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59)기율부

2001.04.19 16:54

중학교, 고등학교 1, 2학년들은 누구도 무심히 학교의 교문을 들어설 수 없었다. 교문에는 아침마다 *기율부나 선도부라고 부르는 3학년 선배들이 보초를 서듯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기율부원들은 완장을 찼고 완장에 연결된 하얀 줄을 어깨에 감아 위압감을 더했다. 방과 후에는 선생님과 함께 순찰까지 도는 그야말로 학교사회의 막강한 ‘권력’이었다. 학교에서는 학기초 10여명의 3학년 학생들을 선발해 기율부를 구성했다. 기율부를 이끄는 학생주임은 보통 체육선생님이나 교련선생님이 맡았고 별명은 대부분 ‘독사’나 ‘미친 개’였다. 그만큼 학생들에게 악명을 떨치는 엄하고 무서운 존재였다.

학생들은 교문에 들어설 때 기율부원에게 우렁찬 구호와 함께 경례를 붙여야 했다. 구호는 ‘멸공’ 아니면 ‘승공’이었다.

당시 학생들은 삭발한 머리, 검은 *교복과 모자, 양철 단추, *이름표, 짧게 세운 목칼라에 배지, 학년 마크 등으로 차림새가 통일돼 있었다. 여학생들은 검은색·청색 바지나 스커트에 흰색 칼라, 단발머리를 하고 다녔다. 꽉 조이게 허리벨트를 하는 여학교도 있었다. 남학생들의 하복은 파란색이나 흰색 셔츠에 회색바지 일색이었다.

특히 검정색 일색인 남학생들의 동복은 학생들에게 무한한 인내심을 키우게 만드는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옷이었다. 교복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목주변의 빳빳한 칼라와 이를 잠그기 위한 호크였다. 그 안에는 속*칼라를 덧붙이고 다니게 되어 있었다. 검은색 일색의 교복에서 유일한 흰색인 이 속칼라가 살짝 목 밖으로 보이는 모습은 단정한 학생의 상징 같은 것이었다. 호크 양쪽으로 학교와 학년 배지를 달았다.

학생들은 그냥 맨살에 차가운 속칼라의 감촉을 느끼며 겨울을 나야 했다. 목이 답답하여 호크를 살짝 풀면 멀쩡했던 학생도 당장 은근한 불량기가 풍겼다. 목이 시려 *‘도꾸리’라도 끼어 입으면 호크를 잠글 길이 없었다.

중·고 표시가 돼있는 단추 다섯개도 모양이 뒤틀리지 않도록 반듯이 달아야 했다. 남학생들의 교모만 해도 단속할 거리가 무궁무진했다. 모자에는 교표, 챙, 모자를 두르는 하얀 띠 등 자질구레한 소품들이 달려 있었다.

그래도 한창 사춘기. 학생들은 학교에서 아무리 제약을 해도 교복과 모자에 무궁무진한 변화를 주면서 멋을 부렸다. 겉으로는 다 똑같아 보여도 제각각 창의력을 발휘해 개성을 표현했다. 다리미로 칼날같이 바지와 하복 셔츠에 줄을 잡고 다녔다. 불량스런 학생들은 선배에게 물려받은 낡은 모자의 앞부분을 눌러 교표를 가렸다. 모자 윗부분을 찢고 다니기도 했다. 챙을 꺾거나 속을 빼내 헐렁하게 만드는 아이들도 많았다. 모자 속에 볼펜심을 빙 둘러 끼워 일자 모자를 만들고 *‘평창’을 하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교문만 나서면 모자를 구겨서 가방에 집어넣고 칼라를 빼버린 뒤 호크와 상의 단추 한두개를 풀고 어깨를 한쪽으로 기울게 해 불량기를 과시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퇴색된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가방을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면 폼나는 것으로 알았다. 세월에 따라 나팔바지, 쫄바지, ‘스모르’ 바지 등도 유행했다. 여학생들은 무릎을 기준으로 한 치마 길이를 살짝 변형하여 교복을 상당히 육감적인 의상으로 바꾸는 재주가 있었다.

