ 만들어

- ‘개발공화국’ 분위기에서 많이 싸우며 일하셨을 것 같습니다.

“싸웠다기보다 별별 일이 다 있었죠. 관 공사에는 무슨 자문위원회도 많고 윗사람들이 바뀔 때마다 자꾸 달라지는 거예요. 예술의전당 작업할 때는 문화부 장관이 세 번 바뀌었어요.(웃음) 아시아선수촌아파트와 아시아공원 할 때는 서울시가 정식으로 조경설계사무실과 계약을 맺고 일을 한 게 처음이었대요. 그땐 녹지과 공무원들이 우리 사무실에 와서 앉아있었죠. ‘나무 언제 심느냐, (위에서) 이 나무, 이 돌 쓰라고 했어요.’ 하고요. 지금도 관 공사가 더 어려워요. 설계해놓고 가보면 원안이랑 영 딴판으로 바뀐 경우가 너무 많아요. 속상하죠. 한국·프랑스 수교 100주년 기념으로 목동에 파리공원을 만들었는데, 구청장, 구의원 바뀔 때마다 달라졌어요. 수영장이 필요하다며 갑자기 어린이수영장을 만들더니 또 어떤 구의원이 ‘귀한 손님 모시고 왔는데 애들이 벌거벗고 물놀이하는 거 못 봐주겠다’고 또 바꾸라고 하고요. 광화문광장은 내 설계대로 된 게 하나도 없어요. 원형을 보존하려고 엄청난 마음고생을 해요. 그래도 나는 늘 좋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내 신념을 많이 관철시켰어요. 내 지도교수이기도 했고 청와대에서 조경담당비서관으로 일하셨던 오휘영 박사가 그랬어요. ‘정 선생은 대답은 참 시원하게 하는데 나중에 보면 개발드라이브가 하나도 안 들어가 있다’고요. ‘말씀하신 거 요렇게 표현했습니다’ 했죠. 내가 그렇게 또 피해가는 데 뭐가 있어요.(웃음)”

- 기억에 남는 현장이 많으시죠.

“말로 다 어떻게 하겠어요. 여의도 샛강을 주차장으로 만든다고 하더라고요. 막 눈앞이 캄캄한 거예요. 초기에 한강을 인위적으로 개발한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샛강까지 그렇게 한다니까요. 그래서 ‘제가 (한강관리사업소) 자문위원이니까 샛강을 큰돈 안 들이고 물고기도 살고 풀도 사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만들겠습니다’ 하면서 한강관리사업소 소장님에게 김수영 시인의 ‘풀’을 읽어줬어요. 그다음에 물고기, 곤충, 새, 풀, 물 등 모든 생태학자들을 다 모아놓고 어떻게 생태적으로 샛강을 복원시킬 것인가 연구를 했어요. 그때 하천관리 기준에는 (치수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샛강 변에 나무를 못 키우게 했어요. 버드나무와 억새가 너무 예쁘게 자라고 있는데 그걸 다 베라는 거예요. 이건 죽어도 살려야겠다고 했는데 안 된대요. 그래서 캐나다의 아주 유명한 생태학자를 모셔다가 버드나무와 홍수는 상관없다고 브리핑을 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오라고 해서 갔더니, 서울시 감사위원 30여명이 쭉 앉아서 내가 들어갈 때부터 삿대질을 하는 거예요. 화장실도, 관리사무실도, 주차장도 없는데 이게 무슨 공원이냐면서요. ‘이런 공원도 있고 저런 공원도 있습니다’ 했어요. 그랬더니 물 위에 데크가 있는데 홍수가 나면 더 부서질 거래요. ‘다 확인했고 실험했습니다. 혹시나 문제 생기면 내 돈으로 다 고치겠습니다’ 했더니 ‘당신 그렇게 돈이 많아. 얼마나 돈이 많은지 두고 보자’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곤욕을 치른 적도 있어요.”

- 조경의 힘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곳으로 선유도공원이 꼽힙니다.

