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이만섭 전 국회의장을 만나다

2011.05.01 21:44

이만섭 “5·16혁명, 혼란 수습 위해 불가피… 유신은 절대로 해선 안되는 것”

김호기 “유신, 억압적 감시체제의 절정” - 이상돈 “서울 중산층, 5·16 인정 안해”

연세대 김호기 교수와 이만섭 전 국회의장, 이상돈 중앙대 교수(왼쪽부터)가 지난달 29일 5·16 당시 국회의사당이었던 서울시의회 건물 앞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연세대 김호기 교수와 이만섭 전 국회의장, 이상돈 중앙대 교수(왼쪽부터)가 지난달 29일 5·16 당시 국회의사당이었던 서울시의회 건물 앞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4·19혁명의 메아리가 채 가시지 않은 1961년 5월16일 일단의 군인들이 탱크를 앞세워 서울을 점령했다.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정변이다. 이 역사의 현장을 가까이서 지켜본 신문기자가 있었다. 훗날 박 전 대통령을 도와 정치 일선에 뛰어든 이만섭 전 국회의장(79)이다. 이상돈 중앙대 교수(법학)와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의 열한 번째 ‘대화’는 이 전 의장과 마주했다. 올해 50주년을 맞는 5·16을 돌아보고 박정희 시대의 의미를 이 전 의장의 체험담을 통해 짚은 자리였다. 지난달 29일 경향신문사에서 이뤄진 대화는 5·16을 어떻게 지칭하느냐부터 견해를 달리했다. 이 전 의장과 보수 성향의 이 교수는 ‘혁명’으로, 진보 성향의 김 교수는 ‘쿠데타’로 규정했다. 이 전 의장은 “5·16혁명은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정당했다기보다 불가피했다”고 옹호하면서도 “나중에 유신체제는 절대 나와선 안되는 것이었다”고 선을 그었다. 이 교수는 ‘농민과 서민을 위한 리더’로서 혁명 당시의 박 전 대통령을 평가한 반면, 김 교수는 ‘억압적 감시체제’인 유신체제의 반민주성을 강조했다. 5·16은 역사적으로 쿠데타로 매김돼 있지만, ‘박정희의 빛과 그늘’을 보는 혼재된 시선도 대화 곳곳에 투영됐다.

▲ “경제 살린 부분은 승계하되
강경정치·독재는 단절해야” - 이만섭 전 의장

이상돈 중앙대 교수(이하 이상돈) = 이 전 의장은 <5·16과 10·26, 박정희 김재규 그리고 나>라는 책도 냈고 박정희 시대를 돌아볼 때 산증인이다. 5·16혁명을 보고 왜 “올 것이 왔다”는 기분을 느꼈는지 궁금하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하 이만섭)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시절이라 당시 사정을 잘 알았다. 나도 결국 올 것이 오고 말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그 당시 상황이 한마디로 무정부상태였다. 국민들이 4·19혁명 이후 민주당을 지지해서 국회의원의 99%가 민주당으로 당선됐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신·구파 싸움이 너무 심했고 사회도 극도로 혼란했다. 장면 총리도 신·구파를 안배하느라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이하 김호기) = 제2공화국이 정말 그렇게 무능했는지, 일각에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60년에 4·19혁명이 일어나고 이듬해 5·16쿠데타까지 1년 정도에 불과했다. 민주화가 이뤄지면 그동안 억압돼 온 사회갈등이 폭발하는 통과의례가 있기 마련이다. 5·16쿠데타 합리화를 위해 장면 정권의 무능함이 지나치게 강조돼 온 것 아닌가.

이만섭 = 군대의 개입이 빠르다는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나는 당시 내용을 너무 잘 안다. 더 기다렸으면 나라가 엉망이 됐을 것이다. 왜 군인이 일어섰느냐고 말할 수 있으나 내 느낌에는 결국 이렇게 됐구나,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상돈 = 서울 중산층 사람들이 보기에는 새로 들어온 혁명주체 세력이 사회주의 집단이 아니냐는 걱정이 상당히 있었다. 새 혁명세력이 어떤 색깔이었나.

