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작가회의와 민예총

2005.02.10 17:07

1987년 6월항쟁과 연이은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우리 사회를 밑바닥부터 뒤흔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혁명이 아니었다. 앙시앙 레짐(구체제)은 꼴만 바꾸었지 여전히 잔존했고, 새로운 전망을 논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실록민주화운동] 89. 작가회의와 민예총

12월의 대통령 선거는 그런 사실을 정확히 증명했다. 노태우는 스스로 ‘보통사람’임을 내세워 보수층을 결집해 나간 반면 민주진영은 김대중, 김영삼, 그리고 백기완을 각기 후보로 미는 분열 양상을 보였다. 결과는 참담했다. 노태우는 황새와 조개가 다투는 틈을 타 대통령에 당선됐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노태우와 극우보수 세력에게는 코앞으로 다가온 88서울올림픽이라는 기막힌 호재까지 있는 반면 민주 진영은 선거 패배의 후유증에서 쉽게 벗어날 기미를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문화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어제까지 한솥밥을 먹던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어쩌다 마주치게 돼도 얼굴을 돌렸고, 패배의 책임을 서로 떠넘겼다. 문화일꾼들 중 다수는 ‘비지’(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였지만, 양김의 단일화를 악착같이 촉구했던 이들도 적지 않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백기완을 민중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들도 세는 작아도 강력한 목소리를 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정권의 비민주성을 들어 88올림픽을 거부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지만, 그 또한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국민들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찻잔 속의 태풍’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시 한번 힘을 내자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문화운동 진영에서도 새로운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변화를 시도한 것은 문학이었다. 문학은 80년대 들어 가장 치열한 이론 투쟁을 벌여왔고, 창작면에서도 매우 활발하게 시대적 흐름에 대응해 왔던 분야였다. 그 중심에는 74년에 결성되고 84년에 재창립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가 있었다. 자실은 6월항쟁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이후 자실 내부에서는 조직의 새로운 변모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거기에는 청년세대를 실질적으로 이끌어오던 총무간사 채광석의 갑작스러운 죽음(87년 7월12일)도 일정하게 영향을 끼쳤다.

자실 창립을 주도했던 선배세대 문인들은 6월항쟁 이후 달라진 환경을 문학이 주도적으로 이끌어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 움직임은 매우 발빠르게 이루어졌다. 그 과정이 얼마나 신속했는지,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한 일부에서는 반발도 없지 않았다. 그들은 조직의 확대·개편이 자칫 80년대를 관통해온 민족문학운동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어, 민중적 민족문학운동의 주요한 문제의식을 희석화시킬 수 있음을 경계했다.

하지만 문학은 아무리 운동성을 중시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문학작품의 무게가 가장 강력한 발언권을 지니는 분야였다. 선배들이 움직일 때, 그것은 곧 여러 개의 거대한 소우주들이 움직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고은의 우주, 신경림의 우주, 백낙청의 우주, 송기숙의 우주, 이문구의 우주, 조태일의 우주, 현기영의 우주, 황석영의 우주…. 그들은 87년 9월17일 자실의 뜻을 그대로 이어받았지만, 새로운 탄력성을 지니는 조직 민족문학작가회의(작가회의, 초대 회장 김정한)를 출범시켰다.

“1974년 11월 ‘문학인 101인 선언’으로 출범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70년대의 유신독재와 80년대의 개편된 군부독재체제에 맞서 범국민적 민주와 항쟁의 일익을 맡아왔다. … 이 과정에서 우리들 개개인이 각자의 최선을 못 다하고 전체의 노력이 시대의 요구에 미흡했던 점이야 어찌 한두 가지였겠는가. 정작 예술작품의 생산이 부진한 바 있었고 행동의 대열이 흐트러진 적도 많았으며, 도대체 문화민족의 체통에 값하는 문학단체를 만들기에 힘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오늘 이 숨가쁜 역사의 고비에서 우리 모두가 크게 깨우치고 다짐하며 거듭남으로써만 개인으로서도 살고 집단으로서도 역사의 심판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우리는 참다운 민족문학을 열망하는 모든 사람들의 구심점을 마련하고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싸움에 더욱 알차게 기여하고자, 기존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확대·개편하여 ‘민족문학작가회의’를 창립하기로 뜻을 모으고….”(‘창립선언문’ 중에서)

처음, 청년 작가들 중 상당수는 작가회의에 동참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여전히 야전에서 유격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인데도 작가회의가 몸집만 부풀린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결국 민족문학 진영은 머지않아 이런 진통까지 슬기롭게 아우르는 데 성공한다. 89년 봄, 청년 작가들은 선배 작가들이 중심이 돼 의욕적으로 추진한 남북작가회담에 몸으로 힘을 보탠다. 경찰서 유치장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곳은 이미 선·후배 작가들이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하나가 된 축제의 마당이기도 했다.

