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있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

2011.05.02 20:18 입력 2011.05.02 23:43 수정

동일본 대지진에 이어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를 겪고 있는 우리는 4월26일 체르노빌 원전 사고 25주기를 맞았다. 체르노빌 사고 후 25년이 지나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체르노빌 사고는 옛소련에서 개발한 흑연감속로형(RBMK형)의 원전 사고로 이 모델의 특징은 격납용기가 없다는 것이다. 4기의 원자로 가운데 4호기의 정기검사를 위해 가동을 멈추려는 사이 발전 실험을 해버렸다. 긴급정지를 시도했지만 이미 늦었다. 폭주한 원자로는 대폭발을 일으켜 다량의 방사성물질을 대기 중에 뿜어냈다. 타고 있던 4호기는 필사적인 노력 끝에 석관에 봉인됐다. 작업에 투입된 많은 이가 숨졌다. 사고 직후 반경 30㎞ 지역의 주민 13만여명에게 퇴거 명령이 내려졌다. 방사선에 피폭된 어린이들이 속출했다. 고방사능이 검출된 주변지역 주민 27만명도 피난했다. 그야말로 묵시록적인 대재앙이었다.

[와다 하루키 칼럼]‘이유있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

체르노빌 사고는 소련의 국가사회주의체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때 소련에는 고르바초프라는 55세의 젊은 공산당 서기장이 등장,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제창했다. 필자는 1987년 출간한 <내가 본 페레스트로이카>에서 체르노빌 사고가 고르바초프 정치의 ‘결정적인 전기’가 됐다고 지적했다. 이는 2006년 공개된 고르바초프 시대의 정치국 의사록으로 입증됐다.

통제받지 않은 학자·정부 부처 탓

사고 발생 사흘 후인 4월29일 공산당 정치국이 특별협의회를 열었다. 고르바초프는 방사능의 원천 봉인을 주요 과제로 보고 루이시코프 총리를 중심으로 한 사고대책반을 꾸린다. “성실함과 정보 공개가 없으면 안된다”며 “파국을 초래한 원인을 조사할 것”을 주문한 고르바초프는 사고 후 18일째인 5월14일 TV를 통해 사고 상황 및 정부의 대응책을 설명했다. 그후 5월22일 그는 정치국에서 불같이 화를 냈다. “우리는 습관과 놀라울 정도의 무책임에 맞닥뜨리고 있다. 사고는 모든 사람과 연관돼 있다. 본인의 기술적 의무를 뛰어넘어 넓게 보지 못하는 관료주의에 직면하고 있다. 만인이 알아야 한다. 무책임하고 엉터리인 자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음을.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 세계에 감추지 말고 말해야 한다.” 고르바초프는 원자력학의 권위자로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소장이자 과학아카데미 총재였던 알렉산드로프의 이름을 거론하며 이 연구소의 ‘위험한 독점’을 비판했다.

그는 6월5일에도 “체르노빌 사고는 장관이나 중앙위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과 관련돼 있다”면서 “지금 가동 중인 것은 안전성이 최대한 확보돼야 한다. 원전 관련 사안을 인민과 말하는 것을 피해선 안된다. 달콤한 말은 삼가고, 감추지 말고 공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6월16일 공산당 중앙위원 총회에서 고르바초프는 체르노빌 사고를 언급하며 “경제 국면뿐만 아니라 전 사회의 페레스트로이카가 시급하다”는 새로운 전략을 내놓았다.

체르노빌 사고 원인을 조사한 정부위원회의 보고가 7월3일 정치국에서 검토됐다. 위원회는 사고 원인이 위험한 RBMK형 원자로에 있다고 결론을 냈다. 정치국 토론은 그렇게 위험한 원전을 왜 계속 만들어왔는지에 초점을 모았다. 고르바초프는 말했다. “우리는 30년간 당신들(원전 전문가, 관련 부처)로부터 모두 안전하다고 들어왔다. 당신들은 신으로 떠받들어지길 바랐다. 거기서 모든 문제가 발생했다. 왜냐하면 모든 정부 부처와 연구기관은 컨트롤 밖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파국이었다. 지금에 와서도 당신들에게서는 결론에 대해 생각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무엇보다 사실을 확인해야 함에도 이래저래 속이려 한다.”

