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중공군의 개입, 흥남철수

2010.05.03 17:44 입력 2010.05.04 01:59 수정
번역·정리 | 정진국(미술평론가)

성탄전야, 거대한 화형장처럼 불타는 흥남부두

프랑스 종군기자가 본 6·25

중공군 참전에 밀려 후퇴하는 유엔군이 혹한 속에 휴식을 취하고 있다.

중공군 참전에 밀려 후퇴하는 유엔군이 혹한 속에 휴식을 취하고 있다.

[앙리 드 튀렌은 한 보병사단의 운명을 따라, 38선을 되넘어 서울로 귀환했다.]

도로에 수많은 트럭과 지프 등 온갖 차량이 줄줄이 남행하고 있다. 후퇴다. 뺨은 얼어붙고, 장교들은 침통하다. 수심이 가득한 긴 난민행렬이 논밭을 가로질러 빠져나간다. 병사들은 창피해한다. 미군 고참 하사관은 이렇게 말한다. (…)

“우리더러 성탄절에 집에 가 있을 거라고 (맥아더 장군이) 약속했잖아. 이걸 타고 있으면 그렇게 되겠구먼.”

병사들은 수없이 많은 중공군 이야기를, 장교들은 핵폭탄 이야기를 한다.

서울에 눈이 온다. “찌르레기들이 중앙청 위로 세 번 날아갔는데, 그것은 눈이 온다는 신호지요.” 한국인 운전사가 고개를 치켜들고 말했다. 한국인에게도 노스트라다무스 같은 예언자가 있다. 기억하기 어려운 이름인데, 그가 하는 일은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 오늘만큼 널리 퍼진 적이 없다. 운전사는 이렇게 덧붙였다.

“북에서 크게 쳐내려올 것이라고 썼어요. 그것이 바로 김일성 인민군이라고 믿지요. 그런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이지요. 중앙청 위로 찌르레기가 세 번 나는 것을 보았으니까. 예언자는, 한국은 통일되겠지만, 피가 산을 적시게 된다고 했지요. 가족은 흩어지고 자식들은 죽는다고.” 운전사 김씨는 거의 울먹였다. 한국 사람들은 미신을 너무 믿는다! (…)

서울 주민들은 보따리를 쌌다. 그들은 집안 큰 항아리 속에 깊숙이 숨겨두었던 여러 깃발 가운데, 지난 7월에 인민군이 서울로 들어왔을 때 흔들었던 붉은 깃발(인공기)을 찾았다. 흰 눈에 살짝 덮여 덜 끔찍해 보이는 폐허 한복판으로 경찰들이 돌아다닌다. 그들은 ‘공민증’을 소지하지 않은 사람을 일제검거하고 있다. 정부는 공무원들에게 가족을 피란시키라고 충고했는데, 특히 경찰에게 그렇게 했다. 이들에게만 남행열차를 탈 우선권을 주었다. 그렇지만 지프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승차권을 암시장에서 3만원 내지 4만원에 내놓는다. (…)

미군의 폭격을 받고 있는 원산 시내.

미군의 폭격을 받고 있는 원산 시내.

[함흥, 흥남 전역에서 철수해야 할 사람은 6만명이었다. 이 작전을 수행하자면 보름은 걸릴 수밖에 없었다. 성탄 전야에, 나는 교두보로 나갔다. 비행기가 나를 연포 비행장에 내려놓았을 때, 함흥은 벌써 군사적 재앙의 거대한 화염에 활활 불타고 있었다.]

저녁에 눈에 가린 하늘 끝에서, 거대한 버섯처럼 연기가 피어올랐다. 기름통들은 무겁고 시커먼 소용돌이 덮개 밑에서 타올랐다. 목조건물들은 황톳빛 화염과 엷은 연기를 내뿜으며 마치 아벨을 화형하는 장작더미처럼 불타올랐다. 활주로 끝 멀리에 영국과자인지, 화공품 더미인지 알 길이 없는 더미가 붉은 불꽃을 터트리며 튀었다.

