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고 장준하 선생 부인 김희숙씨 “밤에 몰래 쌀·김치 넣어준 걸로 끼니 해결… 이사만 30차례 넘어”

2012.08.24 19:48 입력 2012.08.27 10:12 수정

지난 21일 오후 4시30분 김희숙씨(86)가 살고 있는 서울 일원동의 임대아파트를 찾았다. 맨 꼭대기 18층에 있는 집은 방충망이 쳐져 있고 문은 열려 있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바람길을 터놓은 것이다. 오면서 본 옆집도 그 옆집도 문이 열려 있었다.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20만원. 22평의 허름한 아파트에는 방 2개와 화장실이 있었다. 작은 거실에 오래 쓴 듯한 식탁과 세간 몇 가지가 보였다. 2인용 소파에 앉았다. 거실 맞은편 벽에 장준하 선생(1918~1975)의 생전 사진을 담은 액자와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남편이 돌아가신 후 매일 기도했어요.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신께 빌고 또 빌었지요. 이렇게 남편의 유골에서 타살의 결정적 단서가 나왔다니, 하늘이 무심치 않구나 싶어요. 37년의 모진 세월이 바로 엊그제 같아요.”

남몰래 삭였던 피울음과 신산했던 삶이 주마등처럼 스친 것일까.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의문사한 장준하 선생의 부인은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난 1일 파주 통일동산으로 이장하며 검안한 남편 유골에서 지름 6~7㎝의 원형 상흔이 발견된 흥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추락사했다는 남편의 유골에서 새롭게 타살 정황이 공개된 것이다.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씨가 지난 21일 서울 일원동 자택에서 37년 전 남편이 의문 속에 죽고 3남2녀와 함께 힘들게 살아온 세월을 회상하다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씨가 지난 21일 서울 일원동 자택에서 37년 전 남편이 의문 속에 죽고 3남2녀와 함께 힘들게 살아온 세월을 회상하다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 어린 막내가 배고프고 힘들다고 할 때
아버지가 큰 유산 남겼다고 하면
그 유산 지금 먹으면 안되냐고 하기도

▲ 억울한 죽음 진실 밝혀달라 매일 기도
타살 단서에 하늘도 무심치 않구나 싶어
이번에야말로 진상 규명되면 좋겠어

“그날은 남편이 산에 가려던 날도 아니었어요.”

김씨는 김용덕씨(호림산악회 회장)와 김용환씨(현장 목격자)의 강권으로 남편이 등산을 했다가 변을 당했다고 했다. 평소 백기완·이철우씨나 재야동지들과 자주 산을 다녔던 남편이 그날은 더워서 집에서 쉬기로 했으나, 세 번이나 전화를 건 김용환씨의 권유에 못 이겨 산행에 나섰다는 것이다.

“오후 1시쯤 누군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 ‘장 선생님이 크게 다쳤습니다’라고 말했어요. ‘네?’ 하고 물으니까 ‘산에서 다쳤습니다’ 해요. 어딘지 모르니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요. 겨우 포천의 이동파출소에 도착하니 오후 4시예요. 상황을 모르고 있던 순경과 택시를 타고 현장으로 추측되는 곳에 내려 부랴부랴 산을 올라가 보니 남편이 큰 바위 평평한 곳에 누워 계셨어요. 산에서 떨어진 분 같지 않았어요. 귀 뒤쪽에서만 피가 나왔고 모습이 너무도 멀쩡했어요. 타살이라는 직감과 함께, 올 것이 왔구나 싶었어요.”

80을 훌쩍 넘긴 김씨의 얼굴은 세파에 시달린 사람답지 않게 곱고 온화해 보였다. 어지럼증과 심장병이 있고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가슴에 쌓인 얘기가 많으시죠?”

함께 사는 장남 호권씨(63·아래 사진 왼쪽)는 기자에게 “조금 크게 물어달라”고 말했다. 김씨는 곧 남편을 처음 만났던 1938년 얘기부터 풀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평북 정주가 고향이고 남편은 평북 의주 출신이에요. 외삼촌이 정주에 ‘신안소학교’를 설립했는데 남편이 교사로 왔어요. 나는 학생이었고 남편은 우리 집에서 하숙을 했어요. 당시 부자였던 외가에는 폭우가 쏟아지는 궂은 날이면 거지 행색의 남자들이 찾아오곤 해 이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독립군들이었어요. 시댁도 말을 타고 1주일 돌아야 다 밟을 만큼 큰 땅(117만평)이 있었지요. 하지만 남쪽으로 내려올 때는 양가 모두 가진 게 없었어요.”

김씨는 “만난 지 3년 후에 남편이 일본 유학길(도쿄대 철학과-일본신학교)을 떠났고 43년 겨울 학도병 징집 통지서를 받고 고향에 돌아와 결혼을 했다”며 “내가 17살 때였다”고 말했다. 일본이 처녀들을 위안부로 마구 잡아가자 어른들이 서둘러 결혼시켰다는 것이다.

