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전위(前衛)와 1970년대

2013.09.27 20:06 입력 2013.09.27 23:03 수정
김성환 |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불온’한 예술, 유신의 ‘피고’가 되다

■ 변혁의 풍문과 예술

전위(前衛)란 군대에서 한 발 앞서간 선발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전선에서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간 이들은 목숨을 대가로 전황을 살피고, 이로써 부대 전체의 운명을 좌우한다. 20세기 예술의 전위들은 인간성을 의심하게 만든 전쟁의 충격을 극복하고 새로운 희망을 찾기 위해 관습의 벽을 넘어섰다. 특히 전후에 전위예술은 인간의 보편성을 향해 경계를 넘어선 만큼 국경을 넘어 급속히 퍼져나갔다. 1960년대 서구 사회를 뒤흔든 일련의 사태와 예술은 ‘68혁명’으로 불리는 인상 깊은 정신사적 장관을 만들었다.

사회 전반을 뒤흔든 청년문화의 여파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도 다다랐다. 그러나 한국에 건너온 서양의 사정들, 특히 히피문화 같은 낯선 문화가 오롯이 이해되기는 힘들었다. 청년들이 해괴한 복색을 갖추고 난잡한 관계를 맺고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로 유흥을 즐기는 모습은 한국의 기성권력에게는 난동 정도로만 보였으며, 반응은 고대 벽화에서도 적혀있다는 ‘젊은 것들’에 대한 지탄에 그쳤다. 아니면 ‘나체’ ‘프리섹스’의 이름이 붙은 선정적 화보 뒤에 숨겨졌는지도 모른다. 몇몇은 이를 두고 ‘스튜던트 파워’, 젊은이들의 반항, 혹은 현대사회의 고독과 소외감 같은 학구적 해설을 붙였지만, 청년들이 추구했던 사상의 실체와 사회에 끼칠 영향력을 엄밀하게 진단해내지는 못했다.

당시 서구의 급진적인 변화상을 충실히 지켜보았던 이는 영화감독 하길종이었다. 그가 영화학과에 유학하던 1960년대 말의 캘리포니아는 한창 히피문화가 맹위를 떨치던 곳이었다. 그는 이 광경을 새로운 매체, 즉 영화의 문법으로 번역하려 했다. 그는 퇴폐적으로 보이지만 그만큼 전위적 히피의 문화가 말하려는 것에 진지하게 귀 기울인 몇 안되는 한국인 중 한 사람이었다. 하길종은 마약과 사랑에 찌든 히피들에게서 변혁의 희망을 읽었다. 히피 문화를 통해 권력의 억압과 그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저항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벌거벗은 화보의 주인공으로 변형되든, 청년들의 치기로 보이든 상관없이 하길종은 변혁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영화가 국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언어임을 깨달은 그가 문학 대신 영화를 선택했다. “방법은 다르더라도 우리 땅에도 미국의 젊은이들의 생각을 한국의 젊은이들은 어떤 다른 방법으로 나타내기를 시도하고 있는지 모른다. 또 오늘날 모든 국가적 종교적인 울타리를 떠나 젊은이들의 생각은 항시 빠르게 소통되고 같은 것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장발과 기타와 마약의 세대’ <세대>, 1971·7)고 판단한 그는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길로 나아갔다. 하길종이 추구한 영화는 새로운 소통을 위한 인식 자체로서 이전 영화와는 전혀 다른 종류였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 이를 실천했고, 한국 영화계를 들쑤시며 충무로의 두통거리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기존 영화에서 한 발 앞으로 나아간 사람이었다.

1970년 광복절에 제4집단은 사직공원에서 모여 태극기와 백기, 꽃관을 들고 ‘문화의 독립’을 외치며 한강으로 향했다. 제4집단 이 기획한 ‘기성문화예술인의 장례식’은 지금 서울시청 부근에서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붙잡히며 중단됐다. 당시 ‘선데이서울’은 ‘관 메고 예술하니 경관이 웃기지마’라는 제목의 가십 기사로 다뤘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미지 크게 보기