지상에서, 사방에 불이 붙은 그 제물들에 종교적인 위엄 같은 것은 없었다. 나는 지난 여름의 폭격으로 윗부분이 날아갔다가 그 위에 미군들이 이제 막 목조로 세운 대형 건물 앞을 지났다. 그 덮개를 올리기도 전에 다시 불을 질렀다. 석유로 적신 들보와 널빤지도 제각각 불타고 있어, 그 허공으로 타오르는 뼈대의 선마다 조명등처럼 나름의 고유한 모습의 불길로 타올랐다. 막사의 이동식 마루판까지 태웠지만, 비행장의 시멘트 동(棟)들은 그냥 놔두었다. (…)

나는 해질 무렵에 황폐한 흥남을 보러 갔다. 희끗한 눈발 사이로 군대의 불안과 자신들을 포기할까 두려워하는 주민들의 절망감은 그 도시 못지않게 처량했다.

완전히 인위적으로 조성된 공단 중심부에는 항구 주위의 공터에 그럭저럭 주물과 무기공장, 화학공장이 무리를 지어 들어서 있었다. 물론 여기저기 전통 초가집터에 벽돌로 급조한 노동자 집단숙소가 다시 들어섰는데, 프랑스의 옛 광산촌보다 조금 더 고약해 보였다. 이것이 시(市)의 전모다. 중심가도 변두리도 따로 없다. 상가라고 할 것도 없고 심지어 무슨 번듯한 거리라 할 만한 것도 없다. 어디든 변두리인 데다 앞이나 뒤 같은 것도 없이, 덩그라니 이 세상 끝, 북쪽지방의 황량한 고립지다.

이것만이 아니다. 여름에 있던 전술폭격의 회오리에 휩쓸려, 지붕은 다 날아가 버리고, 공장 벽은 잔해뿐이며, 가스탱크는 부서졌다. 건물마다 콘크리트 참호처럼 노동자들의 숙소만 남았다. 그 참호는 프롤레타리아 광부촌의 편의를 위해 혁명 장려금처럼 덧붙여졌던 것이다.

10군단은 바로 이곳에 진을 쳤다. 취재막사는 48번째 열에 속해 있었다. 견디기 어렵게 불길에 그을린 통로를 지나 내게 배당된 9번 문을 찾아 들어갔다. (…)

아침에 나는 극도로 혼란스러운 부두로 나갔다. ‘빅토리호’와 또다른 배가 선창을 따라 연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적하구(積荷口)마다 트럭들이 비스듬한 선거(船渠)로 들어서고 있었고, 남자들은 어깨에 해군 가방을 메고 계단을 기어올랐다. 모두들 난간에 손을 얹고 웃음을 띠고 있었다. 이들은 적어도 살아난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혼잡한 지역에서 놀랍도록 차곡차곡 쌓인 유류통이 수㎞ 뻗은 곳을 지났다. 이것들을 신속히 선적할 수 있을까. 이렇게 챙겨놓은 것은 최종적으로 큰 불을 지르려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했다. 전쟁 비상식량 상자들을 집채처럼 쌓아올린 터무니없는 구조물까지 태워버리려고…. 먹을 것을 찾아 한국인들이 달려들 텐데….

아무튼 시내의 모든 사람이 먹고 또 먹고 있었다. 여자들은 모두 커다란 샌드위치를 씹으면서 종종걸음으로 길을 걸어갔다. 카멜 담배보루를 외투자락 속에 몰래 숨기기도 했다. 한 공장 정문 앞에서, 누더기 차림의 아이 여섯이 둥글게 모여앉아, 각자 4㎏짜리 ‘콘비프’ 상자에 앉아 있었다. 한복판에 활짝 열린 다섯 번째 상자 속에 아이들은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이때가 이 도시에서 처음으로 누구도 굶주리지 않은 날이었을 것이다. 또 그러자면 재앙이 따라야 했다.