혼인한 지 일주일 만에 중국에 끌려간 남편은 1944년 7월 일본군에서 탈출해 김준엽씨(전 고려대 총장) 등과 함께 2400㎞를 걸어 충칭에 있는 광복군 본대에 합류했다.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미 정보기관(OSS)의 특수게릴라 훈련을 받다가 해방을 맞았고,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한 뒤 김구 선생의 수행비서로 일했다. 김씨는 “서울에 도착한 남편의 전갈을 받고 김활란 박사 어머니와 함께 소를 타고 의주에서 내려왔다”고 말했다.

부부의 삶이 전환점을 맞은 것은 1953년 피란지 부산에서 월간 ‘사상계’를 창간하면서라고 했다. 이승만 정권을 규탄한 ‘사상계’는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원고 청탁·교정·제작·배본을 도맡았던 남편은 급할 때는 아내의 손도 빌렸다.

“사무실도 없어 저는 당시 영도다리 밑 ‘리더스 다이제스트’ 사무실의 망가진 책상을 빌려 쓰고 다방이나 공원에 앉아서도 원고 교정을 봤어요. 동판 찍는 것은 외상이 안돼 제 겨울코트를 팔아 찍기도 했지요. 그렇게 나온 잡지를 리어카에 싣고 남편은 끌고 저는 밀면서 광복동 동아서적에 도매로 넘겼어요.”

1958년 ‘사상계’에 실린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이 필화사건에 휘말렸다.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됐다. 남편의 펜 끝은 그 후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을 향했다. 한·일 수교협상, 베트남 국군 파병을 통렬히 비판했다. 군사정부는 국가원수 모독죄 등 혐의를 씌워 1966년과 1967년 남편을 구속시켰다. 그러나 남편은 굴하지 않고 1967년 6월 7대 총선에 신민당 후보로 서울 동대문(을)구에서 출마해 압도적 지지로 옥중 당선됐다. 군사정부는 결국 부정부패를 폭로한 김지하의 시 ‘오적’을 실은 빌미로 1970년 ‘사상계’를 폐간시켰다.

[인터뷰]고 장준하 선생 부인 김희숙씨 “밤에 몰래 쌀·김치 넣어준 걸로 끼니 해결… 이사만 30차례 넘어”

“아들 셋에 딸 둘. 집에는 먹는 입이 많았지만 남편에게 생활비를 받아본 기억이 없어요.”

김씨는 ‘사상계’가 날개 돋친 듯 팔리던 시절에도, 남편이 국회의원 배지를 달던 시절에도 항상 생활은 궁핍했다고 했다. 1962년 남편이 서울 신촌에 집을 지어 석 달간 살아본 게 ‘내 집’의 전부였다. 군사정부가 ‘사상계’에 세금을 퍼부으면서 빚을 지고 그 집에서 쫓겨난 뒤로는 월세를 전전했다(15년째 살고 있는 지금의 임대아파트는 1991년 정부가 장 선생에게 뒤늦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면서 입주권을 받게 됐다).

“한번은 저도 가계부라는 것을 써보고 싶다고 하니, 얼마 후 생활비라며 봉투를 줬어요. 너무 좋아서 가계부를 만들었는데 이튿날 남편이 돈을 꿔달라는 거예요. 없다고 했더니 ‘어제 준 것 있잖아요’ 해요. 남편은 그 돈을 친구 아들의 등록금으로 줬어요. 결혼식 주례를 서고 받은 양복지도 어느 날 찾아보면 사라지고 없어요. 남편이 저 모르게 형무소에서 나온 제자나 어려운 이웃에게 준 거예요. 제가 바느질집에 가서 일하고 외상도 하면서 겨우 살림을 꾸려가고 있는 터라 서운해하면, 남편은 ‘내가 밥은 굶기지 않을게. 미안해요’라고 했어요.”

남편은 집에서는 정치와 바깥 얘기를 하지 않았다. 걱정하는 말을 하면 “몰라도 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당신은 집의 대통령이니까 아이들을 잘 돌보세요”라고만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 일을 품고 살던 남편은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1974년 1월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구속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그해 12월 심장협심증과 간경화 증세 악화로 형집행정지를 받고 나와 재야세력 결집에 힘쓰던 중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경찰은 실족사로 처리했고 유신독재의 서슬에 언론도 입을 다물었다.

시련은 길고 모질었다.

“아버지 죽음의 의혹을 밝히겠다고 동분서주하던 큰애(호권씨)는 괴한들에게 테러를 당해 턱뼈가 조각나 석 달간 병원 신세를 졌고, 집 주변에는 기관원들이 깔려 있었어요. 8년간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생활을 해야 했지요. 집주인이 ‘제발 나가달라’고 했을 정도예요. 아이들이 해코지당할까봐 늘 조마조마하면서 산 탓에 심장병까지 생겼지요.”

옆에 있던 호권씨가 입을 열었다.