이만섭 = 왜 그런 얘기가 나왔냐면 63년 민정이양 뒤 대선 때 윤보선 후보 측에서도 집요하게 그런 얘기했고 미국도 사실 그런 소문을 냈다. 그래서 오해받을까봐 혁명공약 제1항에 ‘혁명군은 반공을 국시로 삼고 유엔헌장을 중시한다’고 넣었다. 내가 볼 때 박 대통령은 민족주의자다.

▲ “성장에 따른 빛과 그늘 공존…
이제 ‘박정희주의’ 결별해야” - 김호기 교수

이상돈 = 쿠데타가 개도국에 흔했다. 부정·외제품 척결을 외친 것은 5·16혁명밖에 없었던 것 같다. 박 대통령이 67년 대선 때 러닝셔츠 바람에 밀집모자를 쓴 사진을 통해 농촌표 다 끌어모은 것 아니었나. 정말 농민과 서민을 위한 대통령이었다고 보나.

이만섭 = 달러 한푼 없는데 외제품 단속은 경제 살리기를 위해 당연히 해야 했다. 그때 우리가 미국 원조금을 가지고 살았다. 박 대통령은 미국 원조 없이 사는 나라를 만들자는 집념이 강했다. 요즈음 원조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됐는데 그 기초를 박 대통령이 닦았다. 자신이 가난한 농민 아들로 고생을 해서 진심으로 농민, 서민을 생각했다. 반면 윤보선 후보는 대지주 아들로 편히 컸던 분이다. 박 후보는 막걸리 마시며 모심기했는데, 윤 후보는 농촌에 갈 때도 차려 입고 가더라. 63년 대선 때 보수 진영은 윤보선 찍고, 개혁 원하는 젊은 세대가 박정희 찍었다. 그날 개표에서도 쭉 지다가 오후 2시 지나서 마지막에 전남 목포·신안군 표로 당선된 거다.

김호기 = 박정희 시대에 두 개의 중요한 전환점이 있다. 하나는 64년 개방전략으로 선회해 세계시장을 활용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72년 유신체제의 등장이다. 박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것이 논란거리인데 60년대 박 대통령은 ‘조국’ ‘민족주의’ 등을 유독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민족주의자인가.

이만섭 = 민족주의 개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박 대통령은 우리 민족이 잘살아야겠다,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해 잘사는 나라가 돼야 한다는 민족주의 집념이 강했다. 조국 근대화나 민족 중흥을 앞세워 민족주의자인 게 확실하다. 원래 대구사범학교를 나와서 경북 문경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했다. 내가 듣기로는 교육장이라는 일본사람하고 충돌이 있었고, 결국 선생을 못하게 됐다. 그래서 만주에 가서 허허벌판에서 먹고 살려니 군관학교로 갔고, 머리 좋아 수석졸업하고 일본육사에 편입한 것이다. 일본군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평가해선 안되고, 왜 갔는지 생각해야 한다.

이상돈 = 민도가 높은 서울의 중산층은 5·16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공화당은 서울 선거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 5·16이 정당했다고 생각하나.

이만섭 = 정당했다기보다는 불가피했다. 5·16은 불가피한 조치였다.

김호기 = 60년대와 70년대의 박정희 체제는 성격이 다르다. 유신체제는 반인권, 반민주주의 체제다. 70년대 일련의 긴급조치는 마음대로 보고, 듣고, 말할 수 없는 억압적 감시체제의 절정이었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내걸었지만 군사독재와 동의어다.

이만섭 = 박 대통령이 추구한 ‘자립경제, 자주국방, 조국 근대화, 민족중흥’에 전적으로 공감해서 63년 대선 직전에 기자일을 그만두고 박 대통령을 지원했다. 모시고 침식을 같이하면서 전국 유세를 다녔다. 나를 참 좋아하고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불러 내가 직언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3선 개헌을 하더라. 난 절대 반대했다. 그러다 박 대통령이 꼭 한번만 더 한다고 했다. 좋게 보자면 ‘그림을 그리다가 마저 다 그리고 완성시켜야지’ 하는 집념이었다. 박 대통령에게 ‘4·19혁명 때 시민들이 광화문의 이승만 동상을 넘어뜨리고 목에 새끼줄을 매고 끌고 다니는 걸 눈으로 봤다’고 말해줬다. 무리하게 유신까지 해서 결국 10·26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유신에 반대해 박 대통령에게 미움을 사서 8년간 정치 공백이 있었다.