“서울시 현상설계공모가 나왔길래 가봤는데, 보니까 딱 울고 싶더라고요. 너무 좋아서요. 정수장이었던 곳을 공원으로 만드는 작업이었는데 한 바퀴를 죽 둘러본 다음에 풀밭에 앉았어요. 여기가 겸재 정선이 한강의 풍경을 그리던 일부인데 이걸 살려야겠다 싶었어요. 절대로 다 때려 부순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정수시설을 그대로 살려보자고 했지요. 선유도라는 곳이 멀리서 보면 정수공장의 시설 때문에 하나의 거대한 함대 같은 느낌도 들었어요. 그러니 배로 오르락 내리락 여행하는 느낌이 들게 하면 어떨까 했고요, 환경교육(물교육)하는 장소로도 만들자 했어요. 한국의 풍경을 보여주는 겸재의 이미지, 정수장이라는 현대산업의 산물, 이런 것들을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일하면서 조성룡 선생(건축가)도 많이 울고 우리 사무실(서안조경)에 있던 정우건 소장(현 감이디자인랩)도 많이 울고 참 고생 많았어요. 포플러 나무를 못 구한다고 해서 전국을 뒤져서 구했어요. ‘시간의 정원’은 우리가 직접 가서 삽질까지 다 했어요. 그때 부시장이었던 강홍빈 선생이 정말 우리 뜻을 잘 이해해주고 도와주셨죠. 그분이 은인이에요. 어느 날은 전화를 한 통 받았어요. 어떤 여성분이 죽으려고 선유도공원에 갔는데 막상 가보니 이상하게 기도를 하고 싶더래요. 전화기 붙들고 같이 울었죠. 공간이라는 게 참 묘한 거예요. 죽을 마음을 먹었다가 어떻게 살 생각을 하게 했을까요.”

- 서울아산병원 조경도 하셨죠.

“신관을 짓는데 정몽준 회장이 조경도면을 보여주더라고요.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닌 거예요. 병원에는 환자도 보호자도 의사도 간호사도 ‘울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넓은 잔디밭 같은 것은 안 돼요. 서로 조금 숨어서 안 보이게 울 수 있는 정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병원에는 기왕이면 왕성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나무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병원에는 병원에 맞는 조경이 필요한 거죠.”

- 서울대 환경대학원 조경학과 1호 졸업생(1975년)이십니다. 어떻게 조경가의 길을 걷게 되셨나요.

“내가 자란 배경이 조금 독특해요. 경북 경산에서 태어났는데 할아버지가 성암산에서 과수원을 하셨어요. 야트막한 산이었는데 검은빛의 일곱바위가 있다고 칠암농원이었죠. 그 바위틈에 피어있던 백합꽃이 지금도 꿈에 왔다갔다해요. 사과꽃이 온 마당에 떨어지는 걸 보면서 컸지요. 가까이 있던 외가댁은 초가집이었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대구에서 살았는데 아버지가 학교 선생님이셔서 사택에 살았거든요. 외국인 선교사들이 짓고 가꿔서 아주 이국적이었어요. 그때 선교사들이 심은 튤립이며 장미를 봤죠. 자동적으로 그렇게 학습이 됐던 것 같아요. 아버님 친구분 중에 시인 박목월 선생, 화가 정점식 선생도 계셨고요. 원래 집에서는 내가 시인이 될 줄 아셨어요. (그는 학생 때 다수의 백일장에서 수상했다. 서라벌예대와 서울대 신춘문예에도 당선됐다.) 문학적인 관심이 많았는데 한국적인 풍경과 이국적인 건물, 꽃과 풀, 그림을 어린시절부터 많이 보고 자란 거죠. 물지게도 지고 삽질도 하고 많은 식구가 좁은 데서 사느라 어려웠지만 그래서 더 재밌게 살았던 것 같아요.”

조경가 정영선씨의 일상. 틈나는 대로 풀과 꽃, 나무를 돌보고 시를 읽는다. 장은교 기자.

조경가 정영선씨의 일상. 틈나는 대로 풀과 꽃, 나무를 돌보고 시를 읽는다. 장은교 기자.

■“조경은 예쁘게 화장하는 게 아니라 위로와 영감 주는 공간 만드는 것”

‘땅은 땅답게, 사람은 사람답게’
자연과 사람을 이해하는 작업

‘벌자, 달려라’ 하는 것 멈추게 해
한숨 돌리고 다시 생각하도록
코로나가 중요한 역할을 한 셈

- 기자로도 일하셨죠.

“우리 풀꽃 가꾸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그때는 마땅히 그 쪽의 일이 없었어요. 대학 졸업(서울대 농학과)하고 ‘주부생활’이라는 잡지에서 일했어요. 주택을 담당하겠다고 했더니 다들 놀랐지요.(웃음) 건축가 김중업 선생, 김수근 선생, 나상기 선생 작품 찍으러 문화주택에 갔는데 그때부터 꽃도 꺾어가고 꽃병, 방석, 커피잔도 가져가서 꾸미고 주택화보를 찍었지요. 앙드레김 선생이 패션화보를 찍는데 내가 실내 말고 한강에 포플러 있는 데서 찍고 싶다고 했더니 좋대요. 그래서 김밥 싸가지고 가서 찍었어요. 화가 천경자 선생 도움도 많이 받았지요. 여러 가지 좋은 경험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어떤 분이 환경대학원에 조경학과가 생긴다고 알려줘서 마감 직전에 급하게 원서를 냈어요. 내가 나이가 워낙 많아서 이광로 선생이 출석을 부를 때 ‘언니’라고 하기도 했어요. 그때부터 환경대학원의 언니 역할 하다가, 그다음엔 조경계의 엄마 역할을 하고 그렇게 됐네요. 즐겁게 공부했어요.”