“취직도 원천봉쇄당했어요. 아는 분들을 찾아가서 취직을 부탁한 다음날이면 정보기관에서 그 회사에 압력을 가했어요. 아는 사람이 보다 못해 자신의 서점에서 일하도록 해줬지만 석 달 만에 저 스스로 나왔어요. 기관원들이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주인에게 ‘세금은 잘 내느냐’는 식으로 괴롭히는데 도저히 미안해서 못 있겠더라고요.”

수입이 없으니 연탄 살 돈이 없어 겨울에는 냉방에서 떨었다. 그보다도 끼니 해결조차 어려운 날이 많았다. “힘들었던 시절, 그래도 몰래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야밤에 누군가 몰래 담장 너머로 던져놓고 간 쌀이나 고기 한 덩어리가 있기도 했고, 우릴 감시하던 형사가 보기 딱했던지 김치 한 포기를 놓고 간 적도 있었지요.”

김씨는 “사람을 시켜 쌀 한 가마니를 몰래 보내준 김옥길 당시 이대 총장은 이튿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며 “기관 사람들은 김 총장에게 ‘장준하의 집에 쌀을 준 것은 곧 유신에 반대하는 것’이라는 기괴한 논리를 폈다”고 회고했다.

“나중에는 흉가를 찾아 세들기도 했어요. 사람들이 기피하니 월세도 싸고 주인 타박도 적을 테니까요. 자주 쫓겨나는 바람에 이사만 서른 번 넘게 다녔지요. 나중엔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며느리는 친정집에서 살기로 하고 여섯 식구가 남산 밑 여관의 방 한 칸에서 6개월간 살았어요. 라면만 먹었지요. 그러다가 살기 위해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어요.”

호권씨는 1979년 홀로 말레이시아로 야반도주했다. 한국에 있으면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고 아버지의 죽음도 언젠가 파헤칠 생각이었다고 했다. 막노동을 하며 버티다 1982년 정권이 바뀌어 ‘이젠 괜찮겠지’ 하고 귀국했다. 오산이었다. 그를 체포한 안기부는 재야인사와 운동권 학생들의 은신처를 대라고 추궁했다. 협조하는 척하다 감시가 느슨해진 틈에 그는 다시 싱가포르로 도주했다. 그렇게 24년을 해외에서 떠돈 후 2003년 한국땅을 다시 밟았다.

동생들이 걸은 길도 험난했다. 둘째 호성씨는 조선일보 기자를 하다가 쫓겨난 후 여러 직장을 전전했고, 셋째 호경씨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30년 가까이 불법체류자로 살아왔다. 넷째 호연씨는 결혼 후 제주도에서 살았으며 고교를 중퇴하고 방황하던 막내 호준씨는 호권씨 권유로 뒤늦게 신학대학을 나와 미국에서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유족에게까지 군사정부의 핍박은 길고 잔인했던 것이다. 호권씨의 생각은 날이 서 있었다.

“5·16 쿠데타 직후 ‘사상계’ 사무실에 박정희가 군인을 보낸 적이 있어요. 장 선생(그는 아버지를 장 선생으로 불렀다)은 박정희가 졸개를 통해 전달하려 한 수표를 눈앞에서 찢어버리고는 뺨을 후려쳤어요. 일본군 장교 출신인 것을 경멸했죠. 박정희는 김대중·김영삼씨는 정적으로 생각했지만 장 선생은 정통성과 사상까지 박정희의 가장 아픈 치부를 꿰뚫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어요. 장 선생의 뿌리까지 없애버리고 싶었겠죠.”

대화는 진상규명 문제로 이어졌다. 유족과 장준하기념사업회는 지난 20일 장 선생의 타살 의혹 재조사를 청와대에 촉구했다. 김씨는 호권씨에게 남편의 유골 검안 결과를 처음 듣고 “이제부터는 싸움이다. 시작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단지 박정희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박근혜씨에게 개인적인 사과를 받거나 책임을 추궁할 생각은 없어요. 다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라면 모든 백성의 아픔을 아우르고 진상규명이 필요할 땐 솔선수범해 적극적으로 해결에 나서는 자세와 입장 표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아버지 대(代)에 일어난 일을 국민들에게 자연스럽게 사과하는 것이고요.” 호권씨가 말하고, 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곗바늘은 어느덧 9시를 넘기고 있었다. 인터뷰한 지 4시간이 지났다. 어두워진 창밖으로 비가 퍼붓는 소리가 들렸다. 김씨가 거실 벽에 걸린 남편의 사진을 눈으로 쓰다듬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제 평생 가장 미안하고 마음 아픈 건 우리 애들이에요. 배 많이 곯게 하고, 하고 싶은 일도 못하게 하고 고생만 시켰으니까요. 남편에게 몹쓸 짓 했던 군사정부의 핍박이 아이들에게까지 오랜 기간 계속된 것이지요. 어린 막내가 배고프고 힘들다고 할 때 아버지가 큰 유산을 남겼다고 하면 그 유산 지금 먹으면 안되냐고 했어요. 저는 그 유산은 대대손손 쓰는 거라고 말해줬지요. 남편은 생전에 못다 이룬 민주주의를 완성하라고 지금 이 시점에 다시 나타나신 거예요. 이번에야말로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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