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2002년 방북’ 둘러싼 소문의 진실은?

2013.03.02 11:05 입력 2013.03.02 19:28 수정

밤 11시 취기 오른 김정일, “내일 육로로 가시지 뭣하러 돌아갑니까”

이제 막 출범한 박근혜 정부가 어떤 대북 입장을 가질지는 초미의 관심 대상이다. 정권 초기 관계설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5년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최대석 사퇴 미스터리, 애니메이션 ‘뽀로로’를 매개로 한 남북간의 막후접촉 등 박근혜 정부의 대북관계 뉴스가 관심을 받는 이유다.

“(박대통령이) 지난 2002년 5월, 북한 평양에 가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난 것은 소중한 자산이다. 북의 최고지도자를 남쪽에서 누가 만났는가는 굉장히 중요하다. 박 대통령이 그런 소중한 자산을 충분히 이용하면 오히려 과거 민주정부보다 더 힘을 갖고 북한문제를 전격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다고 본다.”

지난 2월 4일 국회 외교통상위원회. 정청래 민주통합당 의원의 발언이다. 과거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은 재임 중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 현역 정치인으로 북의 최고수뇌부를 만난 유일한 경험을 가진 것이다. 3박4일에 걸친 평양 방문을 마친 박 대통령은 남북 정부의 합의를 통해 판문점을 통해 육로로 귀환했다. 이 역시 흔치 않은 경험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2002년 방북 사진. 사진 속의 인물은 왼쪽부터 신희석 아태정책연구원 이사장, 박근혜 의원, 김정일 국방위원장, 장 자크 그로하·지동훈 유럽코리아재단 이사장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2002년 방북 사진. 사진 속의 인물은 왼쪽부터 신희석 아태정책연구원 이사장, 박근혜 의원, 김정일 국방위원장, 장 자크 그로하·지동훈 유럽코리아재단 이사장이다.

2002년 방북과 관련해 박 대통령은 방북 직후 언론 인터뷰와 이를 전재한 홈페이지, 그리고 지난 2007년 펴낸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를 통해 경과 등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방북의 자세한 추진과정 및 김정일 위원장을 비롯한 북한 최고수뇌부와의 전체 대화내용 등은 공개돼 있지 않다.

지난 2006년, 박 대통령은 방북과 관련해 1차 필화(?)사건을 겪었다. 박 대통령은 홈페이지에 올린 방북기를 통해 “오찬 뒤 ‘평양 8경’ 중 2경이 있는 모란봉과 김일성 주석 생가가 있는 만경대 관광길에 나섰다. 비는 계속 오고 있었다”고 적었다. 이 방북기에는 구체적으로 날짜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전후 맥락으로 보아 2002년 5월 12일 일요일 오후의 일로 보인다. 2006년, 이 구절과 관련해 뒤늦게 논란이 일었다. 해당 문구는 “오찬 뒤 ‘평양 8경’ 중 2경이 있는 모란봉을 찾았다. 비는 계속 오고 있었다”로 수정되었다. ‘박근혜 홈페이지’ 관리자는 “위의 내용 중 논란이 되었던, “오찬 뒤 ‘평양 8경’ 중 2경이 있는 모란봉과 김일성 주석 생가가 있는 만경대 관광길에 나섰다”고 되어 있던 기사는 잘못 작성된 것이었습니다. 기자에 의해 당일 수정되었던 (수정) 기사의 내용으로 수정하였습니다. 관리자가 처음 작성되었던 기사를 그대로 인용하였는데, 수정된 기사의 내용을 반영하지 못해 논란을 제공한 점에 대해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2006. 11.7”이라는 관리자 주를 올렸다. 이 관리자 주를 작성한 사람은 지난 대선 기간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춘상 보좌관으로 알려졌다.

지난 대선과정에서 이와 관련한 논란이 일자 당시 박근혜 후보 쪽에서는 “공연이 있었던 만경대 소년궁전만 갔을 뿐 (김일성 생가가 있는) 만경대에는 간 적이 없으며, 이것은 당시 통일부도 확인한 사안”이라고 밝혔다.

최근 공개된 2002년 방북 때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과 찍은 사진을 보면 박 대통령과 동행한 인사는 신희석 아태정책연구원 이사장, 지동훈 유럽-코리아재단 공동이사장, 장 자크 그로하 전 주한 EU 상공회의소 소장(유럽-코리아재단 공동이사장) 등 3명이다. 유럽-코리아재단 측은 이른바 5·24조치로 남북 민간접촉이 제한된 이명박 정부 시기에도 유럽 상공인들과 함께 여러 차례 방북사업을 벌여 왔다.


