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문익환 목사 북한 방문

2005.02.23 17:13

1989년 3월25일 오후 조선민항기 P-814편이 북한 관문 순안비행장에 안착하고 문이 열리자 남한의 목사 문익환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발이 성성한 그는 평양 도착성명을 낭독했다.

[실록 민주화운동] 91. 문익환 목사 북한 방문

“내가 밟고 가는 눈 덮인 들판길 조심하여 헛밟지 말지어다. 오늘 걷는 나의 발자취가 뒤에 오는 이의 표식이 될 것임에.”

1948년 4월 피로써 피를 씻는 동족간 참극을 막고자 김구가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스스로 38선을 넘으면서 읊은 서산대사의 시를 다시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성명은,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윤동주와 ‘모든 통일은 선’이라고 외친 장준하의 마음으로, 비등점에 도달한 남북한 민중의 열망을 실현해 보고자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과 진정으로 기탄없는 대화를 하러 왔노라고 선언했다. 윤동주와 장준하는 일제와 분단독재에 의해 숨진 그의 벗이었다.

“한편이 이기고 한편이 지는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 승리자가 되는 길을 찾아왔다”는 그를 북한 각계 대표는 정중하고 따뜻하게 맞이했다. 6·25 피란길에 헤어진 육촌 누이를 찾아 공항에 나오게 한 섬세한 배려와 함께. 그는 이미 네차례에 걸쳐 유신과 5공의 군사정권 감옥을 드나든 백전노장의 민주화 전사이자 옥중시편 백수십 편을 퍼올린 시인이기도 했다.

다음날 문익환은 김일성과 뜨겁게 포옹했다. 국가 원수를 대하는 인사치레나 외교적 의전 따위는 필요없었다. 두 사람은 그저 약속한 듯이 말없이 껴안았다. 그리고 문익환은 제 일성을 날렸다. “분단 50년을 넘기지 맙시다. 그것은 민족적 수치입니다”라고. 이 말은 김일성과 북한 동포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86년 서울대생 김세진·이재호가 민족자주화를 절규하며 분신한 이후 문익환은 눈 앞에서 이동수·조성만이 불타면서 떨어져내리는 현장을 목격했다. 88년 들어 봇물처럼 터져나온 통일 논의는 반외세 자주화운동을 복원한 ‘4·3자료집’ ‘남부군’ ‘태백산맥’ 등의 출간과 함께 국민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고 있었다. 또 세계적으로 동서 화해의 신데탕트 흐름이 일고 있는 가운데 김일성은 89년 신년사를 통해 정치·군사적 긴장 해소를 위한 남북 정치협상회의를 제안하는 등 한반도 정세는 복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문익환은 이런 상황 앞에서 깊게 고민했다. 한반도가 아시아 평화의 새 질서를 창출하고 제3세계 발전을 선도하는 중추국가가 되려면 무엇보다 반세기에 걸친 남북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소모적인 군비 지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소신이었다.

그가 보기에 비록 박정희 유신통치를 강화하는 명분용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72년 7·4 남북공동성명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된 성명은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외세 의존 없는 자주적 해결, 무력 행사에 의거하지 않는 평화적 방법, 상이한 이념과 제도를 초월한 민족대단결의 3원칙을 천명함으로써 이후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주요한 근거가 됐다.

88년 노태우 정부의 7·7선언 역시 일방적이고 갑작스런 발표였지만, 그 자체로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만큼 민족공동체 의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남북 동포간의 상호 교류, 남북 교역의 문호 개방, 비군사적 물자에 대한 우방들의 대북한 교역 인정, 한반도 평화정착 여건 조성을 위한 우방과의 관계 개선 지원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7·7선언은 남북 화해와 개방이라는 시대 흐름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다만 노태우 정부가 대(對)북한 및 통일 정책을 창구 단일화라는 명분 하에 독점함으로써 정치적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는 데 문제가 있었다. 또 노태우 정부가 추진 중인 남북 교차승인, 유엔 동시 가입은 자칫 분단 고착으로 갈 위험이 농후했다.

문익환은 우선 김일성을 만나 통일에 대한 그의 진솔한 속내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통일 문제가 더 이상 독재권력의 전유물로서 정권안보용으로 이용될 수 없다는 자각을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그것은 창구 단일화의 금기를 깨뜨리는 일이었다. 그는 일본 도쿄와 중국 베이징을 거쳐 단호하게 평양행을 선택했다. 그 길에는 유원호와 정경모가 동행했다.