7월31일 고르바초프는 하바로프스크에서 페레스트로이카는 ‘혁명’이라고 단언했다. 체르노빌 사고를 계기로 그는 사회 전체의 페레스트로이카, 즉 혁명적인 정신 개혁을 촉구한 것이다. 후쿠시마 사고에 직면한 일본 정부와 국민에게서 아직 그러한 반성, 정신적 혁명을 촉구하는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는다. 옛소련에서는 사고 원인으로 격납용기가 없는 원전 모델이 지목됐다. 사고 이후 일시적으로 고조된 원전 비판 목소리가 후퇴, 원자력 르네상스라 할 수 있는 원전 붐이 일었다. 그 배경엔 ‘소련 모델은 너무 낡았고 안전하지 않다. 서구 모델은 신식으로 안전하다’는 논리가 자리한다. 그러나 격납용기가 있는 신형 모델 원자로가 후쿠시마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체르노빌 사고 당시 소련 지도부의 토론 내용을 보면 고르바초프가 원자력 학자와 정부 관련 부처가 비판을 허락하지 않는 독립왕국을 구축, 안전신화로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해온 점을 고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 뿌리는 체제의 차이를 뛰어넘어 동일하고 영원하다고 본다.

원자력학자와 관련 부처는 전력회사와 결부돼 있다. 일본 정부 산하의 원자력안전위원회에는 원자력학자들이 모여 있다. 위원장은 마다라메 하루키 도쿄대 교수다. 대학으로 옮기기 전 그는 도시바의 원자력부 사원이었다. 원자력안전보안원은 경제산업성에 속해 있다. 데라사카 노부아키 원장은 관료다. 도쿄전력에 경제산업성 차관이 낙하산으로 내려온다. 원자력발전소를 컨트롤하는 2개의 조직은 원전이 안전하다고 선전하는 조직이었다. 마다라메는 원전 가동중지를 요구하는 소송에서 전력회사 측의 증인으로 활약해온 인물이다. 이번 사고에서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사고 당일 모이지도 않았다. 또한 일주일 이상 지난 후에야 사고 현장에 직원을 파견했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체르노빌 사고 때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의 제1부소장이자, 현장에서 사고 수습에 매달린 레스가프트라는 인물이 있다. 옛소련의 ‘원자력 마피아’ 일원이었다. 그는 2년 후인 1988년 4월27일 자살했다. 전날은 사고 2주기였으나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는 체르노빌 사고와 관련한 단 한 줄의 기사도 없었다. 이게 그의 자살 원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체르노빌 현장에서 진두지휘를 한 그는 고농도의 방사성물질을 뒤집어썼다. 죽음을 각오한 그는 죽을 장소, 시간을 기다렸을 것이다. 프라우다는 4월30일 그의 죽음을 보도했다. 그리고 5월20일에는 두 개 면에 걸쳐 그의 유고(遺稿) ‘이 일에 대해 말하는 나의 책무’를 실었다.

보호·관리 시스템 결함 경고 무시

그의 글은 사고 당시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소속 부처의 공산당회의에 참석한 그는 “우리 부에서는 ‘만사 순조’라는 보고에 익숙했지만 이 보고는 특히 승리의 전투 보고와 닮아 원자력산업·원자력학의 찬가를 부르는 것”이었다고 적고 있다. 보고의 마지막에서는 체르노빌 사고 이야기가 나왔다. “누군가가 경솔한 짓을 저질렀으나 원자력의 전진은 멈추지 않는다”는 식으로 결론지어졌다는 것이다. 회의 후 그는 비행기를 타고 키예프로 날아갔다. 공항에서 사고 마을로 향하던 중 자신은 이 사고가 ‘전 지구적 사건’, 폼페이 멸망과 같은 ‘인류사에 남을 사건’이 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사고수습대책팀의 책임자가 됐다. “체르노빌 원전에 도착하니 나는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체르노빌 사고는 수십년간 취해온 잘못된 경영방식의 피날레, 그 모든 것의 도달점이라고. 물론 체르노빌 사고에는 구체적인 책임자들이 있다. 이 원자로의 보호·관리 시스템에는 결함이 있고, 이를 아는 수많은 연구자들은 그 결함을 지적했다. 그러나 건설책임자는 추가공사를 꺼리고 보호·관리 시스템을 고치는 일을 서둘지 않았다.”

경고했던 사고가 터졌고, 그는 책임을 진 것이다. 그의 회상에는 체르노빌 사고에 맞서 싸운 사람들에 대한 추억도 담겨 있다. “나는 몇 번이고 4호기의 매우 위험한 구역에 들어갔다. 나는 사람들에게 투입될 곳의 상황을 설명하고 나를 도와줄 사람과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 대열을 떠나거나, 앞으로 나아가지 않은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비극이 도사렸지만 그들이 재빠르게 움직여줘 기분이 고양됐다.”

올해 4월26일 체르노빌 25주기 기념식에서는 후쿠시마 사고가 언급됐다. 체르노빌 사고현장에서 일한 바 있는 한 명이 일본 TV에 “후쿠시마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은 우리의 형제다. 힘내라”고 말했다. 인류는 두 원자력발전소 사고의 교훈을 살려야 한다.