다른 예술 분야의 변신 움직임은 88년 하반기에나 가능했다. 각 분야에서 활약하던 선배들이 88년 9월30일 예술극장 한마당에서 모였다. 그 모임은 6월항쟁까지 숨가쁘게 달려온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대응하는 전망을 모색해 보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간담회 결과, 분열 양상을 극복하는 게 가장 시급한 과제라는 데 뜻이 모아졌다. 그 뜻은 10월6일의 제2차 간담회를 거치면서 민족예술인들의 새로운 통합조직을 건설하자는 것으로 정리됐다.

그때부터 분야별로 또는 지역별로 물밑 접촉과 난상토론이 활발하게 이어졌다. 일부에서는 전투적 견결성을 내세워 주로 문화운동 제1세대 선배들이 중심이 된 이런 움직임을 외면하거나 평가절하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대세는 당동벌이(黨同伐異: 이해관계가 같은 사람끼리 서로 뭉쳐서 다른 사람을 배척한다)를 극복하고 구동존이(求同存異: 일치·통일 등을 통해 대동 세상을 추구하되, 사람마다 차이를 그대로 존중하고 남겨둔다)로 나아간다는 것이었다. 적은 여전히 강하고, 아(我)는 여전히 약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목표는 하나, 민중이 주인되는 진정한 민주세상을 만들어내자는 데 있었다.

간담회 후 조직·규약(김용태), 인선(황석영), 재정(오종우), 지역 연락(채희완), 대회 준비(임진택) 등 5개 소위가 구성돼 조직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그해 11월2일 발기취지문을 작성해 장르별로 839명(문학 153명, 미술 185명, 민족극 149명, 영화 102명, 음악 123명, 춤 37명, 건축 67명, 사진 23명)으로부터 동의 서명을 받아내, 11월26일 서울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발기인 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마침내 88년 12월23일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초대 공동의장 조성국·고은·김윤수)이 명동 YWCA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공식 출범했다. 해방 이후 이 땅을 덮어 왔던 보수적인 기존의 예술 지형도에 일대 지각 변동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민중과 확고히 결합된 투쟁의 현장에서, 우리는 대중성이 무엇이고 운동성이 무엇이며 진정한 예술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생생하게 자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 자리에 서서, 민중의 정서, 민중의 미의식을 배우고 민족민주운동, 통일조국건설운동의 대의를 체현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기량을 갈고 닦음으로써 소수의 예술가만이 아니라 민중 전체가 보다 높은 예술적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참 민중적 민족문화예술의 기틀을 건설해낼 것이다.”(‘창립선언문’ 중에서)

민예총은 산하에 당시 활동하고 있던 모든 문화예술 분야를 망라한 위원회를 두었다. 그리고 모든 위원회에는 ‘민족’자가 붙었다. 민족문학위원회, 민족미술위원회, 민족극위원회, 민족음악위원회, 민족영화위원회, 민족춤위원회, 민족굿위원회, 민족사진위원회, 민족건축위원회 등. ‘민족’이야말로 분열을 이겨내는 힘의 바탕이라는 의지가 강하게 배어 있었다.

그러나 작가회의나 민예총 모두 자신의 창립 의지를 관철시키기에는 여전히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 땅의 시인들, 이 땅의 예술가들은 고은의 말대로 ‘시가 국가보다 더 높은 것이기 위하여 시를 쓴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군부독재에서 꼴만 바꾼 노태우 정권은 여전히 착종된 애국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겨울공화국은 물러간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변화는 시작됐다. 처음에는 엄청난 저항과 무시, 그리고 편견에 시달렸지만 이들 조직을 통한 새로운 문화운동은 90년대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의 문화적 상상력을 밑바닥부터 바꿔 놓았다. 지극히 사소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충북 청주시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는 ‘본정통’이었다. 말하자면 서울의 명동과 같은 거리다. 그러나 지금 청주에 가더라도 그 거리를 찾을 수 없다. 거리 이름이 ‘성안길’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민예총 충북지부가 생기면서 제일 먼저 이뤄낸 성과가 바로 그것이었다. 반백년을 하염없이 써온 일본식 땅 이름을 그야말로 ‘민족적’으로 바꾸는 일! 그게 어찌 사소한 일일 텐가.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미디어부 기자)

독자제보를 기다립니다경향신문 미디어부(02-3701-1156~8)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02-3709-7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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