조금 뒤, 나는 비행장으로 가는 길가 마을에서 한국군 병사들이 미곡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는 모습을 적지 않게 보았다. 적의 식량으로 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때, 한국 해병은 ‘레이션’ 상자들처럼 엄격하게, 유엔군 깃발 아래 참전한 병사들의 가족을 사각대형으로 정렬시키고 있었다. 이들만이 지금으로서는 명령에 따라 철수하게 될 것이다. 이 무리에 군대의 띠를 쳐놓았다. 사실, 오전에 LST(상륙용 소형 함정) 한 척이 부두에 나타나 육지와 배를 오가면서 군중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보초들의 인솔을 받으며, 폭력을 쓰지 않고서는 막기 어렵게 밀리는 군중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끊임없이 도선에 넘쳤고, 또 과적한 도선은 곧장 바닷속으로 가라앉기도 했다. (…)

시계를 보았다. 오후 3시였다. 몇 초 뒤에 귀가 먹먹할 정도의 폭음이 북쪽에서 울렸다. 예정대로 함흥의 남쪽에서, 알몬드 장군의 이름을 붙인 다리가 끊어지는 소리였다. 그 다리는 완공된 지 닷새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 폭음은 함흥이 소개된 지 30분 지났다는 뜻이다. (…)

이 철수작전은 처음부터 해병대가 지휘했다. 그러니 그다지 새로운 문제는 없을 듯하다. 조이 제독의 대변인은 이런 말을 했다. “이건 인천과 거꾸로지요. 그래도, 여기처럼 군대 전체가 적의 압박으로 배를 타야 하는 경우는 역사상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전체라고 한 것은, 최후까지, 부두가 직접 뚫리지 않도록 자동화기로 막아낼 마지막 세 분대원 45명까지라는 뜻입니다.”

[한국전쟁 60년](4) 중공군의 개입, 흥남철수

이 무기는 아무튼 조용했다. 이 최후의 분대에 한 명의 부상자도 없었다. 최후의 48시간 동안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었다. 중공군은 눈앞에 와 있었고, 엄청난 수의 작전을 서두를 작심을 하고 있었겠지만, 그들에게는 포병도 공군도 없었다.

마지막 LST정이 부두를 떠났다. 포화가 멈추었을 때, 그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상륙정이 마지막 전함의 호위대와 재결합하자, 화염구름이 흥남 상공에 치솟았다. 고지들을 무너뜨리면서. 포화의 극성스러운 소란에 익숙했던 끝에 이제 거의 갑갑하게 느껴질 정도의 침묵 속에서, 그렇게 시내를 둘러싼 모든 봉우리가 중공군들로 덮이고 있었다.

여러 날 전부터 그들은 전진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부대가 맞이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포화의 경계선까지….

사실, 지난 사흘간, 그 누구도 이 주위에서 잠을 잘 수 없었다. 해군과 공군의 포화가 하늘을 완전히 뒤덮어, 아무리 높은 고도로도 정찰비행을 할 수가 없었다. 해군은 이렇게 말했다. “어떤 부대도 어떤 병력으로 도이 포의 장막을 통과할 수 없을 겁니다.”

실제로, 중공군은 중대와 연대 규모로 두 차례 공격을 시도했지만, 이튿날 완전히 몰살당했다.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분명, 이런 작전에는 무수한 포탄을 사용해야 했다. 결국 그렇게 해서 군수물자를 온전히 다시 배에 실을 수 있었다. 비상식량만 소각했다.

[나(세르주 브롱베르제)는 비행기 편으로 도쿄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이제 유엔이 그곳에서 무엇을 잃었나, 인명이나 금전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상실한 것이 무엇일까.]

불도저는 날을 세우고 이미 한국의 집들이 늘어선 마른 황토 담장을 파고들면서 초가의 바닥을 향해 돌진했다. 그때 소녀 하나가 울부짖으며 뛰쳐나왔다. 갑자기 그 불도저 날은 떡 벌린 턱처럼 막 먹이를 집어삼키려는 듯 아가리를 벌린 채 멈추었다. 이 토담으로 쌓은 3~4㎡가량의 오두막 속에 숨을 죽이고 일가족이 살아 있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15분 전부터, 포병대를 위한 사계청소를 하자면서 그곳을 밀어붙여야 한다고들 떠들었다. 이 비참한 혼돈을 벗어나면서, 소녀는 무어라 할 수 없는 기적을 맛보았을 것이다.

“중공군이 온다” 시민들은 다시 붉은 깃발을 꺼냈다

중공군이 횡성지구 전투에서 고지로 돌진하고 있다.

중공군이 횡성지구 전투에서 고지로 돌진하고 있다.