1970년 광복절에 제4집단은 사직공원에서 모여 태극기와 백기, 꽃관을 들고 ‘문화의 독립’을 외치며 한강으로 향했다. 제4집단 이 기획한 ‘기성문화예술인의 장례식’은 지금 서울시청 부근에서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붙잡히며 중단됐다. 당시 ‘선데이서울’은 ‘관 메고 예술하니 경관이 웃기지마’라는 제목의 가십 기사로 다뤘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전위, 한국에서 한 걸음 내딛다

새로운 예술 양식은 기존 질서에 도전하고 논란을 일으킨다. 특히 세계사의 격변 지점에서 생겨난 청년의 예술 양식은 그 자체로 도전일 수밖에 없다. 1970년대 한국 미술계도 이 도전과 맞닥뜨린다. 추상미술과 구상미술의 대립이 기존 체제 속에서 공전하는 상황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전위예술은 퍼포먼스, 행위예술, 해프닝, 대지예술 등의 낯선 형식을 통해 등장했다. 이는 미술 양식상의 문제가 아니라 1970년대라는 시대에 대응하는 인식과 실천의 문제였다.

백남준은 일찍이 이 흐름을 선도한 한국인이다. 백남준은 플럭서스의 일원으로 해외에서 이름을 날렸지만 한국에서는 다루기 곤란한 인물이었다. 차이코프스키 음악제에서 2위를 수상한 정명훈이 훈장을 받고 카 퍼레이드를 벌인 것에 비한다면 백남준은 명성에 한참 모자란 대접을 받았다. 백남준은 해외토픽이나 단신을 통해 알려졌으며, 나체 공연으로 경찰에 검거되었다는 소식으로 사회면에 등장하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인이 귀했던 시절에도 백남준의 소식은 정신병자인지 예술가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평가와 함께 주로 해외에만 머물렀다.

전위적인 시도가 따돌림 받은 것은 국내 작가들이 세계적인 흐름을 외면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하길종이 목격하고 백남준이 실연한 예술의 전위성은 한국에서도 꾸준히 시도되었다. 1970년 창단을 선언한 행위예술 그룹인 ‘제4집단’은 한국에서 예술의 전위를 시도한 보기 드문 사례이다. 김구림, 정찬승, 손일광, 정강자, 방거지, 김벌래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참여한 제4집단은 인간 해방과 한국문화 독립을 선언하며 본격적인 전위적 실험에 나섰다. 창단 이전부터 제4집단의 구성원들은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한국미술대상전에 출품한 작품의 무단 철거나 보디 페인팅, 해프닝 등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이들은 1970년에 이르러 본격적인 활동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들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경계를 넘어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점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들이 첫 걸음에 만난 것은 대중의 무관심과 권력의 힘이었다. 1970년 광복절, 제4집단은 창단 두 번째 퍼포먼스로 ‘기성문화예술과 기존체제의 장례식’을 치른다. 흰 깃발을 선두로, 모래를 채우고 꽃으로 장식한 관을 메고 뒤이어 삽을 들고 뒤따르던 행렬이 광화문에 이르렀을 때 경찰은 이를 가로막고 묻는다.

경찰: 당신들은 도대체 무슨 예술을 한단 말이오?

답: 우리가 하는 것은 해프닝이라고 합니다.

경찰: 해프닝이라는 건 또 뭔데?

답: 즉흥예술인데 지금 우리들은 이 재료를 가지고 작품 발표를 하려는 것입니다.

경찰: 이게 관이지 어째서 작품입니까?

답: 모래와 꽃입니다. 작품의 재료가 됩니다.

경찰: 뭐요?

답: 대지예술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들은 모든 기성의 문화예술에 반기를 드는 겁니다.

(‘주간여성’, 1970년 8월26일자)

여기 등장한 경찰은 무관심한 대중의 얼굴 중 하나였다. 사실 제4집단을 포함한 전위예술은 주류 언론으로부터 외면당했다. 그들의 활동이나 공모전에서 철거당한 수모는 신문보다 주간지가 더 적극적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주간지의 관심은 옷을 벗었다거나 경찰에 끌려갔다거나 하는 사소한 데 집중되어 선정적인 흥미만을 부추겼을 뿐이다. 이보다 더 가혹한 것은 권력의 반응이었다. 제4집단은 중앙정보부로, 경찰서로 불려다녔고, 주변인물마저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백기를 든 것이 북괴를 향한 항복이냐”는 취조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어느새 체제를 위협하는 불온의 혐의를 쓰게 된 것이다. 제4집단은 권력의 탄압을 거치면서 결과적으로 예술의 전위성이 억압과 저항이라는 주제와 직결될 수 있음을 몸소 실천한 셈이다.