최근 한 월간지가 박근혜 정부와 북측의 막후접촉 매개자로 애니메이션 뽀로로의 제작회사를 지목했다. 1월 16일 ‘뽀로로 슈퍼썰매 대모험’ 개봉 기념 시사회에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 관객들에게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인수위 사진기자단

최근 한 월간지가 박근혜 정부와 북측의 막후접촉 매개자로 애니메이션 뽀로로의 제작회사를 지목했다. 1월 16일 ‘뽀로로 슈퍼썰매 대모험’ 개봉 기념 시사회에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 관객들에게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인수위 사진기자단

방북 경위·대화 내용 다 안 밝혀져

박 대통령과 함께 방북한 신희석 이사장은 지난 1월 25일 TV조선의 ‘장성민의 시사탱크’에 출연, “그해 5월 초 한국미래연합 창당을 준비하던 박근혜 의원으로부터 시내의 모처로 나와달라는 연락을 받고 가니, ‘다음주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북한에 가는데 동행해줬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고 가족과 상의한 후 쾌히 수락했다”고 밝혔다. 박근혜 자서전 <절망은…>보다는 진전된 경위 설명이다. 신 이사장은 지난해 10월, 한 비공개 친목카페와 지인들에게 보내는 메일 등에서 보다 상세한 경위를 밝혔다.

“2002년 5월 초. 나는 남북한 관계에 관하여 긴급하게 상담을 원한다고 하는 박근혜 당시 의원의 전화를 받았다. 조용하게 상의할 사항이 있으니 시내 모처로 나오라고 하는 전갈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북한 김정일위원장의 초청을 받고 신 박사와 함께 4~5일 동안 평양을 방문할 예정이니 꼭 동행하기를 바란다’고 부드럽지만 약간 긴장된 어조로 말하였다. 나는 가족과도 상의해 보아야 하고 여러 가지 주변 환경을 점검해야 하는 고로 며칠 동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박 당시 의원은 강경하였다. 시간이 없으니 조속히 결정하라고 하는 그녀의 요청이 나를 엄습하였다. 나는 가족과 상의한 후 박 후보의 요청을 쾌히 수락하였다.”

그러나 유럽-코리아재단과의 관계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박근혜 자서전에 설명되어 있는 유럽-코리아재단 관련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의원님, 북측에서 북한을 한 번 방문하시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습니다.’ 한국미래연합 창당 준비를 하던 즈음이었다. 내가 이사로 재임 중이던 유럽-코리아재단으로부터 3박4일 일정으로 북한을 방문하지 않겠느냐는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주한 EU 상공회의소 산하 재단인 유럽-코리아재단은 북한 어린이들에게 축구공과 의약품을 보내는 등 꾸준한 지원활동을 펼쳤고, 유럽과 북한의 경협문제에 대해서도 여러 제안을 해온 단체였다. 북한에서도 유럽-코리아재단의 활동에 깊은 관심을 표하고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어 하던 차에 나를 포함한 재단 이사진을 초청한 것이다.” 전후 맥락으로 보아 앞에서 박근혜 당시 의원에게 접근해 북측 제안을 전달한 인사는 장 자크 그로하 전 이사장이다.

장 자크 그로하 전 이사장은 젊은 시절 7년을 평양에서 보낸 뒤 다시 한국에 들어와 주한 EU 상공회의소에서 일하는 등 특이한 경력을 지닌 인물이다. 과거 언론과 인터뷰에서 그가 밝힌 경력에 따르면 젊은 시절 중국의 대학에 연수를 갔다가 북한 지하자원 수출업무를 하던 홍콩 북아시아컨설팅사에 일자리를 얻게 된 뒤 평양에 파견되었다. 그가 평양에 체류하던 시기는 1986년부터 1992년. 또 다른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차를 직접 몰고 청진 등 북한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도 했다”고 북한 체류 시절의 에피소드를 전하기도 했다. 한 보수단체 인사는 “유럽-코리아재단이 많은 활동을 벌여왔다고 하지만 결성시기는 DJ가 평양을 방문한 1년 뒤인 2001년”이라며 “그 후 장 자크 그로하의 행적을 보면 단순히 경제인으로서 활동을 해온 인물로만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간단히 말해, 남북한 정권을 연결하는 이중의 ‘에이전트’ 역할을 해온 인물이 아니냐는 의혹이다.

하지만 그가 “북한 쪽의 에이전트일 수 없다”는 의견도 나온다. 김정일 사후인 2011년 12월 19일 장 자크 그로하는 JTBC와의 인터뷰에서 “(김정일의 사망은) 북한 주민들에게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발언을 한다. 한 남북문제 전문가는 “만약 그가 북한의 에이전트가 아니라 단순한 친북인사라고 하더라도 저 발언은 북한 지도부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발언”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경우, 자신들의 체제에 대한 비판까지는 어느 정도 묵인하지만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백두혈통’을 공격하는 발언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전문가는 “그런 북쪽의 심기를 잘 알고 있을 그(장 자크 그로하)가 언론에 대고 그런 공개발언을 했다는 것은 그동안 구축해왔던 북한과의 커넥션이 끊어질 것도 어느 정도 각오했다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대북문제에 관한 한 ‘DJ노선’에 동의하는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라는 것이 이 전문가의 추측이다.