덧창에 기댄 불도저 운전사는 가슴을 에는 모습들이 판도라 상자에서처럼 속속 튀어나오는 것을 보면서 씁쓸한 형리의 표정을 지었다. 얼어붙은 얼굴의 부상당한 노파가 들것에 실려 나왔다. 소녀의 어머니는 집안의 쌀 단지를 자루에 부으면서 통곡을 했다. 절망적인 소녀는 증오에 찬 눈빛으로 달아나면서 사람들이 손에 쥐어준 과자를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같은 흥남 부두에서, 많은 민간인이 배를 타려고, 헌병이 접근을 막으려 쳐놓은 부두 입구 철망 사이를 통과했다. 그런데 적어도 출발을 하려면 그 한 시간 전에 모든 것을 종료해야 한다. 군은 자신들이 출발하기 위해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그 시각도 지났다. 그런데 계속해서 나중에 도착한 다른 사람들이 철조망을 흔들었다.

선량하고 용감한 친구인 이 헌병은 이렇게 울고불고 통사정하며 손을 잡고 늘어지는 여자들의 물결 앞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극적일 사연들을 한마디 이해도 못한 채 듣고 있었다. 또 그도 자신의 사정, 즉 하달받은 명령을 반복했지만 다른 이들은 그다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중에 머리에 봇짐을 인 채 얼굴이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된 한 여자가 있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훔치는 치맛자락에 매달려 있던 그녀를 닮은 소녀는 그녀의 어린 동생 같았다.

그 사연은 단순하고도 극적이지만 정말 기가 막혔다. 이 모녀는 혼잡한 군중에 떠밀려, 지금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탄 남편과 다른 두 자녀와 떨어졌다. 바로 그 자리에 AP통신의 톰 램버트 기자가 있었다. (…) 그는 곧장 한 걸음에 부두의 마지막 지휘소가 설치된 3사단 지휘소로 달려갔다.

5분 뒤에, 술(Soule) 장군이 탄 마지막 지프가 부두 입구에 급정거했다. 태울 수 있는 한 최대한 피란민을 승선시키라는 명령이었다. 헌병은 수문을 열면서 큰 손짓을 했다. 소녀는 갑자기 환한 표정을 지으며, 두 다리를 꼬아 90도 각도로 몸을 숙여 동양식의 큰 절을 하고서 부두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이 전쟁의 잔인한 일화 가운데 종종 이렇게 톰 램버트의 경우처럼 미국에 명예로운 것이 있다. 또 콕 집어 말할 수는 없더라도, 아무튼 나중에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기록할 만한 것도 있다. 북경의 여론이나 공산주의 신문에서, 이렇게 겉으로 잔인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불가피한 이면을 이야기할 만한 다른 일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드라마들이 불가피하다는 것도 전쟁이라고 하는 역겨운 인간사의 일부일 뿐이다.

이런 이야기를 새삼스레 떠올리는 것은 철수하는 모든 지점과 부두에서, 무서우리만큼 규칙적으로, 이런 드라마에 얽힌 수많은 사람과 마주치기 때문이다. 이런 방대한 정치적인 이동은 남한과 마찬가지로 북한 대다수 주민의 혐오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남한보다 북한 사람이 공산주의 체제에 대해 더 심하게 느끼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문제는 여전하다. 이제 그곳을 떠나려던 바로 그 사람들, 버림받았다는 감정만이 아니라 군대가 칠 수밖에 없던 장벽에 막혀 붉은 군대에 넘겨졌다는 감정을 갖게 될 사람들이 그 체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까? 이제 앞 세대보다 더욱 프롤레타리아가 되고 더욱 공산화한 채, 겨울을 날 식량도 돈도 없이 파괴된 공장과 허물어진 집 사이에서 눈밭을 떠돌 이 거대한 무리는 공산정권에 어떤 태도를 취할까?

서부전선에서 생포된 중공군들이 국군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서부전선에서 생포된 중공군들이 국군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14개국 군대로 구성된 유엔군은 1월3일 수도를 비웠다. 그러면서도 수도 북방에서 세 갈래로 넘쳐들 중공군의 집중을 지연시키려고, 공중에서 수많은 네이팜탄을 퍼부어 공산군에 깊고 시커먼 구멍을 파놓았다. 이른 오후에, 첫 번째 부대들이 도심 5㎞ 부근에 와 있었다. 장 마리 드 프레몽빌이 수도의 이 최후의 시간을 겪었다.]

