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묻은 다이아몬드’ 마를새 없는 아프리카의 눈물

2010.08.17 21:34 입력 2010.08.18 10:31 수정

‘피묻은 다이아몬드(blood diamond)’에 대한 공방이 뜨겁다. 한쪽에선 슈퍼모델 나오미 캠벨(40)이 이달 초 찰스 테일러 전 라이베리아 대통령(62)에 대한 전범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더러운 돌멩이’를 받았다고 증언한 뒤 캠벨이 테일러로부터 다이아몬드를 ‘직접’ 받았는지를 놓고 진실공방이 진행 중이다. 다른 한쪽에선 짐바브웨 정부가 인권유린 논란을 빚어온 마랑게 광산에서 생산된 다이아몬드의 수출을 재개하면서 인권단체들의 반발이 거세다. 피묻은 다이아몬드는 분쟁지역(주로 아프리카)에서 생산된 다이아몬드로, 그 수입금이 전쟁 수행을 위한 비용으로 충당되는 다이아몬드를 지칭한다. 캠벨이 받았던 다이아몬드와 짐바브웨 정부가 판매하는 다이아몬드는 직접 연관은 없지만, 피묻은 다이아몬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그동안 피묻은 다이아몬드를 제재하려 했던 국제사회의 노력의 결과가 기대에 못미치는 수준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의 창]‘피묻은 다이아몬드’ 마를새 없는 아프리카의 눈물

◇ 캠벨만 보이고 테일러는 안 보이는 전범 재판 = 캠벨은 지난 5일 네덜란드 헤이그 소재 시에라리온 특별재판소(SCSL)에 증인으로 출석해 “잠을 자던 도중 두 명의 남성이 방으로 찾아와 작은 주머니를 줬고, 이튿날 아침 주머니를 보니 매우 작고 ‘더러운 돌멩이’가 들어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날 법정에서 캠벨이 발언한 ‘더러운 돌멩이’는 다이아몬드로, 두 명의 남성은 테일러가 보낸 것으로 이해됐다. 미국 여배우 미아 패로는 그러나 9일 SCSL에 출석해 “캠벨이 직접 ‘테일러로부터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받았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고 증언했다. 캠벨과 패로의 증언이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의 말이 완벽한 진실인지를 놓고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일단 ‘테일러가 캠벨에게 다이아몬드를 줬다’는 사실은 캠벨이 애매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패로의 증언으로 더 확실해졌다. 패로의 말이 진실이라면 테일러의 전범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증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테일러는 1991년부터 2002년까지 접경국인 시에라리온 내전 당시 반군조직인 혁명연합전선(RUF)으로부터 다이아몬드를 받고 무기를 공급하는 등 RUF가 저지른 민간인 대학살을 지원한 혐의 등 11가지 반인륜 범죄와 전범 혐의를 받고 있다. SCSL 검찰은 올해 초 테일러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97년 9월 넬슨 만델라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한 테일러가 슈퍼모델 캠벨에게 ‘피묻은 다이아몬드’를 선물로 건넨 정황을 포착했다고 주장했다.

[세계의 창]‘피묻은 다이아몬드’ 마를새 없는 아프리카의 눈물

캠벨은 검찰 측의 증인 출석 요구를 여러 차례 거부해 오다가 지난달 입장을 바꿔 법정에 섰다. 캠벨은 법정에서 테일러에게 받은 더러운 돌멩이를 당시 남아공의 만델라 어린이기금 이사였던 제러미 래프클리프에게 줬다고 말했다. 래프클리프는 6일 캠벨에게 받은 다이아몬드를 관리해왔다고 밝힌 뒤 다이아몬드를 남아공 경찰의 특수수사 조직인 호크스에 제출했다. 호크스는 원산지를 가리기 위해 전문기관에 감정을 의뢰한 상태라고 밝혔다. 시에라리온 인권위원회는 “시에라리온의 피의 대가로 만들어진 다이아몬드는 시에라리온을 위해 쓰여야 한다”며 다이아몬드를 자국으로 돌려보낼 것을 촉구했다.

캠벨이 일정 부분 거짓말을 했는지, 캠벨이 받은 다이아몬드가 시에라리온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가 관심이다. 그런데 시에라리온 내전 당시 벌어진 인권유린을 심판하는 이 재판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테일러의 혐의가 무엇인지, 캠벨과 패로의 증언이 테일러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지 등 재판 과정보다도 ‘전범 법정에 선 슈퍼모델’ 캠벨에게 쏠려 있다. 그나마 잊혀졌던 ‘시에라리온 사태’에 주목하는 데 캠벨의 유명세가 한몫한 셈이다. 테일러가 국제사회의 심판대에 오른 것은 2000년 유엔이 테일러를 공식적으로 비판하면서였다. 그 이듬해 유엔은 라이베리아의 다이아몬드 거래를 제재했고, 2003년 테일러는 대통령직에서 쫓겨나 나이지리아로 추방됐으며 그해 국제사법재판소에 서게 된다. 테일러는 이후 법정에 설 때마다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시에라리온 내전은 91년 군장교 출신인 포다이 산코가 라이베리아의 지원 아래 RUF를 결성해 정권축출을 시도하면서 시작됐다. 이 내전으로 7만5000명 이상이 숨졌다. 20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으며 수많은 어린이들이 소년병으로 징집되거나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혹독한 노동을 견뎌야 했다. RUF는 민간인들의 사지를 절단하는 등 극악스러운 전쟁 범죄로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고 있다. 테일러의 혐의를 입증하는 데만 내전이 끝난 뒤로도 10년의 세월을 채워가고 있다.