- 최초의 여성기술사(국토개발기술사, 1980년)이자 1세대 ‘일하는 여성’입니다. ‘조경설계 서안(주)’의 대표이기도 하시죠. 지금도 많은 여성들이 직업을 갖고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어떻게 긴 세월을 일하실 수 있었나요.

“내가 5남매 중 맏딸인데 아버지가 아들이라고 이렇게 키우고 딸이라고 저렇게 키우고 그러지 않으셨어요. 할아버지도 참 예뻐해주셨고요. 나도 일하면서 내 성별을 생각하며 일한 적 없어요. 생일이 4월인데, (조경은 4월에 일이 많잖아요) 환갑날도 그렇고 얼마 전에 팔순이었는데 그날도 나가서 일했어요. 참 말 못할 고통들이 많이 있죠. 초기에 참 좋은 여성 건축가, 여성 조경가들도 많이 있었어요. 근데, 여성들은 가사일하고 육아하고 회사일까지 하면서 정말로 어렵죠. 중간에 과로로 병나고 중도하차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결혼생활이 파탄난 사람도 많아요. 아픈 후배들 보면 나는 막 가슴이 저럿저릿해요. 사는 게 참 애처로워요. 자기 분야의 일을 좀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라고 하는데 그게 또 참 쉽지 않은 모양이에요. 아이 낳고 나면 아이 보는 게 우선이다 나중에 일하자 하지만은 그 나중이라는 텀이 굉장히 애매해지잖아요. 나도 아들이 어렸을 때 대구 친정에 맡겨놓고 일주일에 한번씩 보러 갔어요. 남편이 쓰러져서 요양병원에 6년인가 있었는데 그때도 매일 울면서 일하러 다녔지요. 그 세월을 어떻게 다 말로 하겠어요.”

가장 아름다운 정원은 농경지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한국적인 경관 만들고 싶어

- 코로나19 사태로 삶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예전부터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강조해오셨죠.

“우리가 그동안 사람을 위해서 있는 자연으로만 알지 자연과 더불어 산다는 생각은 하지 않은 거예요. 그저 개발 개발, 돈 벌자 돈 벌자, 달려라 달려라 하는 것을 일단 멈추고 한숨 쉬고 다시 생각하게 하는데 코로나19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봐요. 자연을 회복시키고 겸손하게, 자연을 존중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연을 훼손해가면서 행사를 하려고 하지 말고 명상도 하고 산책하고 아파트에서라도 꽃을 가꿔보고 이런 식으로 생활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축제를 기획할 때도 꼭 100만명씩 와야 하고, 그 100만명을 위한 주차장과 화장실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런 생각을 좀 바꿔야 해요. 관광객을 끌어 모으겠다고 제주 서귀포밭에 유채꽃을 심었다가, 꽃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인다고 코로나19 때문에 또 다 갈아엎고… 자연을 이렇게 대해서는 안 되잖아요. 4대강사업만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고 스님들이 오체투지하실 때 같이 못한 게 한이 될 정도지만…이번에 보세요. 사람들이 조금 활동을 자제하니까 인도에서 히말라야가 보이고, 멸종위기의 동물들이 돌아왔잖아요. 자연은 생각보다 힘이 세요. 자연이 회복할 수 있도록 이제 사람이 도와야죠.”

- 5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혹시 아직 못다 이룬 꿈이 있으신가요.

“할아버지가 하신 과수원이 있던 산이 어느 날 갑자기 없어졌어요.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삼촌들이 과수원을 팔았는데 대학으로 넘어갔다가 아파트가 들어서버렸죠. 박완서 선생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처럼 감쪽같이 사라졌어요. 대학 다닐 때 그 소식을 듣고 한 달을 앓아 누웠어요. 그런데 한국에는 아직도 그런 일이 많아요. 자고 나면 산이 없어지고, 자고 나면 논이 없어지고. 나는 가장 아름다운 정원은 농경지라고 생각해요. 농촌이 그 나라의 경관을 좌우하죠. 그런데 지금 농촌은 너무나 무분별하게 개발돼있어요.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소박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은 거라고 생각해요. 난개발된 각양각색의 주택, 산사태가 날 정도로 깎아버린 산…이런 걸 좀 정리하고 싶어요. 가장 한국적인 농촌마을, 사람과 자연이 조화로운 경관을 만드는 게 내 마지막 꿈이에요.”