1월2일 이른 오후에 서울의 벽마다 드문드문 남은 주민에게 이승만 정부가 부산으로 철수했다고 알리는 작은 벽보들로 덮였다. 이런 발표는 내무장관 조병옥의 명에 따랐다. 사실, 수도는 이미 선고받은 지 오래였고 정부는 오래전에 떠나고 적을 헷갈리게 하려는 ‘유령’ 정부만 남겨놓았다.

즉시 거리에 광풍이 넘쳤고, 당황하고 가엾은 사람들의 물결이 지난해 9월 해방의 공기가 여전한 폐허를 가로지르며 뚫린 대로로 몰리면서 한강으로 이어졌다. 그곳에서 최악이 될까 우려하던 참사들이 늘어만 갔다. 2열 또는 3열로, 끝없이 줄지은 범퍼와 범퍼를 부딪치면서, 사방에서 다리로 운집하며, 유엔군이 도시를 빠져나갔다. 물론 경황이 없는 도주는 아니다. 그래도 이 군대가 후퇴한다는 인상은 불가피했다. 모든 교차로에서, 차량의 행렬이 뒤섞였지만 충돌은 없었다. 공중에서 본다면, 거대하게 길이 막힌 모습이겠지만, 사실 느리지만 완벽하게 조직된 규칙적인 흐름이다. (…)

금세 여기저기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지난주 동안 100만의 주민이 수도를 떠나고 나서, 며칠 동안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비참하고 넋을 잃은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또다시, 일상이 되다시피 했어도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는 대탈주의 극적 장면들이 반복되었다. 전쟁 초부터 줄곧 노인과 여자와 아이들 모두가 유엔군의 무능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이 사람들 모두가, 너무 가난해서 등에 가재도구를 지고서, 하느님이 아시다시피, 다시 남행길에 올랐다. 만약 질문을 던진다면, 이들은 멍한 눈으로 당신을 쳐다보면서 무섭다고 할 것이다. 대포와 포격, 전쟁과 중공군과 또 자기네 정부가 자신들에게 무섭게 예고한 학대가 무섭다고. 그럼 어디로 가나? 그들도 모른다. 언제 어디에서 발길을 멈출 것인가? 이들은 이미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지난 수개월 동안 아무 생각도 없이 걷고 또 걸었다. 양떼처럼, 이들은 앞사람을 따랐다. 또 앞사람은 그들보다 먼저 그 길을 지난 사람들의 자취를 따른다. 겨울의 얼음 같은 바람이 휘몰아치는 길바닥에 수많은 여자와 아이들을 내모는 이것은 얼마나 미친 짓인가? 이런 길에서 자식을 읽고 희망도 없는 이 어머니들에게 더 잃을 것이 무엇일까? 수많은 고아들은 벌써 이 나라 방방곡곡을 헤매고 있는데….

무표정한 노인들과 자기들보다 세 배는 더 큰 요란한 빛깔의 보따리들을 머리에 이고 투덜대는 여자들이 뒤섞인 어마어마한 군중이 지나는 것을 지켜보는 우리 앞에서 한 피란민 여자는 다섯살쯤 되어 보이는 아들을 길가에 내려놓더니 자기 길을 계속 걸어갔다. 어린아이를 운명에 맡겨둔 채…. 너무나 극심한 불행 때문에 그녀는 정신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수많은 피란민이 얼음이 단단히 굳었다고 확인한 길을 따라 결빙된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람 수가 늘어나고 또 어떻게 해서든 강을 건너야 하므로, 몇몇은 다른 길을 택하는 위험을 감수했다. 얼어붙은 얼음이 갈라지면서 한 무리 사람이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강물 속으로 빠졌고, 물이 부글대며 솟아올랐다. 그런데 운이 좋은 몇 명은 교통수단을 찾아냈다. 다리 앞의 행렬 속에서, 늦게 도착한 한 관리가 황소들이 끄는 수레를 앞질러가던 낡은 미국 승용차에서 초조하게 꾸짖었다. 불길을 잡던 시청 소방차는 사람들과 비상식품과 가구로 넘쳤다. 뒤쪽 서울에서 화재는 더욱 더 빈번해지고, 의도적 방화일 테지만, 거센 바람을 타고 더욱 크게 퍼져나갔다. 밤이 되자, 탐조등 불빛이 띠처럼 퍼지는 가운데, 불쌍한 사람들의 끝도 없는 행렬이 마치 중국 그림자놀이처럼 두드러져 보였다. 시의 남쪽 한강변, 모래사장 3㎞에 걸쳐, 6열의 피란민들의 두껍고 짙은 뱀같이 늘어진 행렬이 천천히 희망도 없이 내일을 향해 꿈틀대며 기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 자전거를 탄 경찰들은 짐꾸러미 위에 이불을 얹고서 행렬을 앞질렀다. 밤에, 우리 뒤로 화재에 붉게 물든 배경에서 서울은 죽었다. 완전히 죽었다.