박정희 정권은 단발령 같은 억압적·폭력적 조치로 예술인들의 전위를 무력화시켰다. 단속에 걸려 노상에서 강제 이발 당하는 장발족들의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박정희 정권은 단발령 같은 억압적·폭력적 조치로 예술인들의 전위를 무력화시켰다. 단속에 걸려 노상에서 강제 이발 당하는 장발족들의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유신이라는 침대

제4집단이 불온의 혐의를 쓴 이상, 권력의 대응은 가혹했다. 퍼포먼스 직후 내무부는 이내 사회풍조 일소방안을 마련하여 전위예술을 직접 겨냥했다. ‘전위미술(나체그림, 보디페인팅, 나체쇼, 음화), 전위연극(거리에서의 연극, 성행위 연극 및 실연), 전위의상(종이나 비닐재료를 사용한 것, 누더기옷 입기, 과다노출 활보), 전위영화(극, 줄거리 없는 영화나 도색영화)’ 등 거의 모든 예술에서 전위적인 것이 금지되었고, 제4집단을 포함한 히피족, 장발족은 물론 남자 미장원까지 단속 대상이 되었다. 장발가수 조영남의 출연분이 통편집된 것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장발 단속이 시행된 게 1970년 8월29일이었다. 장발이라면 외국인도 입국이 불허될 정도였으니, 제4집단의 여파는 상상 이상이었다.

억압은 갈수록 증폭되면서 197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1976년에는 급기야 대통령이 직접 나서 “우리 문화를 오염시키는 외래문화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택할 것은 택하고 퇴폐적이고 백해무익한 것은 과감하게 버리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며 “전위 예술인이니 하면서 대담하게 하는 것이 머리가 앞선 사람인 것처럼 아는 풍조가 있는데 이는 위험하다”는 지시를 내렸다. 전위는 이제 예술 양식 논란에서 벗어나 체제와 권력에 대한 도전이자 불온의 실체가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 전위는 완전히 사라질 처지에 놓인다. 제4집단의 주축이었던 김구림이 일본으로 떠난 뒤, 또 다른 멤버 정강자가 칵테일바의 마담이 되었더라는 주간지 기사만이 후일담으로 남았을 뿐이다.

1970년대 벽두부터 단발령의 폭거를 이끌어낸 전위는 유신정권이 얼마나 민감하고 폭력적인 촉수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증명한다. 대통령이 가리킨 ‘우리 문화’는 역사적 실제와도 거리가 먼 것이었다. 황병기의 ‘미궁’은 말할 것도 없고 전통 연희에서 출발한 가면극이나 사물놀이도 불온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단속 대상에서 보듯 가장 큰 문제는 예술을 성립시키는 매체 자체가 금지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내용과 형식은 물론 소재와 소통 방식마저 문제 삼을 때 예술은 그 자체를 잃을 수밖에 없다. 창조적 소통을 위한 매체의 가능성을 폐쇄하고 오직 ‘한국적인 것’ 하나만을 강요한 것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다를 바 없는 폭력이었다. 정해진 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것은 무참히 잘라내고 추방해야 하는 것이 한국적인 것의 정체였다.

1975년 전후 상황은 급격히 악화된다. 대마초 파동을 기화로 벌어진 정화운동, 사회풍조 일소의 이벤트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문화계 전반에 들이댄 형국이었다. 바니걸스가 토끼소녀로 창씨개명할 만큼 억압은 집요했다. 제4집단이 억압의 도화선이 된 후 유신체제의 문화 예술은 1970년대 내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 상황을 몸소 겪고 있던 하길종은 스스로를 피고인으로 불렀다. 억압의 대상이면서 무기력한 처지를 자조한 피고인이라는 말은 이 시기 예술가에게 무척 잘 어울렸다. 이들의 혐의가 벗겨지는 데는 한참이나 걸렸다. 백남준은 1984년이 되어서야 돌아올 수 있었지만 예술가들의 피소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확언하기 어렵다. 지금도 권력은 예술을 피소하고, 자기검열의 기제가 또 다른 피고인을 만들고 있지 않은지 유신시대의 예술가를 보면서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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