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 사과, 배상하라" 영국 왕세손 부부 순방이 촉발한 자메이카의 분노

2022.03.23 16:09 입력 2022.03.23 16:12 수정 김혜리 기자

영국의 윌리엄 왕세손과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비가 22일(현지시간) 자메이카를 방문하고 있다. 윌리엄 왕세손 부부는 지난 19일부터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즉위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일주일간 벨리즈, 자메이카, 바하마 등 카리브해 영 연방국 순방에 나섰다.

영국 윌리엄 왕세손 부부의 카리브해 영 연방국 순방이 역풍에 부닥쳤다. 우호적인 관계를 도모하기 위해 나선 순방이 도리어 영국의 과거 노예무역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바라는 자메이카인들의 분노를 자극하면서다.

윌리엄 왕세손과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비는 지난 19일(현지시간)부터 영 연방국과 영국 왕실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일주일간 벨리즈, 자메이카, 바하마 등 카리브해 3개국 순방에 나섰다. 이들의 방문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즉위 70주년과 자메이카 독립 60주년에 맞물려 이뤄졌다. 하지만 왕세손 부부는 자메이카 방문을 앞두고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두 사람의 방문을 앞두고 자메이카 정치인, 교수, 기업인 등 각계 인사 100명은 영국의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이들은 지난 20일 서한에서 왕세손 부부의 방문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언급하며 “우리는 당신 할머니와 그 전임자들이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인권 비극을 영속시켰기 때문에 여왕의 즉위 70주년을 축하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또 “당신의 할머니는 70년간 영국이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고 인신매매를 일삼은 것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고, 우리 조상들의 고통을 바로잡고 속죄하기 위한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며 여왕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영국 왕실이 사과해야 하는 이유 60개를 나열하며 “자메이카 국민과의 관계를 재정의할 마음이 있다면 사과하고 속죄와 보상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촉구했다.

영국 왕실의 사과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이들도 있었다. 알자지라에 따르면 수십명의 시위대가 22일 수도 킹스턴에 위치한 영국 고등위원회 밖에 모여 영국의 사과를 촉구한다는 뜻의 ‘seh yuh sorry’ 문구가 쓰인 현수막을 내걸었다. 이날 집회에 참가한 후제 허친슨(27)은 본인이 아프리카인의 후손이라 밝히며 “나는 영국 왕실이 아프리카인들에게 큰 범죄를 저질렀고, 그들이 내 조상들로부터 빼앗은 것을 사과하고 돌려줘야 한다는 것을 인식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영국은 1655년부터 자메이카를 식민지로 삼고 17~18세기엔 자메이카를 중심으로 대서양 노예무역을 주도했다. 자메이카 국립도서관 자료에 따르면 당시 약 1000만명에서 2000만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카리브해 연안국으로 강제 이송됐으며, 자메이카로 이송된 이들은 60만명에 달했다. 이들은 영국이 1834년 노예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하기 전까지 사탕수수 농장에서 가혹한 체벌을 받는 등 끔찍한 노동환경에서 강제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자메이카는 지난해 7월 영국에 노예무역에 대한 76억파운드(약 12조2500억원) 규모의 배상금 지급을 청구할 것이라 밝혔다. 이는 영국이 1834년 노예제를 폐지하면서 흑인 노예 소유주들에게 지급한 2000만파운드를 현재 가격으로 환산한 금액이다. 영국 정부는 이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기 위해 당시 거액이었던 2000만파운드를 대출받았고 지난 2015년에야 겨우 이자 상환을 마쳤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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