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5년 연속 노동절 행진 열리지 않는 홍콩···당국 ‘안보’ 강조에 노조마저 행진 포기

2024.05.02 17:26 입력 2024.05.02 18:50 수정

1일 오후 1시 무렵의 홍콩 번화가 헤네시 로드. 이날 홍콩에서는 5년째 노동절 집회가 열리지 않았다./박은하 기자

1일 오후 1시 무렵의 홍콩 번화가 헤네시 로드. 이날 홍콩에서는 5년째 노동절 집회가 열리지 않았다./박은하 기자

1일(현지시간) 홍콩섬에는 비가 내렸다. 중국에서 닷새 간 이어지는 연휴 첫날이었지만 날씨 탓인지 관광객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호텔, 쇼핑센터, 음식점이 밀집한 완차이의 유명 쇼핑거리 헤네시 로드 차도는 버스와 택시가 지나갔다. 몇몇 유명 음식점 앞에는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맥도날드, 스타벅스 등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는 붐볐지만 빈 자리 몇 석은 항상 발견할 수 있었다. 평소 휴일과 다름없는 모습이다.

헤네시 로드는 ‘쇼핑거리’이면서 ‘데모의 거리’이기도 하다. 특히 노동절에는 노동조합이 조직한 시위대가 헤네시 로드를 행진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이날 헤네시 로드에 노동절 행진은 없었다. 현재 홍콩 최대노조이자 친중 성향으로 평가받는 홍콩공회연합회(HKFTU)는 지난달 27일 노동절 행진을 대신하는 포럼을 열었다.

포럼에는 존 리 행정장관과 크리스 순육한 홍콩 노동복지부 장관이 참석했다. 이날 노조 측은 홍콩 노동부에 최저임금 인상을 비롯한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2019년 5월 1일 열린 홍콩 메이데이 행진. 노동자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게티이미지.

2019년 5월 1일 열린 홍콩 메이데이 행진. 노동자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게티이미지.


홍콩에서 노동절 행진은 2019년을 마지막으로 5년째 열리지 않고 있다. 홍콩 노조 측에서 먼저 행진을 포기한 것은 처음이다. 스탠리 응 HKFTU 의장은 지난달 22일 행진을 포럼으로 대체한다고 알리면서 “시위 외에도 여러가지 방법으로 노동자의 요구를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홍콩프리프레스 등에 따르면 2020~2022년은 코로나19 방역정책 때문에 집회와 행진이 금지됐다. 코로나19 방역이 해제된 2023년 홍콩의 노동조합들은 노동절 집회를 재개하려 했다. 그러나 2023년 신설된 홍콩·마카오 공작판공실 주임인 샤바오룽은 그해 4월15일 ‘국가 안보 교육의 날’을 맞아 홍콩을 방문해 “시위가 의견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고 말했다. HKFTU는 샤바오룽 방문 이후 집회 신청을 절회했다.

홍콩직공회연맹(HKCUT)의 전 의장 조 웡과 전 조합원 데니 토 2명이 개인자격으로 노동절 행진을 신고했으나 역시 경찰은 허가를 내 주지 않았다. 경찰은 두 사람에게 ‘시위 자금’은 누구에게 조달받았는지, 노조를 공격하는 폭력 소요가 발생할 때의 대책은 세웠는지 등을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웡이 노동절 당일 오전 4시간 동안 실종되면서 행진은 취소됐다.

중국과 홍콩 당국은 ‘안정에서 번영으로’를 내세우고 있다. 2019년 송환법 시위가 6개월 간 계속되면서 불법·폭력 시위로 홍콩 경제도 어려움을 겪었으며, 안정을 바탕으로 번영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홍콩 정부가 마련한 홍콩 보안법의 취지도 ‘안정을 통한 번영’이었다. 집회, 시위 등 과격한 방식이 아니라 당국과 노조가 원만하게 합의하며 노동자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이날 랜드마크인 헤네시 호텔 앞에는 “임금 체불을 신속히 신고하라”는 내용을 적은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광둥어와 영어 외 타갈로그어, 베트남어 등 11개국어로 돼 있다. 홍콩 노동부가 붙인 공고문이다. 시민사회가 마련한 노동절과 관련된 현수막이나 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1일 홍콩 헤네시 호텔 앞에 세워진 입간판. ‘임금 체불을 즉각 신고하라’는 내용이 11개 국어로 적혀 있다. 홍콩 노동당국이 마련했다./박은하 기자

1일 홍콩 헤네시 호텔 앞에 세워진 입간판. ‘임금 체불을 즉각 신고하라’는 내용이 11개 국어로 적혀 있다. 홍콩 노동당국이 마련했다./박은하 기자

홍콩 노동당국은 이번 노동절을 앞두고 내년도 최저임금을 40홍콩달러에서 41.80홍콩달러(약 7300원)로 인상하겠다고 밝혔다. 물가상승률 등을 감안한 최저임금 산정 공식도 만들고 산정주기도 현행 2년에 한 번에서 매년으로 바꾸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2011년 최저임금법이 도입된 이후 당국이 저임금 근로자를 위한 보호 조치를 마련한 것은 처음이라고 홍콩 언론들은 전했다. ‘안정’에 ‘번영’으로 화답하겠다는 당국의 신호였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생활비가 너무 높아 대다수 저임금 노동자들은 인상된 최저임금에 별다른 감흥이 없다”고 전했다. 헤네시 거리에서 파는 아침용 토스트가 약 20홍콩달러(약 3500원), 쌀밥에 구운 닭고기 반찬을 곁들인 점심 한 끼 식사가 60~62홍콩달러(약 1만500~1만900원)였다.

홍콩 셩완역에서 빅토리아항으로 이어지는 육교에서 주로 필리핀에서 온 가사 이주노동자들이 휴일을 맞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박은하 기자

홍콩 셩완역에서 빅토리아항으로 이어지는 육교에서 주로 필리핀에서 온 가사 이주노동자들이 휴일을 맞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박은하 기자

셩완역 쇼핑센터와 연결된 빅토리아항이 보이는 육교에서는 필리핀 출신 여성 가사이주 노동자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주말이나 연휴에는 고용주 가족이 단란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집을 비워준다. 평소에는 고용주의 집에서 숙식하기 때문에 쉬는 날에는 공원, 육교 등에서 텐트를 치거나 종이상자로 칸막이를 치고 노숙한다.

이들은 모여 카드게임을 하거나 누워서 쉬거나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보냈다. 육교에서 소형 마이크로 영국 가수 아델의 노래를 부르던 펠마는 “휴일이면 항상 여기 나와 있다”며 “동포들끼리 보내니까 괜찮다”라고 했다. 홍콩에서 민주노조 운동이 가능했던 시절에도 이어져 온 문제였지만, 노동절 행진에는 이주노동자들도 참여하곤 했다.

홍콩 야당 사회민주당(LSD) 찬포잉 대표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5년 연속 노동절 행진을 볼 수 없는 것은 깊은 유감”이라고 밝혔다. 그는 “정부가 노동 문제에 대해 고용주 편을 드는 경향이 있고 노동자들의 요구에 느리게 반응한다”며 “기본권 향상을 위해서는 싸울 권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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