東北大地震の中に生きて、福島第一原子力発電所の事故に苦しんでいる私たちは、4月26日、チェルノブイリ原子力発電所事故25周年の記念日を迎えた。つまりチェルノブイリから25年たって、フクシマが起こったということである。

 チェルノブイリの事故は、ソ連で開発された黒鉛減速炉型(RBMK型)の原子力発電所の事故で、この型の特徴は格納容器がないことである。この発電所には4基の炉があった。その内の4号炉で、定期検査のため運転を止める間に発電の実験を行い、その後緊急停止をしようとしたところ、原子炉が暴走して、大爆発をおこし、大量の放射能を大気中に噴き上げたのである。燃えている4号炉は死に物狂いの努力で、いわゆる石棺の中に封じ込められたが、この作業のために働いた人々の中から多くの死者が出た。事故直後半径30kmの地域の住民13・5万人は立ち退きを命令された。その人々の中では、とくに子どもに放射線被爆の被害が出ている。その後高い放射能が検出された周辺地域からも、27万人の人々が追加的に避難させられるにいたった。まさに黙示録的な大災害であった。

チェルノブイリの事故はソ連の国家社会主義体制に大きな打撃を与えた。このとき、ソ連にはゴルバチョフという55歳の若い共産党書記長が登場して、「グラスノスチ」(公開性)を語りながら、経済の「ペレストロイカ」(改建、改造)を提唱しはじめていた。

私は1987年の本、『私の見たペレストロイカ』で、チェルノブイリ事故がゴルバチョフ政治の「決定的な転機」となったと指摘したのだが、2006年に公刊されたゴルバチョフ時代の政治局議事録によると、そのことがまさに裏付けられる。

事故がおこって共産党政治局が特別協議会を開いたのは、3日後の4月29日のことである。その会のまとめとして、ゴルバチョフは、放射能の源泉を封じ込めることが主要な課題だとして、ルイシコフ首相を中心とする作業グループを設置する、「住民との工作では誠実さと情報開示がなければならない」、「破局を導いた原因を調査する」と指摘した。5月14日、事故から18日目にゴルバチョフはテレビを通じて、事故の状況とそれに対する政府の措置に付いて語った。その演説は精細のあるものとは言えなかったが、その演説のあとの5月22日の政治局でゴルバチョフは怒っていた。「われわれは慣れと驚くべき無責任さにぶつかっている。」「われわれはいま自国の人民のコントロール、全世界のコントロールのもとに置かれているのだ。起こったことはすべての人に関わっている。自分の直接の技術的義務を越えて広く見ることができないお役所心理の結果にぶつかっている。万人が知るべきだ。無責任で、いい加減であった者は絶対に容赦されないということを。どんなことからも逃げるつもりはない。楽勝を自慢するような態度は粉砕しなければならない。何が起こっているか、全世界につつみかくさず語らなければならない。」ゴルバチョフは原子力学の権威で、クルチャートフ原子力研究所所長、かつ科学アカデミー総裁のアレクサンドロフの名をあげ、この研究所の「危険な独占」を指摘した。

6月5日にもゴルバチョフはまた発言した。「チェルノブイリは万人に関わる。すべての大臣、すべての中央委員、中央委員会の全職員に関わっている。」「現に稼働中のものは最大限の安全性が確保されねばならない。原発のことを人民と話すのを避けてはならない。甘いことを言わず、隠さずに話すべきだ。」

そうして、6月16日の共産党中央委員総会で、彼はチェルノブイリ事故を語った上で、「経済の局面だけでなく、全社会の深刻なペレストロイカ」が必要であると新しい戦略を打ち出したのであった。
チェルノブイリ事故原因調査政府委員会の報告が政治局で検討されたのは、7月3日のことであった。委員会はRBMK型の炉が危険であった、事故の原因はそこにあると結論を報告した。政治局の討論はどうしてそのような危険な炉で原子力発電所をつくりつづけてきたのかに集中した。ゴルバチョフは言った。「われわれは30年あなた方(学者専門家と大臣たち)からすべては安全だと聞かされてきた。あなた方はわれわれがあなた方を神とあがめることを期待した。このことからすべてが起こったのだ。なぜならすべての関係省庁と研究機関はコントロールの外におかれたからだ。結果は破局だった。いまにいたっても、あなた方は結論について考えている様子がない。なによりも事実を確認すべきなのに、あれこれごまかそうとしている。」

7月31日、ゴルバチョフはハバロフスクで演説し、ペレストロイカは「革命」であると言い切った。チェルノブイリの事故に直面して、ゴルバチョフは精神の革命を求めた、それを通じて社会全体のペレストロイカ、革命的改革を追求したのである。東北大震災、フクシマ事故に直面した日本の政府と国民はまだそのような反省、精神の革命を求める動きにいたっていないことが感じられる。