◇ 피의 다이아몬드 제재의 맹점 = 짐바브웨 정부는 지난 11일 인권유린 논란을 빚어온 마랑게 광산에서 생산된 다이아몬드의 수출을 재개했다. ‘피묻은 다이아몬드’의 거래를 차단하기 위한 국제협의체인 ‘킴벌리 프로세스(KP)’에 따르면 이날 마랑게에서 생산한 다이아몬드 90만캐럿에 대한 경매가 짐바브웨 수도 하라레에서 시작됐다. 이는 시가 7200만달러(약 855억원)에 달하는 양이다. 이날 경매가 열리자 미국과 이스라엘, 러시아, 레바논, 인도, 벨기에 등에서 많은 다이아몬드 판매상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헬기를 타고 하라레에 도착했으며 언론 취재에는 응하지 않았다고 미국 ABC방송이 전했다. 짐바브웨의 다이아몬드 재고는 450만캐럿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시가 17억달러에 이른다.

KP는 지난달 15일 짐바브웨 마랑게 광산에서 생산된 다이아몬드의 수출을 제한적으로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마랑게 광산지대는 2006년 다이아몬드 채굴이 시작된 이래 정부가 배치한 군인들에 의한 민간인 인권유린이 자행돼온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에 KP는 지난해 11월 짐바브웨에 대해 다이아몬드 수출 중단 결정을 내리고 실태 파악 작업을 벌여왔다. 인권단체들의 조사에 따르면 약 200명이 이 광산에서 숨졌고 수많은 여성과 아동들이 노동에 동원됐다.

세계적인 다이아몬드 딜러인 마틴 라파포트는 지난 2월 KP를 지원하는 세계다이아몬드협회(WDC)의 대표직을 그만뒀다. 그는 “짐바브웨의 비극은 피묻은 다이아몬드를 합법화하고 정당화하는 것”이라면서 “거짓말쟁이들이 이 (짐바브웨의) 다이아몬드가 합법적이라고 말하고 있다”며 KP의 결정을 꼬집었다. 짐바브웨 정부는 마랑게가 분쟁지역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마랑게에서 군이 철수하지 않고 있으며 “여전히 총을 든 군인들에 의해서 주민들이 다이아몬드를 캐러 광산으로 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현지 연구자인 티세케 카삼발라는 “마랑게에는 11살 정도의 어린아이들이 일하고 있다”고 말했고, 인권 활동가 엘리 하로웰은 “짐바브웨가 다이아몬드를 판매하는 것은 KP가 얼마나 취약한 약속인지를 알게 해 준 것”이라고 비난했다.

KP는 정당하게 생산된 다이아몬드를 ‘인증’하는 제도로, 다이아몬드 생산자와 비영리기관 간의 2년간의 논의 끝에 2002년 3월 유엔의 승인을 받고 그해 11월 출범했다. KP의 가장 큰 맹점은 ‘어떻게 피의 다이아몬드의 유통을 감시하느냐’다. KP는 가입하려는 국가가 KP 의장에게 편지를 보내기만 하면 가입이 성사되고, 가입된 국가라도 비가입국과의 거래를 막을 수 없다. 또한 특별한 제재 규정이 없다. 2007년 한 해 동안 약 1020만달러의 피묻은 다이아몬드가 유통된 것으로 추정됐다.

◇ 아프리카의 자원의 저주 = 짐바브웨뿐만 아니라 앙골라도 지난 6월 북동부 광산에서 군인들을 동원해 어린이들과 주민들에게 강제노역을 시켜 다이아몬드를 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콩고민주공화국도 광산지대 주민들이 억지로 일터로 나가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하루 1달러 안팎의 임금을 받고 일하면서 구타를 당하는 등 노동 조건도 매우 열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프리카는 다이아몬드와 금 등 광물자원이 풍부한 지역이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아프리카에서 광물 자원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으면서 천혜의 자원이 도리어 ‘저주’가 되고 있다고 11일 보도했다.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가 그 대표 격이라 할 수 있고, 나이지리아의 석유 생산지와 니제르의 우라늄 매장지에서 끊임없이 폭력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이들 국가들은 소수의 정치 엘리트와 무시할 수 있을 만큼의 적은 중산층, 그리고 비공식 부문(지하경제)과 농업, 사냥 등 여러 분야에서 삶을 꾸려가는 대다수 주민들로 구성돼 있다. “정치 지도자들이 자원을 통제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체계가 고착화돼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연간 1억달러의 다이아몬드를 생산하는 시에라리온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311달러다. 킴벌리 프로세스는 분쟁과 쿠데타로 얼룩진 아프리카에서 깨끗한 다이아몬드를 생산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국제사회의 성과였지만, 그 효과는 제한적이라는 것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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