서울 여의도샛강생태공원과 선유도공원의 모습. 조경설계 서안(주) 제공

서울 여의도샛강생태공원과 선유도공원의 모습. 조경설계 서안(주) 제공

■녹지 속 아파트·국내 첫 생태공원…무분별한 개발에 제동

정영선 조경으로 본 한국 현대사

조경가 정영선의 작품들은 한국 현대사와 맥을 함께한다. 한국의 조경은 역설적으로 1970~1980년대 개발공화국 속에서 피어났다. 2000년대 들어 무분별한 개발을 지양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 생태주의, 재생건축 등을 고민하게 되기까지도 자연과 사람의 조화로운 삶을 고민한 조경의 역할이 컸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선수촌아파트

한국에서 열리는 최초의 국제종합스포츠대회였다. 아시안게임에 대비해 경기장 주변 정비사업이 국가주도로 진행되며 서울 송파구 잠실에 아시안게임기념공원, 아시아선수촌아파트 등이 만들어졌다. 정영선은 공원과 아파트 설계에 모두 참여했다. 조성룡 건축가와 함께 작업한 아시아선수촌아파트는 한국 아파트건축사에도 기념비적인 곳으로 꼽힌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이 만들어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대신 지상에 녹지공간을 넓게 확보했다. 서울시가 조경설계사무실과 정식 계약을 맺고 일한 것도 이때가 처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전에는 녹지담당 공무원들이 조경을 담당했다.

1993년 대전 엑스포와 기념공원

대전에서 개최된 국제세계박람회. 군사정권에서 치러졌던 1988년 서울 올림픽과 달리 한국이 문민정부를 세우고 경제적·과학기술적으로도 이만큼 발전했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엑스포기념공원을 맡은 정영선은 한국의 역사적인 연못인 ‘안압지’의 형태를 차용한 수공원을 만들었다.

1997년 여의도샛강생태공원

서울 여의도에 만들어진 국내 최초의 생태공원이다. 1997년 처음 만들어졌고, 2010년 수변 생태공간을 확장했다. 원래 샛강 인근의 버드나무를 자르고 물을 막아 인근 아파트 주차공간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여러 희귀식물과 동물이 공존하는 생태공원으로 회생했다. 사람들이 걸을 수 있는 산책로와 수변데크를 만들되, 자연을 해치지 않는 차원에서 이용시간과 공간을 제한했다. 여의도샛강생태공원 조성을 전후로 사회적으로도 무분별한 개발, 자연파괴에 대한 반성 속에 ‘지속 가능한 발전’ ‘생태주의’에 대한 관심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2002년 선유도공원

서울 양화대교와 연결된 선유도에 조성된 공원. 원래 정수장이었으나 정수처리기능이 사라지면서 공원으로 조성됐다. 기능을 다한 산업시설을 폐기하지 않으면서 선유도라는 공간이 가진 역사적 의미와 겸재 정선의 이미지 등을 담아 가장 한국적이며 현대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다는 찬사를 받았다. 생태공원이자 환경학습공간, 다양한 문화 이벤트가 열리는 예술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정영선은 선유도공원으로 미국조경가협회(ASLA)상, 세계조경가협회(IFLA) 동부지역 조경작품상, 김수근문화상, 한국건축가협회상 등을 수상했다.

2008~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봉하 자택과 묘역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후 고향에서 농사지으며 여생을 보내고 싶어 했다. 자신의 집이 마을 공동체의 베이스캠프가 되길 바랐다. 정기용 건축가와 함께 작업한 봉하 자택에는 이런 뜻이 반영됐다. 소박한 한옥을 모티브로 한 자택은 ‘지붕 낮은 집’으로도 불렸다. 노 전 대통령의 자택은 7주기인 2016년 5월 일반에 처음 공개됐다. 정영선은 승효상 건축가와 함께 노 전 대통령의 묘역 조성도 함께했다. 봉분 없이 큰 돌 하나가 놓여 있고 주위의 자연 전체를 그대로 둔 당시로서도, 지금도 보기 드문 묘역이다. 정영선은 인위적인 묘역 대신 사람이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평장(平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2012~2016년 아모레퍼시픽 사옥과 공장(원료식물원)

서울 용산에 건설된 본사 사옥은 조선의 달항아리 백자에서 영감을 받은 ㅁ자형의 중정 형태로 설계됐다. 사옥 내부 공간 곳곳을 자연과 도시, 지역사회(용산역, 용산공원)와 기업이 교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오산공장은 여러 곳에 나뉘어 있던 공장을 한곳에 합치면서 각 지역에서 직원들과 함께했던 나무들, 화장품 원료가 되는 식물들로 공원을 만들었다. 공장이지만 공원으로 더 유명하다. 2019년에는 ‘원료식물원’으로 보다 확장됐다.

자문 | 박승진 조경가·디자인 스튜디오 LOCI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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