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식의 밤과 인간 탐험]인사동 블루스(12)

2003.12.01 16:39

‘태풍이 부는 날은 소주병 차고 바닷가로 가요/그리고 잘 알지 못하는 클래식 음악을 들어요/바흐나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소나타가 좋을 것 같아요/미친 듯이 울부짖는 그 음악에 맞춰 춤추는 방풍림들을 보아요/내가 흔들리고 당신이 흔들리 듯 그렇게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파트너 삼아 우리 함께 춤춰요/사랑이니까/파도끼리 저렇게 밀려와서 부서지는 걸 보면 사랑하는 게 이런 거라니까요/자 마셔요/누군가의 목숨처럼 맑은 이 소주를/마시다 우리 함께 바닷속으로 걸어들어가 명태가 되고 말자니까요.’

김홍성 시인과 함께 결코 잊을 수 없는 여행을 한 적이 있다. 파키스탄 카라코람 히말라야의 막장에 자리잡은 길기트라는 산골도시였다. 먹을거리가 떨어져 이날 아침 김시인과 함께 장을 보러 나섰다. 묵고 있는 여관 안에 식당이 있었지만 식사값이 만만찮아 장을 봐서 해먹기로 한 것이다.

여관을 나와 큰 거리로 나섰는데, 우리 숙소에 근무하는 키 큰 관리인 아저씨가 죽을 힘을 다해 우리 쪽으로 달려오는 게 아닌가. 그가 고함을 쳤다.

“빨리 여관으로 도망쳐라. 빨리.”

영문을 몰라 “왜 그러느냐”고 물어도 그는 대꾸조차 않고 그냥 내뺐다.

김시인과 나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짐작해보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지금 우리가 여관으로 도망쳐야 할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무시하고 시장 쪽으로 몇 발짝을 떼논 순간이었다. 꺾어진 골목 쪽에서 갑자기 수백명의 인파가 몰려나왔다. 그들은 조금 전 이 관리인처럼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함성을 지르며 죽을 힘을 다해 내달렸다. 그리고 곧이어 ‘타다다-당’ 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도망가던 인파들은 기막히게 훈련된 유격대원들처럼 땅에 엎드렸다. 포복자세를 취한 그들은 해변에서 빠르게 돌아다니는 게처럼 이집 저집으로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모든 게 꿈만 같았다.

김시인과 나는 그들처럼 도망을 치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땅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때 다시 ‘투두두두…’ 기관단총을 난사하는 소리가 났고, 김시인 곁에 서 있던 포플러에서 나뭇잎과 나뭇가지가 우수수 하고는 떨어져내렸다.

이건 무슨 민방위 훈련이나 연습상황이 아니었다. 누군가 우리를 향해 총을 쏘아대고 있는 실전상황임에 틀림없었다.

순간,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을까. 뿐만 아니라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한 기억도 없다. 다만 그로부터 불과 몇 초후 김시인과 나는 여관 마당에 뛰어들었다는 기억뿐이다. 저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서는 터질 듯한 심장을 달래며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뒤이어 여관 입구에 굳센 철문이 내려졌다. 여관 주인은 투숙객 수를 점검한 뒤 모두들 방에 들어가 침대 밑에 엎드려 있으라고 했다. 그것은 여관 주인으로서의 당부사항이 아니라 소대장이 전투중 내리는 명령과 다름없었다.

김시인과 나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그의 명령과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근처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한 폭발음과 비명이 연이어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누가 누굴 공격하는 것일까. 카슈미르와 대치하는 인도군이 여기까지 쳐들어온 걸까. 아니면 중국 군대가 혜초스님처럼 파미르 고원을 넘어 파키스탄으로 침공해온 것일까. 김시인과 나는 온갖 궁리질을 해보았지만 뾰족한 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여관집 담장에서 수류탄이 터진 것도 그때였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집이 무너질 듯 진동했다. 40여미터 떨어진 정원의 서쪽 담장에 큼직한 구멍이 생겨버린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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