[연합군에 붙들린 중공군 포로는 아직 몇 되지 않았다(2월8일 현재 616명이다). 1월 초순에 그들은 여전히 상당한 호기심을 끌었다. 프레몽빌이 그들 중 한 사람을 만났다.]

완전무장한 중공군 한 명이 후퇴 중인 남한군 병사의 대열에 살짝 끼어들어, 유엔군 전선으로 침투하려다 생포되었다.

포로는 린파오 장군의 제4군 소속으로, 상하이 출신 리파숭(Lee Pa Sung) 중사라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중공군이 한국에서 결국 승리할 것으로 확신한다면서(중공군도 많은 목숨을 내놓기야 하겠지만), 장교들이 병사들에게 자신들이 수적으로 훨씬 월등해서 유엔군 병력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한국 전체를 잡아야 한다고 군에 명령했다고도 했다. (…)

그는 자신의 임무를 “적의 작계(作戒)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생포로 피란민을 검증하는 수준이 강화되었다. 오늘 헌병들은 지뢰탐지기를 피란하는 한국인들의 옷 속까지 들이대고 무기를 숨기고 있는지 확인했다.

중공군이 한국에 침입한 이유를 묻자, 포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대장들이 그렇게 명했고, 우리가 한국의 좋은 쌀, 가축, 옷과 모든 여자를 갖게 될 거라고 했다.” 그의 장비에는 털 달린 장화 한 짝과 신발 두 짝도 들어 있었다. 그는 신고 있던 신발이 젖는 바람에 신발을 바꿔 신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추위는 별것 아니라고 했다. 중국 날씨와 비슷해 익숙하다는 것이다. 그는 말린 옥수수, 쌀, 싱거운 흑빵 등 닷새치 비상식량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양민에게서 식량을 구했고 종종 암탉도 먹었다.” 중사는 북한 화폐를 소지했는데, 그는 자신의 봉급이라고 했다. 그는 마오쩌둥의 초상이 들어 있는 신분증도 지녔다. 그는 연합군의 공습이 중공군에 “끔찍한 효과”를 보였고 수많은 중공군 병사들이 임진강을 건너다 사망했다고 했다.

[2월8일, 튀렌은 수도권 전초기지에 있었다.]

서울로 가는 길이 탱크에 활짝 열려 있는 것이 확실하다. 수원~서울 간 얼어붙은 국도는 완전히 썰렁하고 그 주변 모든 도시는 폐허다. 수원은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고운 도시다. 성곽과 망루와 800년 가까이 된 옛 성문들에 둘러싸여 카르카손(프랑스 남동부의 중세 고도) 같은 곳인데 지금은 텅 빈 상자꼴이다. 성곽 안쪽에 남은 것이라고는 양탄자처럼 깔린 재뿐이고, 10만에 이르던 주민은 완전히 사라졌다. 멀리서 보면, 냉장고 얼음통 비슷하게 얼어붙은 논을 가로지르는 서울로 가는 길을 따라가면서 나는 고작해야 한국 사람 200명이나 보았을까. 10여명씩 무리를 지은 농민들인데, 각 무리마다 길가에서 흉측하고 비참한 자세로 얼어붙은 시신들을 묻고 있었다. 공습으로 죽은 병사와 남녀들이 뒤섞였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