등교할 때면 교문 앞에 서있는 기율부원의 눈을 피해 옷을 바로잡고 모자를 바로 쓰고 학교에 들어섰다. 그래도 무엇이 걸릴지 몰라 항상 조마조마했다. 기율부 선배들에게 적발되는 날에는 몽둥이로 엉덩이를 맞거나 운동장을 몇바퀴 도는 것은 예사였다. 머리가 조금이라도 길면 머리 한중간을 ‘바리깡’으로 가차없이 밀어버렸다. 일명 고속도로였다. 교문 옆에는 매일 아침마다 열댓명의 아이들이 깍지를 끼고 엎드려뻗쳐를 하고 있었다.

지각 단속도 엄격했다. 기율부원들은 오전 8시만 되면 교문을 닫아버리고 쪽문에서 아이들을 붙잡았다. 학교 앞에서는 육중한 철문이 닫히기 전에 교문을 통과하기 위해 숨을 헉헉대며 뛰어가는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닫히는 교문을 가까스로 밀고 들어서면 운동장에 있던 아이들이 “세이프!”하며 박수를 쳐주기도 했다. 교문을 통과하지 않고 허술한 담장을 넘다 걸려 운동장 30바퀴씩을 도는 아이들도 있었다.

기율부의 대장격인 학생주임은 손때가 묻어 기름이 번들번들한 ‘정신봉’이라는 공포의 박달나무 몽둥이를 들고 다녔다. 기율부원이 하급생에게 가하는 체벌도 군대의 얼차려보다 절대 약하지 않았다. 원산폭격, 쪼그려뛰기, 운동장 돌기 등으로 시작하여 오리걸음, 선착순, 온몸 비틀기 등. 아침마다 “주먹 쥐고 엎드려” “대가리 박아” “동작 봐라” 등의 고함과 비명이 교정을 울렸다.

월요일 아침 운동장 조회 전 몽둥이와 단체기합으로 학생들의 군기를 잡는 일도 빠지지 않았다. 가끔은 갑자기 학생들을 운동장에 집합시키고 가방을 검사해 담배나 라이터, *플레이보이 등의 ‘불온서적’을 적발하기도 했다. 방과 후에는 영화관, 만화가게, 빵집 등을 돌아다니며 출입자들을 적발했다.

교복 자율화로 이제 그 시절의 교복은 역사 속의 골동품이 되었다. 교문에서 가방을 뒤지고, 머리 한가운데에 고속도로를 내고, 여학생들의 치마 길이를 재던 기율부의 풍경은 40대의 추억 속에나 남아있다.

▶그시절 이런말 저런말

*기율부

규율부, 학생부라고도 불렀다. 일제시대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요즘은 자율선도부 등으로 이름을 바꾸고 봉사 위주의 활동을 하는 학교가 많다.

*교복

교복은 학창시절의 유일한 제복이자 외출복이었다. 일본 군복을 모델로 한 제복으로 입는 것만으로도 고문인 특이한 디자인이었다.

*이름표

학생들은 교복 오른쪽 가슴에 직사각형이나 마름모꼴의 명찰을 달고 다녔다.

*칼라

얇은 플라스틱으로 목을 두르게 되어 있었다. 나중에는 실로 짠 칼라도 허용됐다.

*도꾸리

털실로 짠 옷.

*평창

모자에서 햇빛을 가리기 위해 내밀게 한 부분. 챙은 차양의 준말로 보통 ‘창’이라고 불렀다. 챙을 짧게 하고 휘어진 부분을 위로 꺾어 반듯하게 만든 것을 평창이라고 했다.

*스모르 바지

미군복을 검게 염색한 바지. 스몰이라는 이름은 미군복의 여러 사이즈 중 가장 작은 사이즈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플레이보이

미국에서 발행되는 대표적인 성인잡지. 학생들이 몰래 보곤 했다.

/김석종기자 s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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