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못말릴 ‘식욕의 추억’

2003.07.01 18:47

“저… 거기가 김◇◇씨 댁입니까?”

“예, 맞는데요. 김◇◇씨는 제 남편입니다만…”

“저는 두달 전쯤 이곳으로 온 이○○라는 사람입니다. 혹시 라면을 어디서 살 수 있는지 아는가 싶어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왠 라면?’. 저녁 밥상을 막 물린 지난 일요일, 생면부지의 사람으로부터 라면 살 곳을 알고 싶다는 뜬금없는 전화가 걸려왔다. 30대 중반쯤 될성싶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시드니 인근의 한 대학에서 간호학을 전공한 후 이곳 타운스빌 종합병원에 취직이 돼서 단신으로 올라왔다고 했다. 한국 교민이 없는 곳에서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며 두달 남짓 낯선 도시에 정착하느라 정신이 없는 차에도 유독 라면이 먹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근데 우리 집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나요?”

밉살스럽게도 나는 내가 궁금한 것부터 챙겨 물었다.

“이 도시에서 제일 큰 회사가 한국 회사라고 들었어요. 거기로 전화해서 무조건 한국 사람을 바꿔달랬더니 휴일이라 집 전화번호를 주더라구요. 이 번호가 마침 댁의 번호네요”

그렇게 된 사연이었다. 먹거리 문화만큼 끈질기고 까다로운 것이 있을까. 우리 음식에 고집을 부리는 까탈스런 미각을 달랠 길 없어 염치불구하고 남의 집 전화번호를 돌려야 하는 그 심정을 이해하고 말고….

이민생활의 뿌리를 하루라도 빨리 내리기 위해 식구끼리도 영어만 쓰고 의도적으로 한인들을 멀리한다는 교민 가정이 더러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조차 한국 식품점을 들락거리고 식구들에게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이는 일에는 아주 열성적이라는 것이다.

오래 된 얘기지만 처음 이민을 와서 큰동서 댁에 신세를 진 적이 있는데 당시 벌써 10년 가까이 호주에서 살아온 조카아이들이 음식을 영어식으로 부르는 것이 흥미로웠던 기억이 난다. 고기를 ‘비프’니, ‘포크’니 하는 거야 기본이고 저희들끼리는 부침이나 전 종류를 ‘베지터블 팬 케이크’ 어쩌고 하는 것 같았지만, 유독 국만큼은 그대로 ‘국’이라고 부르는 것이 재미있었다. 주 음식이 나오기 전에 홀짝 먹어버리고 마는 수프와는 달리 밥그릇 옆에서 시종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국을 영어로도 어찌하지는 못한 것이다.

“라면은요, 아시안 슈퍼마켓에 가면 항상 있는데요”

“그래요?!”

열성으로 찾아 헤맨 그이의 노력에 비하면 내 대답은 싱겁기 그지없겠지만, 음성만 들어도 반가움에 달뜬 그이의 휘둥그레진 두 눈의 모습까지 선하게 들어왔다.

일상의 문화 가운데 식문화만큼 시·공간을 뚫고 과거와 현재를 한달음에 연결하는 매개도 드물다고 한다. 라면을 먹고 싶어하는 주체못할 ‘식욕의 추억’ 앞에서는 ‘바꿔, 다 바꿔’ 살고 싶은 나의 의지가 여지없이 무릎을 꿇고 마는 것을 어쩌랴….

〈신아연기자(호주 거주 칼럼니스트) ayoun-jinx@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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