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황진이는 여권사상가?

2005.01.19 17:48

한국 역사에서 여류로 이름이 난 이는 신사임당, 허난설헌 그리고 황진이 등 몇몇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다 아시다시피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여성상으로, 여류시인인 허난설헌은 가부장적 남성사회에 저항한 행동거지로 각광을 받았다. 그런데 황진이는 이들과 달리 아름다운 기생 출신으로 시서화에 능숙해 시인 묵객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따라서 황진이는 ‘기생’이란 이미지를 빼고는 그녀의 삶을 이야기하지 않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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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예술적 재주가 있고 미모를 지닌 단순한 기생이었을까? 요즈음 북한의 어느 작가가 그녀를 소재로 한 소설을 써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런데 그 역사적 해석이 예전과는 달라 새로운 관심을 끌었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이런 경향의 해석을 시도해왔다. 한번 이 주제를 풀어보기로 하자.

-“어머니가 기생” “맹인 여자의 딸”-

조선사회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다. 유난히 적서(嫡庶)를 법제로 규정해 차별했다. 서자는 관료사회에서는 문과에 해당하는 과거를 통해 진출하는 데 제약을 받았고, 가정에서는 재산 상속, 제사 상속 따위에서 차별을 받았다. 이는 유교적 명분론에 토대를 두었다. 황진이는 양반의 서녀라 했다. 그녀가 비록 여성이었으나 적서의 차별에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곧 그녀는 관습에 따라 서자신분의 남성과 결혼해야 했던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설이 있다. 그녀의 어머니가 기생이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기는 하나 허균은 황진이를 개성 맹인 여자의 딸이라 했다. 아마도 이 설이 가장 맞을 것이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서경덕의 제자였다. 그러기 때문에 허균은 적어도 황진이를 만나보지는 못했을지 모르나 신상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는 들었을 것이다.

황진이가 만일 기생의 어머니를 두었다면 세습적으로 기생의 길을 걷는 것이 정도였다. 그녀가 기생의 길로 나선 동기는 동네 총각이 그녀를 그리워하다가 상사병에 걸려 죽었기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허균은 이런 따위의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

아무튼 그녀는 기생이 된 뒤 뭇남성을 농락했다. 그녀는 재주가 많았다. 시인 묵객들과 함께 한시와 시조를 읊으면서 음풍농월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실력이 있었고, 노래도 잘 부르고 거문고를 잘 뜯고 서화에도 능숙한 솜씨를 보였다 한다. 그러니 미모와 함께 최고의 기생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개성은 원래 부자가 많기로 소문이 난 곳이다. 처음에는 돈푼이나 있는 풍류객들이 그녀의 앞에서 놀았을 것이다. 차츰 소문이 나자 이름난 선비들과 고관대작들이 그녀의 앞에서 놀아났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사랑을 주었다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 오히려 일세의 명사들을 데리고 놀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이런 행동은 그녀의 한에서 나왔을 것이다. 남존여비의 세상을 비웃었다기보다 낮은 신분으로 인해 번듯한 남편을 맞이할 수 없는 풍토를 한탄했을 것이다. 그녀는 치마폭에서 뭇남성을 농락하다보니 거들먹거리는 남정네들이 보잘것없이 보였다. 그리하여 선승으로 유명한 지족선사를 파계시키고 나서는 이런 짓이 부질없다고 여겼다.

그녀는 송악산 아래에 서사를 열고 제자를 가르치는 서경덕을 찾아갔다. 허균은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에서 “황진랑이 평생에 서화담을 사모했다”고 썼지, 유혹했다는 글귀는 없다. 아마 그녀가 잠자리에서 서경덕을 유혹했다는 말은 세상 사람들의 흥미를 자아내려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녀는 자주 거문고와 술병을 들고 서경덕과 박연폭포 아래 넓은 바위 위에서 흥취를 돋우고 돌아갔다고 했다.

허균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늘 “지족선사는 30여년을 면벽(面壁)하면서 참선했는데 내가 흔들어 놓았다. 오직 화담선생은 여러해 동안 가까이 모셨지만 끝내 뜻을 어지럽히지 않으셨으니 참으로 성인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서경덕은 누구였던가? 그는 과거를 보아 성균관에 들고서도 모든 명리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평생동안 학문에 열중하고 찾아오는 제자를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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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기일원론(氣一元論)자였다. 곧 모든 사물은 기의 작용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어떤 움직일 수 없는 원리를 믿기보다 현상을 중시한 이론이다. 따라서 인간은 어떤 원리에 따라 귀천과 선악이 규정되어 있다는 주리론자와 인생관을 달리한 것이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타고날 때부터 누구나 평등하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곧 남녀의 구분이나 신분의 차별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기’의 바탕에서 구별짓는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황진이는 여러 처지와 정황으로 보아 이 논리에 매료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두 사람은 남녀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의 관계였으며 스승과 제자의 사이라기보다 도학자적 동지였을 것이다. 거문고만 타고 술만을 마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도담(道談)을 주고 받았을 것이다. 서경덕은 농담도 잘 하지 않는 도학자로 알려졌으며 어릴 때부터 학문과 궁리에만 열중하여 몸이 쇠약할 지경이었다. 여기에 무슨 잡담이 끼어들 틈새가 있겠는가?