ソ連では、事故の原因については、格納容器のない原子力発電所の型が問題にされた。チェルノブイリ事故以後、一時高まった原子力発電所批判の声が後退し、最近では原子力ルネッサンスともいうべき原子力発電ブームがおこった。ソ連の型はあまりに古く、安全でない。西欧の型は新式で、安全だということがこの背景にある。しかし、格納容器のある新型の炉がフクシマで水素爆発をおこしたのである。

いまチェルノブイリ当時のソ連の指導部の議論の中で、ゴルバチョフが、原子力学者と関係省庁とが批判を許さぬ独立王国をきずき、安全神話で人々の意識を支配してきたことを告発しているのを読むと、問題の根が、体制の違いを超えて同一である、永遠であることを感じる。

私たちの社会では、原子力学者と関係省庁が電力会社と結びついている。政府におかれた原子力安全委員会には原子力学者が集まっている。委員長は斑目(まだらめ)春樹東京大学教授である。斑目氏は大学に移る前は東芝の原子力部の社員だった。原子力安全保安院は経済産業省に属している。寺坂信昭院長は官僚である。経済産業省からは東京電力に次官が天下りする。原子力発電所の安性をコントロールする二つの組織は原子力発電所が安全だということを宣伝する組織だった。斑目氏はなんども反対派の原子力発電所稼働停止をもとめる訴訟で、電力会社側の証人として活躍してきた人である。このたびの事故で、原子力安全委員会は事故当日集まることもできず、フクシマの現地にメンバーが派遣されたのも一週間以上もあとであったということが暴露されている。

チェルノブイリ事故のさい、クルチャトフ原子力研究所の第一副所長であって、事故を収束させるために現地にはりついたレスガフトという人物がいる。まぎれもなくソ連の原子力マフィアの一員っであった人である。この人が事故対策の現場ではたらき、二年後に自殺した。事故発生から二年と一日目の1988年4月27日のことであった。前日は2周年の日であったが、共産党機関紙『プラウダ』にはチェルノブイリ事故について一行の記事もなかった。あるいはそれを見て、彼は自殺したのか知れない。チェルノブイリの現場で陣頭指揮をしていた彼は高濃度の放射能を浴びていた。死を覚悟していた彼は死ぬ場所、死ぬ時を待っていたのだろう。『プラウダ』は4月30日彼の死を報じた。そして、翌月の20日に彼の遺稿「このことについて語る私の責務」を二面にわたり掲載した。

その文章は、事故当日からはじまっている。彼は属している省の共産党会議に出ていた。わが省では万事順調だという報告に馴れっこになっていたが、この報告は特に勝利の戦闘報告に似て、原子力産業・原子力学に賛歌をうたうものだったと書いている。報告の終わりでチェルノブイリ事故の話がされた。どこかの誰かがへまをやらかしたが、原子力の前進はとまらないというように結ばれた。会議のあと、レスガフトは電話で召集されて、空港へ行き、キーエフへ飛んだ。空港から事故の町へ向かう間、自分には、この事故が「地球規模の事件」、ポンペイの壊滅のような「人類史にのこる事件」となるとは思いつかなかったと認めている。プリピャチの町について、彼は事故収拾対策チームの責任者になった。

「チェルノブイリ原子力発電所に到着してから、私ははっきりとある結論に到達した。チェルノブイリ事故はわが国において数十年来とられてきた間違った経営のやり方のフィナーレ、そのすべての到達点であると。もちろん、チェルノブイリで起こったことには、抽象的でなく、具体的な責任者たちがいる。われわれはいまではすでに知っている。この炉の保護管理システムには欠陥があり、少なからぬ研究者にはわかっていたから、彼等はその欠陥を除去する提案をおこなったのだと。しかし、建設責任者は、急いで追加工事をするのをいやがり、保護管理システムを変えることを急がなかった。」

彼はすでに警告していたことの結果生じた事故と闘った。そうして責任をとったのである。回想には、チェルノブイリの事故の収束のために闘った人々の追憶が述べられている。「私自身何度か4号炉のかなり危険な区域に入った。私は人々にこれから働くところの条件を説明し、進んで私を助けてくれる人と働きたいと言った。そういうとき、隊列をはなれ、前に進まなかった者は誰一人としていなかった。」「悲劇性がすべの出来事の基本的な背景であった。しかし、ある種の高揚した気分が生まれたのは、人々があのように働いてくれたこと、われわれの依頼にあんなにすばやく反応してくれたこと、さまざまな技術的なやり方があんなにすばやく試されたことのためである。」

 本年の4月26日チェルノブイリ25周年の記念の式典ではフクシマのことが語られた。チェルノブイリで事故収束のために働いた労働者の一人が日本のテレビに向かって、「フクシマで闘っている人々はわれわれの兄弟だ。がんばってほしい」と述べた。人類は二つの原子力発電所の事故の教訓を生かさなければなら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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