평양에 간 문익환은 학생소년궁전에서 어린이들의 춤과 노래를 즐기는가 하면 만경대, 광복거리, 경기장, 옥류관, 봉수교회, 만수대 예술극장, 만수대의사당 등을 거침없이 드나들며 민족의 자주적 통일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모습은 남한 TV 앞에 앉은 국민들을 놀라게 했다. 주체탑, 개선문, 혁명열사릉의 모습이 잠깐씩 화면을 스칠 때마다 남한 국민들은 당혹했다. 전쟁과 분단 이후 이런 일은 사실상 처음 있었기 때문이다.

4월1일 문익환의 숙소를 찾은 김일성은 격의없는 말을 쏟아냈다. ‘신년사에서 언급한 노태우·김대중·김영삼·김종필·김수환·문익환·백기완에 대한 평양 초청은 아직 유효하며 모든 집단적·개별적 방문을 환영한다. 1민족 1국가 2자치정부 형식의 점진적 통일을 위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어야 한다. 불가침선언을 채택한 뒤 쌍방간 군비축소를 단행하고 동시에 이산가족 내왕, 철도 연결, 금강산 공동개발을 비롯한 경제·문화·인도적 문제를 해결하자’ 등등.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북한으로서는 군사·정치적 긴장 완화를 1차 과제로 고집하던 종전 입장에서 후퇴한 것이었다.

문익환은 우선 실현 가능한 문제를 제안했다. 남북한 공동의 국어사전을 편찬하고, 베이징 아시안게임에 남북 단일팀으로 참가한다면 국가 대신 남북한이 함께 작사·작곡한 새 노래를 부르며, 남쪽의 출판물을 북한 몇몇 도시에서 팔자는 것 등이 그것이다. 문익환은 김일성이 고령임에도 무척 건강하며 정확한 기억력과 인민에 대한 강고한 장악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어 4월2일 문익환은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허담과 회담을 갖고 9개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7·4 남북공동성명의 기본 정신인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원칙 확인, 2개의 조선정책 반대와 통일조국 지향, 정치·군사적 대결 해소와 다방면의 민간교류 실현, 남북공존 원칙에 기초한 합리적 통일방안 모색, 남한 청년학생들의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 지지 등의 내용이었다. 아울러 ‘쌍방은 우리 민족이 굳게 단결해야 할 필요성과 그 절박성을 통감하면서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힘 있는 사람은 힘을 내며,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을 내어 통일 위업 실현에 적극 이바지할 것’을 그 실천대책으로 남북 당국과 제 정당·단체들에 건의하기로 했다.

그러나 ‘남북간에 쌓여온 불신과 반목을 해소하고 사상·신앙·제도의 차이를 초월한 민족적 단합과 쌍방간의 접촉·교류의 길을 터놓는 선구적 역할’로 평가받은 문익환의 방북은 남한 정부에 의해 간단히 묵살됐다. 정부는 공안장관 회의를 통해 문익환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기로 방침을 정했으며, 그는 4월13일 김포공항에 도착한 즉시 구속 수감됐다. 당시 나이 71세였다.

6월26일 방북사건의 첫 공판이 열린 서울형사지법 대법정에는 국가보안법 조항을 두고 검찰에 항변하는 문익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그래, 찬양고무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비난하고 적대해 온 사람들이 통일하려면 어째야 되겠나. 서로 상대의 좋은 점을 찬양하고 고무해야 하지 않겠나.”

문익환에게는 결국 징역 7년의 형이 확정됐다. ‘신랑이 신부의 방을 찾듯이 감옥에 가라’는 간디의 말을 방에 걸어놓고 살아온 그도 이전의 당당한 징역살이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힘겨운 수형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무엇보다 이 지상에서 가장 지고한 인연을 나눈 어머니 김신묵을 잃었다. 아들이 재판을 받는 법정에 나와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 했다. 목사 아니면 누가 불공대천의 원수 김일성을 안아 주나. 목사의 소명은 원수도, 문둥이도, 창녀도, 죄인도 모두 안아서 사랑하는 일이다”라고 재판부를 준열하게 꾸짖던 어머니였다.

문익환은 복역 도중 건강 악화로 병원으로 이송됐고 19개월만인 90년 10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11번의 생일을 감옥에서 보내면서도 천의무봉의 순결한 열정을 잃지 않았던 문익환. 시인 고은의 표현대로 ‘어린이의 무구함을 지닌 그의 순수는 차라리 이 시대의 하나의 폭력’이었다.

그가 방북 당시 김일성과 합의한 내용들은 결국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으로 고스란히 승계됐다. 이로써 그가 받은 고난은 평화를 향한 장정의 첫걸음이었음이 뒤늦게나마 확인된 셈이었다.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미디어부 기자)

-독자제보를 기다립니다-

경향신문 미디어부(02-3701-1156~8)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02-3709-7614)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