2002년 방북과 관련, 일각에서는 “당국의 승인을 받지 않은 방북이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으나 이 역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박 당시 의원과 동행한 신희석 이사장은 앞의 글을 통해 “비록 짧은 준비기간이었지만 청와대의 임동원 외교안보수석, 국가정보원, 통일부 정세현 장관과의 협조는 무난하게 이뤄졌고, 박 당시 의원과 나는 최종적으로 삼청동에 있는 남북회담 사무국에서 신언상 당시 사무국장(나중에 통일부 차관 역임)으로부터 특별 브리핑을 받았다”고 경위를 밝혔다. 당시 박 의원 일행은 북경에서 김은수 정무공사 등 주중 한국대사관 고위관리의 영접을 받았고, 북경 체류 당시 주중 한국대사관의 환영 만찬 및 주중 한국대사관의 리무진을 타고 북경 공항에 나갔다. 3박 4일 일정을 마무리하고 판문점의 군사분계선을 넘는 자리에는 다시 신언상 사무국장이 영접을 나왔다.

박 대통령의 2002년 방북 과정이 당시 김대중 정부와 긴밀한 협의를 통해 이뤄진 정황은 판문점 육로 귀환과 관련한 에피소드에서도 드러난다. 신 이사장은 앞선 글에서 김 위원장이 먼저 육로로 귀환할 것을 제안했다며 다음과 같이 그 경위를 적고 있다.


지난 2002년 5월 14일, 북한 평양을 방북한 박근혜 의원이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을 방문해 학생들이 서예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지난 2002년 5월 14일, 북한 평양을 방북한 박근혜 의원이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을 방문해 학생들이 서예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박근혜 당시 의원 “DJ정부와 긴밀히 협의”

“상당히 취기가 돌고 있음을 알았을 때, 이미 밤 11시가 다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위원장님! 박 의원님과 저는 내일 아침 빠른 항공편으로 귀국해야 하는 고로 오늘밤은 이 정도로 실례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내가 이야기하였다. 순간 김 위원장은 “육로로 가시지 뭣하러 비행기를 타고 중국을 거쳐 돌아갑니까?”라고 말하면서 왼쪽을 바라보는 순간 40대 여성이 벌떡 일어나서 김 위원장 옆으로 다가서자 김 위원장은 귀엣말로 무엇인가 업무지시를 하는 것 같았다. 약 10여분 후 그 여성은 A-4용지 크기의 백지 한 장을 갖고 왔다. 맨 위를 보니 ‘전언통신문’이라고 적혀 있었고, 김 위원장은 몽블랑 만년필을 꺼내서 그 중 몇 군데를 수정하는 자상한 모습을 보였다. 잠시 후 장성택 부장이 “서울에서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내일 아침 10시 반에 판문점을 통과해도 좋다고 하는 답장이 왔습니다”라고 큰소리로 보고하였다. 박근혜 의원과 나는 이와 같은 경로로 여권에 찍힌 아무런 출입국 도장도 없이 다음날 아침 판문점을 무사히 통과하였다.”

한밤중에 서울에서 대기하던 핫라인을 통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전격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박근혜 의원의 입법보좌관이었던 정윤회씨의 평양 동행설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한국미래연합 창당과정에 개입했던 한 인사는 <주간경향>과 통화에서 “박 당시 의원이 평양에 있을 때 정윤회씨는 나와 함께 서울에 있었다”며 “박 의원의 방북과정에서 정씨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밝혔다.

통일부 관계자도 “통일부의 방북 승인을 받은 인사는 유럽-코리아재단 이사 자격으로 승인을 받은 박근혜, 신희석, 그리고 지동훈 이사장 등 3인이 전부”라고 확인했다. 한국 국적이 아닌 장 자크 그로하의 경우 방북 승인 대상이 아니다.

지난 대선 당시 이른바 ‘NLL대화록’ 논란과 함께 민주당 일각에서 제기된 것이 ‘박근혜의 2002년 방북보고서 공개’ 주장이었다. 야권 일각에서는 “2002년 방북 후 박 당시 한국미래연합 창당 준비위원장은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주간경향>의 취재 결과 방북보고서는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에서 박근혜 의원은 “김정일 위원장이 IT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들어서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최첨단 비디오 기기를 선물했다”고 밝혔다. 한국에서 개발한 최첨단 비디오 기기란 무엇일까. 통일부는 “통일부에 남아있는 보고서에는 관련된 내용이 기술돼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한편, 북측 에이전트로 지목되었던 장 자크 그로하 전 주한 EU 상공회의소 소장은 지난해 9월 소장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이름은 최근에 EU 상의가 회원사들을 대상으로 발송한 초대장이나 발간하는 잡지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유럽-코리아재단 홈페이지는 현재 폐쇄된 상태다. 과거 홈페이지 주소로 접속하면 EU 상의가 추진하던 사업 중 하나였던 공정무역 코리아의 홈페이지로 연결된다. EU 상의의 한 회원사 관계자는 “재단의 홈페이지만 닫았을 뿐 재단 활동 자체가 중단된 것은 아닌 것으로 안다”며 “(장 자크 그로하는) 지난해 7월 국세청이 EU 상의에 과세를 했는데, 그 조치를 받아들일 수 없어 내부 회의를 거쳐 물러난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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