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계산법은 틀렸다

2019.04.16 17:20 입력 2019.04.16 20:48 수정
이대근 논설고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비핵화를 말하던 그의 입에서 “핵무장력의 급속한 발전”이 튀어나왔다. “남조선 당국은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하지 말라는, 무례한 언사도 있었다. 지난 12일 김정은의 날카로운 시정연설은 어느새 화해의 언어에 익숙해진 우리의 귀에 화살처럼 박혔다. 하노이 실패가 그에게 안겨준 좌절감의 반영일 것이다.

[이대근 칼럼] 김정은 계산법은 틀렸다

그 기분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남쪽에 화풀이하는 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남쪽으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제사회와 미국을 향해 대북 제재 완화와 남북 경제협력을 허용해달라고 여러 차례 호소했다. 김정은의 수석대변인이라는 모욕을 당하면서까지 그렇게 한 이유는 그런 성의에 북한이 일부 비핵화 조치로 화답하면, 제재 완화·남북경협 예외 인정을 받아낼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김정은은 왜 경협을 못하느냐고 문 대통령의 등을 떠밀었지만, 애초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경협 여부는 문 대통령이나 국제사회가 아니라, 김정은의 행동, 즉 비핵화 조치에 달려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남한이 미국에 쓸 카드를 손에 쥐여주지도 않았다. ‘영변 핵 폐기와 상응 조치’는, 하노이에서 확인한 대로 좋은 카드가 아니었다. 김정은은 폐기 대가로 전면 제재 해제와 다름없는, 거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걸 원했으면서도 문 대통령에게는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트럼프를 만나 그 카드를 불쑥 내밀었다가 거절당하는, 하노이 실패를 자초했다. 미리 남한과 협의했다면, 피할 수 있었던 실수를 한 것이다.

김정은의 실수는 그뿐 아니다. 그는 미국의 태도가 마음에 들면 남북 합의 사항을 이행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지 않았다. 남북관계를 미국의 태도에 종속시킨 것이다. 김정은은 시정연설에서 ‘외세 의존’ 운운하며 남한을 비난했지만, 남북관계를 미국에 종속시킨 쪽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는 비핵화와 관계없는 남북 교류·협력도 유보했다. 그건 남한을 대미 압박의 지렛대, 혹은 도구로 이용할 생각을 했을 때나 가능한 태도였다.

김정은은 지난 11일 한·미 정상회담 핵심 의제가 북한의 단계적, 동시적 해결 방안과 미국의 일괄타결안의 절충인 줄은 알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사전 남북 접촉을 통해 미국을 설득할 묘수를 함께 짜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사전 접촉을 피했을 뿐 아니라, 한·미 정상회담 결과가 발표된 12일 시정연설을 통해 ‘제재 해제 집착 않는다’ ‘조건부 3차 북·미 정상회담 용의 있다’는 내용을 일방 발표했다. 그러고서도 어떻게 문 대통령에게 “우리의 립장과 의지에 공감하고 보조를 맞추”라고 당당할 수 있나?

김정은은 트럼프에게도 진지하지 않았다. 트럼프를 유인해 참모로부터 떼어낸 뒤 타결지으려는 얕은수를 썼다. 그런 계산법은 결국 하노이에서 통하지 않았지만 성공했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합의가 보장되고 이행되려면 야당인 민주당, 미국 의회, 미국 여론의 지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이 모든 상대를 설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협상할 생각을 말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북한이 손에 쥔 것은 막연한 약속 하나, 허술한 방법 하나뿐이다. 점점 사람들이 의심하기 시작한, 완전한 비핵화. 그리고 완결성을 결여한 단계적, 동시적 해법. 이 둘의 한계는 하노이 회담 이후 북·미 간 논쟁 과정에서 다 드러났다. 그럼에도 최종 단계가 어떤 것인지 북한은 아직도 설명을 못하고 있다. 일단 출발하면 ‘그곳’에 갈 수 있다지만, 외부세계는 그곳을 전혀 볼 수 없다. 그 누구도 올바른 경로인지 확인도 않고 무작정 길을 나서지는 않는다.

최종 단계에 관한 모호성은 협상력을 높이려는 북한의 전략일 수도 있다. 상대가 비핵화 약속을 믿는다면, 그 전략은 쓸모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의심받는 상황에서는 전략적 이익이 없다. 북한이 주장하는, 신뢰 수준에 맞는 단계적 비핵화도 마찬가지다. 말인즉 옳지만 핵협상은 비핵화 약속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최종 단계의 부재로 비핵화는 믿기 어려운 일이 됐고, 그 때문에 신뢰는 거의 바닥났다. 신뢰가 없어 모호성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그 모호성 때문에 신뢰가 훼손된 것이다.

김정은은 “미국이 지금의 계산법을 접고 새로운 계산법을 가지고” 나와야 한다고 했다. 김정은 말대로 일괄타결의 미국 계산법은 바꿀 필요가 있다. 그러나 미국 계산법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김정은 계산법을 바꿔야 한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