서경덕이 죽은 뒤 그녀는 서경덕의 발걸음이 닿은 곳, 곧 금강산·태백산·지리산을 돌아다녔다. 또 틈틈이 서경덕의 시문을 모조리 읽었다고도 한다. 어느 때 나주에 이르자 마침 고을 원이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남루한 옷을 걸치고 얼굴에 때 자국이 묻은 그녀는 잔치자리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옷을 헤집고 스스럼 없이 이를 잡으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다. 여러 기생들이 이 광경을 보고 기가 죽었다 한다. 이런 모습은 천의무봉이 아닌가? 아니면 미추를 떠난 도학자의 진면목일 것이다.

-관습의 틀 깬 ‘선진여성’으로 재평가-

그녀가 죽을 때에 집사람들에게 “곡을 하지 말 것이며 상여가 나갈 적에는 북을 쳐서 즐거운 마음으로 인도하라”고 일렀다 한다. 또 무덤을 길가에 잡으라고 일렀다고도 한다. 이 유언을 따랐는지는 모르겠으나 왜 그랬을까? 인간의 통과의례의 종장은 장례이다. 그녀는 종장에서 상식을 뛰어넘었던 것이다. 특히 유교문화에는 죽음과 관계되는 장례를 가장 중요하게 보았다. 이를 거부한 것이다. 그녀가 인간세상을 원망한 것도 아니요, 저항의 몸짓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여러 시에서 나타나는 애끓는 원망과 한탄과 애증을 뛰어넘어 너무나 처절한 무저항의 몸부림을 보여 주었다.

이것이 도학자의 모습일 것이다. 여성이 인간다운 권리나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그녀는 인격의 승화를 보여준 것이 아니겠는가? 더욱이 양반, 상놈을 가리고 여성에게 굴레를 씌워 사회적 활동을 제약하는 풍토에서 그녀는 나름대로 자기 승화를 도모했던 것이다.

다만 그녀의 시는 여러 편 전해지나 사상과 이념을 담은 글은 한 편도 전해지지 않는다. 아마도 근엄한 남성주의자들이 그런 글은 읽을 것이 못된다고 팽개친 것이나 아닐지 모르겠다. 우리는 여성 질곡의 시대에 그녀의 사유와 행동거지를 바라보며 선진적 여권사상가라고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여성신장 상징 불구 기생신문 이유 ‘홀대’-

사람들은 흔히 개성의 명물로 삼절을 말한다. 하지만 누가 지어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한다. 또 허균의 말을 인용해보자. 황진랑은 서화담에게 늘 “송도에는 삼절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서화담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황진랑이 “박연폭포와 선생님과 저올시다”라고 말했다 한다. 허균은 “이 말이 비록 좋은 해학이기는 하나 그럴 만한 이치가 있다. 대개 송도에는 산수가 울연히 뻗어있어 인재가 배출되었다. 화담의 이학이 우리나라의 최고이다. 진랑 또한 여자 중에서 걸출하다. 곧 그 말이 망령되지 않음을 알 만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니 송도 삼절은 애초에 황진이의 입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뒷날 황진이를 말할 때에는 ‘삼절’이란 표현을 빼놓지 않고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거의 그녀를 유명한 기생으로 보았을 뿐이었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임제는 호방한 선비였다. 그는 좁은 조선땅에서 태어난 것을 한탄하고 좀상스런 인간군상에 환멸을 느껴 벼슬도 마다하고 술과 시로 세월을 보냈다. 그는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라는 시를 읊었다. 이 구절은 단순한 기생에게 바친 헌사가 아니었다. 대화를 나눌 동지가 없다는 의미가 강하게 풍긴다. 세상 사람들을 깔보는 임제가 일찍이 이런 찬사를 보낸 인물이 별로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런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개화문물이 들어와 여성들이 여권신장운동을 벌일 때 황진이는 자유연애를 구가한 여성상으로 부각되었다. 한편 여학교에서는 교내에서 여성을 상징하는 상을 주면서 신사임당상이라 했다. 신사임당을 현모양처의 표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근래 들어 현모양처는 어딘가 여권신장과 거리가 멀다는 인식이 팽배하면서 여학교에서 더러 허난설헌상이라 붙여 시상하기도 한다. 허난설헌은 여성이라서 소박 받고 남편의 방탕에도 반항하지 못하는 처지를, 시속에 드러내 한과 울분을 달랬다. 현재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이 태어난 강릉에서는 두 여성을 기리는 축제가 해마다 거행되고 있다. 허난설헌이 신사임당과 맞서고 있는 모습이다. 여권신장과 맞물려 나타난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황진이상은 여학교에서 거의 제정되지 않았다. 기생을 여성의 표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의식의 영향일 것이다. 부안 출신의 기생 이매창의 시비는 일찍이 부안 읍내에 세워져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개성에 황진이를 기리는 조형물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황진이는 소설로서만이 아니라 앞으로 더욱 각광을 받을 것이다. 더욱이 개성이 관광지로 개방되면 이런 분위기가 더욱 뜰 것이다. 개성으로 관광 가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박연폭포를 둘러보고 그녀를 회고해볼 것이다.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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