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남북 작가회담의 무산

2005.03.09 17:40

[실록민주화운동] 93. 남북 작가회담의 무산

“오늘, 우리는, 역사 앞에, 죄인입니다. 반세기 민족분단의 비극을 깨뜨려 보려는 우리의 순수한 노력을, 저들은, 무참히 짓밟고 말았습니다. 읽겠습니다.”

시인은 버스 창밖으로 몸을 내민 채 기자들 앞에 대고 ‘남북작가회의 예비회담 원천봉쇄를 규탄한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읽어내려갔다. 서울 마포경찰서 안마당이었다.

“8·15 직후 조국의 분단을 눈 앞에 두고 몸을 던져 절규하던 선열들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쟁쟁히 되살아나는 듯한 오늘날 우리는 온 민족의 통일 염원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남북작가회의에 나가고자 하였다. 이는 민족자주, 민주, 통일의 대의에 입각하여 민간 주도의 남북교류를 실현함으로써 영구 분단을 거부하고 민중이 주체가 되는 진정한 평화통일에의 길을 열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충정은 정부당국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 우리는 남북작가회의 개최를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이며 추후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판문점에서 허전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을 북한측 대표단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위로의 말을 전한다. 분단을 청산하고 이 산하의 굽이굽이에 조국은 하나라는 우렁찬 함성이 메아리칠 때까지 우리는 싸우고 또 싸울 것이다. 민족자주 만세! 조국통일 만세!”

같은 시각, 판문점 북쪽 통일각에서는 단장 최영화(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제1부위원장) 등 5명으로 구성된 ‘북남작가회담’ 대표단이 쓸쓸히 발길을 돌렸다. 북측 대표단으로, 시인인 오영재는 이때의 심정을 시로 남겼다.

“자리가 비어 있구나/ 고은 신경림 백락청 현기영 김진경/ 그리고 간절히 우리를 청해 놓고/ 오지 못하는 사람들/ 하나 우리는 나무라지 않으마/ 그것을 나무라기에는/ 가슴이 너무도 아프고/ 터지는 듯 분하구나/ 지금쯤 어느 저지선을 헤치느라/ 온몸이 찢기어 피를 흘리고 있느냐/ 애국의 뜨거운 가슴을 열고/ 그들이 달려오는 길을/ 그 누가 가로막았느냐/ 아 분계선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오가는 바람아/ 떠가는 흰구름아/ 우리의 이 목소리를 실어가다오/ 그리고 전해다오/ 오늘은 우리 돌아서 가지만/ 마음만은 여기 판문점/ 이 회담장의 책상 위에 얹어 놓고/ 간다고/ 정의와 량심의 필봉을 높이 들고/ 통일의 길을 함께 갈/ 그 날을 기어이 함께 찾자고/ 바람아 구름아 전해다오.”(‘전해다오’ 전문)

74년에 창립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87년 6월항쟁 이후 민족문학작가회의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확대 개편됐다. 그러면서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을 더욱 적극적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납·월북 작가들에 대한 해금 조치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통일운동에 관한 심포지엄을 연 것도 그러한 움직임의 일환이었다. 그러다가 88년 7월2일 남북작가회담을 개최하자고 전격적으로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88년 출범한 노태우 정권은 비록 직접선거라는 형식을 통해 집권했지만, 태생적으로 치명적인 흠을 지니고 있었다. 정권으로서는 일단 채찍보다는 당근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무회의에서 납·월북 작가들에 대한 해금문제가 의제로 올랐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풀어줄 것은 풀어줘야 한다. 이 문제도 국제적인 기준에서 보면 망신을 살 우려가 있다.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게 정권측 일부 인사들의 생각이었다. 사실 그들에게 책 한 권, 작가 한 명은 그리 문제가 될 것도 그리 무서울 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분단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굳어질 대로 굳어진 반북의식은 어떤 이유로든 ‘경계선’을 넘어간 사람, 심지어 사물에 대해서조차 결코 관대할 수 없었다. 결론은 ‘아직 이르다’는 것으로 내려졌다.

그 다음 국무회의때 공보처 장관은 북한에서 이미 85년에 춘원 이광수를 공식적으로 해금했다는 사실을 새로 밝혔다. 그러자 국무위원들의 반응은 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북한이 그랬다는데…’ 하는 이상한 심리가 발동한 것이다. 결국 88년 10월27일 정부는 ‘납·월북 예술인 100여명의 정부 수립 이전의 순수예술 작품에 한해’라는 조건을 달고 해금조치를 단행했다. 이로써 임○(임화), 정○용(정지용), 김○림(김기림) 등 뻔히 알면서도 차마 그 이름을 온전히 부를 수 없었던 복자(覆字) 문인들이 복권된 것은 물론 처음부터 북한에서 활동하던 문인들도 서서히 우리 문학사 속으로 편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완전한 문학사의 복권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작가회의의 제안에 대해 북한의 공식적인 회답이 온 것은 89년 2월17일.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명의의 공개서한을 통해서였다.