▲ “쿠데타는 개도국에 흔한 일부…
정·외제품 척결은 5·16뿐” - 이상돈 교수

이상돈 = 우리 사회에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있다. 객관적 평가가 어려울 정도로 정서적인 향수가 강하다. 그렇게 된 원인은 뭐라고 보나.

이만섭 = 첫째 경제를 살렸고 원조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기초를 닦았다. 더 중요한 건 민족의 가능성을 개발했다는 점이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국민에게 심어줬다. 또 진짜 돈 관계가 깨끗했다. 주위도 깨끗하게 했다. 가족이나 친척도 조금 이상한 얘기가 들리면 정보원을 붙여 미행까지 시켜 친척들이 불편했을 만큼 깨끗했다. 전직 대통령 여론조사하면 박 대통령이 절대적으로 지지가 많은 데는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김호기 = 2009년 집필한 책을 인상깊게 읽었다. 현대사의 1차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10·26사건이 일어난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나. 주역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이 전 의장의 개인적인 인연도 남다른 것으로 안다.

이만섭 = 10·26사건 원인은 장기집권과 인권탄압의 강경 정치라고 본다. 근인으로는 YH사건을 지나치게 강경 진압했고, 김영삼 야당 총재를 무리하게 제명한 것이다. 선거 직전에 남덕우 부총리와 김용환 재무장관이 부가가치세를 처음 만들자 물가가 어머어마하게 올랐다. 또한 박 대통령이 강경파인 차지철과 온건한 김재규 부장을 놓고 차지철을 편애한 것도 한 원인이다. 심지어 둘을 불러놓고 선배인 김재규에게 왜 차지철처럼 소신대로 일할 수 없느냐고 타박을 주기도 해 굉장히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군대 선배인 김 부장이 보기에 ‘저 친구 때문에 나라 망하겠다. 그대로 두면 안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0·26사건이 나기 보름 전에 김재규가 나를 안가에 불러 식사를 했다. 그때 한숨을 쉬며 ‘차지철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웬만한 건 수습되는데 차지철은 안된다’고 했다. 김 부장의 충성심은 대단했는데, 장기집권과 차지철 때문에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상돈 = 유신체제가 들어선 뒤 박 전 대통령을 만났나.

이만섭 = 아니다. 내가 유신을 반대하니까 박 대통령이 말하자면 삐쳐서 그 뒤부터 만나지도 않았다. 유신에 반대했다고 미움을 사서 8년 정치 공백이 있었다. 외국도 못 나가게 됐다.

김호기 = 우리 안에 ‘박정희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살아있다. 고도성장이라는 빛도 있지만 성장만능주의, 군사문화, 권위주의, 반공주의 같은 그늘도 있다. 이제는 박정희주의와 결별해야 한다.

이만섭 = 부정적 얘기가 결국은 장기집권, 유신체제 때문이다. 나는 박 대통령 시절을 표현할 때 ‘승계와 단절의 시대’라고 한다. 경제를 건설하고 협동해 잘 살아보자고 노력한 건 승계하고 장기집권, 강경정치, 독재한 것은 단절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박 대통령은 굉장히 소탈하고 인간적이었다. 다만 자기 자리를 노린다거나, 대통령의 권위를 훼손하면 무자비했다. 쿠데타 모의 혐의로 처벌받은 윤필용 장군처럼 최측근도 혼내지 않았나. 난 둘다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빛과 그늘, 승계와 단절이다. 이른바 산업화 세력도 장기집권, 독재로 인한 많은 피해를 보고 고생한 민주세력에 미안한 생각을 가져야 하고, 민주화 세력도 박 대통령을 비롯해 산업화 세력이 경제를 일으켰다는 걸 나름대로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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