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진 주머니, 두둑한 꿈 “무대에도 봄이 오겠지요”

2003.02.02 16:04

1980년대 이후 고만고만한 소극장과 공연장이 밀집하면서 우리나라 연극의 메카로 자리매김한 대학로. 매서운 바람이 불어닥치는 계절이면 대학로는 스산하기 그지없다. 관객이 줄면서 공연도 뜸해지다 보니 연극인들에게는 이래저래 춥고 배고픈 계절인 셈. 하지만 이 추운 겨울, 지하 연습실에서 봄을 준비하며 기지개를 켜는 이들이 있다.

대학로 후미진 골목에 자리한 다세대 주택 지하 1층. 여러 켤레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인 계단을 지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우선 대형 거울로 마감한 벽이 눈에 띈다. 스멀스멀 냉기가 올라오는데도 불구하고 두꺼운 매트 위에 정좌하고 앉아 희곡을 소리내어 읽는 ‘리딩’ 작업에 열심인 이들은 올해로 창단 17년을 맞는 극단 작은신화(www.freechal.com/littlemyth)의 견습배우들. 동인체제(고정 단원제)가 무너지고 난 대학로에서 작은신화는 여전히 동인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극단 중의 하나. 배우를 뽑는 과정이야 어느 극단이든 다를 리 없건마는, 작은신화에서는 견습배우를 뽑을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연기력이 아니라 한 식구로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다. “극단이 추구하는 연극관에 동의할 수 있는 이들을 뽑지요”. 연출가 반무섭씨의 말이다.

그렇게 해서 지난해 11월 오디션과 면접을 통해 견습배우로 선발된 이들은 모두 다섯명. 하나같이 연극에 대한 애정으로 충만해 있는 이들 대부분은 아직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20대. 가장 나이든 ‘견습 아닌 견습’은 긴 머리를 찰랑거리는 최지훈씨(30). 지방극단에서 8년 가까이 배우로 활동해온 최씨는 서울에서 활동하고 싶어 다시 오디션을 보고 ‘중고 견습’이 됐다. 고교시절 엑스트라로 참여한 연극에서 무대 위의 긴장감과 희열을 맛본 뒤 이를 인생의 목표로 삼게 됐다는 최지현씨(23), 훗날 여자배우라면 누구나 탐내는 ‘레이디 맥베드’를 맡아 멋진 연기를 펼쳐보이고 싶다는 김선영씨(23)는 대학 연영과 동기동창생.

그런가하면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박윤석씨(28)는 대학 연극반에서 활동하면서 연극인의 꿈을 키웠다. 고교때 배우의 꿈을 키우며 연기학원에 다녔다는 성동한씨(25)는 군제대 후 장사를 하다가 대학로에 발을 들여놓았다. 다섯명 중 성씨가 가장 연기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셈. 하지만 그 열정은 누구 못지않다. “연극이 너무 하고 싶어서 지난해 견습배우를 뽑기 전에 여기서 인턴으로 활동했어요. 공연을 참관하기도 하고 스태프로 일하기도 했지요”

일요일이면 비와 걸레를 들고 연습실을 치우던 이들이 본격적인 배우수업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지난달 초. 3주간 아침마다 모여 앞구르기와 뒷구르기, 물구나무서기 등으로 몸을 풀고 마임이스트의 지도하에 불이 되고 바람과 흙이 되었다. 유연성과 상상력을 기르기 위한 훈련인 셈이다. 오후에는 발성과 대사읽기 등을 연습해왔다.

요즘은 워크숍 준비로 한창 바쁘다. 다음달로 예정된 워크숍은 입단후 처음으로 무대에 올리는 공연. 연출자와 함께 여러 희곡을 읽어보다가 소수와 집단의 문제를 다룬 서사극, 막스 프리쉬의 ‘안도라’를 선택했다. 배우로서의 자질을 검증받는 시험대가 될 것이라 은근히 부담스럽다.

이제 입단 3개월째. 그렇다고 모든 것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 연극은 장기전. 앞으로 6개월 뒤, 모든 극단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들을 단원으로 받아들일 것인지의 여부를 투표로 결정한다. 이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나름의 방식으로 물의를 일으키거나 극단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이 탈락대상자다. 스무살이 훌쩍 넘은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경제력이 없는 데서 오는 부담감을 이기지 못한 채 중도에 뛰쳐나가는 이들도 있단다.

부모의 반대, 뻔히 보이는 배고픈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없지는 않을 텐데 이들이 연극을 계속하는 까닭은 뭘까. 연극이 왜 좋으냐는 우문에 견습배우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딱히 꼬집어서 뭐가 좋다고 말할 수 없어요. 그건 마치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데 왜 좋아하느냐라는 질문과 같은 거예요. 무엇인가를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감정 말고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을까요? 하고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행복할 뿐이지요”

꿈과 현실의 갈림길에서 꿈을 쫓아 택한 길. 비록 난로에 차디찬 연습실의 냉기를 잊고 저녁이면 소주 한잔에 고단함을 잊지만 스스로를 갈고 닦지 않으면 한순간 흐트러지고 마는 험난한 길. 봄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건실하게 살아가는 예비 연극배우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솔직한 배우가 되고 싶다는 그들에게서 풋풋한 봄냄새가 풍겼다.

/윤민용기자 artemix@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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