“오늘 조국통일에 대한 온 겨레의 열망이 급속히 높아가고 세계정세가 우리 민족의 통일성업에 유리하게 발전하고 있는 때에 우리 작가들도 응당히 우리의 통일행진에 보조를 맞추어 민족적 유대를 강화하고 통일의 앞길을 열어가는 것은 지체할 수 없는 긴급한 과제로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이야말로 북과 남, 해외의 모든 작가들이 민족 앞에 지닌 사명을 깊이 통감하고 대화의 마당에 마주앉아 공동의 행동지침을 마련하여야 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뒤 남북 양측은 한 차례 공개서한 형태로 각기 작가회담의 대표단을 구성, 발표했고 마침내 89년 3월27일 역사적인 회담을 갖기로 합의했다. 그렇지만 남쪽의 사정은 그렇게 홀홀하지 않았다. 작가 황석영에 이어 이틀 전 목사 문익환마저 일본을 통해 방북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국이 또다시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렸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둘 다 작가회의의 회원이었기 때문에 분단 이후 처음인 작가회담은 어찌 보면 가장 나쁜 시기에 열리게 되는 셈이었다.

회담 당일 오전 10시, 작가회담 남쪽 대표단 5명(단장 시인 고은, 시인 신경림, 평론가 백낙청, 소설가 현기영, 시인 김진경)은 아현동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후 곧바로 버스에 올라탔다. 30여명의 회원이 대표단과 동승했다. 그렇지만 버스는 끝내 판문점까지 가지 못했다. 파주의 속칭 여우고개에서 완전무장한 전경대의 봉쇄선에 부닥치고 말았던 것이다.

얼마 후, 버스는 서울로 방향을 돌렸다. 결국 5명의 대표단을 비롯해 모두 27명의 작가들이 조사를 받고 전원 유치장에 수감됐다. 평소 조용한 편이던 마포서가 바빠졌다. 무려 스물일곱이나 되는 ‘시국사범’을 다뤄본 노하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이라는 무시무시한 칼날을 들이밀어도 마치 도로교통법 위반 사범인 양 행동하는 방약무인의 문인들 앞에서 형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조서를 받는 태도들이 영 불손해도 지켜보는 눈은 오죽 많은가.

그날 조사 과정의 압권은 박용수였다. 박용수는 시인인 동시에 민통련 보도실장이었다. 그는 버스에 탔다가 내리는 과정에서 형사들이 기자로 분류해 연행에서 제외했는데, 제발로 걸어서 들어온 케이스였다. 그리고는 떡 하니 책상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형사가 물었다.

“당신 누구요?”

대답이 없다. 형사가 다시 물었다. 조금 신경질적으로. 그러나 박용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들고 있던 카메라를 눌러대는 게 아닌가. 당연히 소란이 일었다. 나중에서야 형사는 그가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안 들린다는 데야….

그날 밤 마포서 유치장은 한국 문단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꼴이 됐다. 백발이 성성한 시인 이기형·김규동부터 고은·신경림·백낙청·현기영 등 쟁쟁한 문인들이 다 들어와 있었다. 남자 방에는 모두 스물네 명의 문인이 들어갔고, 여자방에는 윤정모·이경자·유시춘 등 세 명이 들어갔다. 소내 투쟁이 벌어졌다. 문인들은 운동가를 부르고, 구호를 외쳤다. 행여 기자라도 나타나면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남자 문인들의 투쟁은 세 여성 문인들의 투쟁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남성 문인들은 슬금슬금 졸기도 하고 무어 재미있는 거 없나 한눈을 팔기 시작했는데, 여성 문인들이 있는 방은 도무지 투쟁 수위가 수그러들 줄 몰랐다.

결국 54시간여 만에 당국은 대표단 5명을 불구속 입건하고, 나머지 문인들을 훈방 조치했다. 여론이 무서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일시적인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다. 4월1일 고은을 자택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전격 연행해 구속했고, 나머지 대표단을 출국 정지시켰다.

해방 이후 최초로 남북 작가들이 만나고자 했던 작가들의 꿈은 이렇게 무산됐다. 그렇지만 이 사건은 적어도 표현의 자유를 ‘지상의 척도’로 삼는 작가들은 결코 인위적인 ‘분단의 금도’를 용인하지 않으며, 그래서도 안된다는 사실을 재삼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적어도 꿈의 영역에서 분단의 높은 장벽은 이미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통일을 위한 도정에서 더없이 귀중한 첫걸음이었다.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산업부 기자)

독자제보를 기다립니다경향신문 미디어부(02-3701-1156~8)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02-3709-7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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