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와 후쿠시마 ‘비극의 뿌리’

2011.09.05 19:25 입력 2011.09.06 15:27 수정

매년 8월이 되면 일본 NHK방송은 과거를 되돌아보는 특별 프로그램을 준비한다. 특히 올해 방영된 2개 프로그램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역사가인 필자도 그 수준 높은 내용에 압도됐다. 그 방송을 언급하고 싶다.

첫 방송은 8월9일 나가사키 원폭투하 기념일 밤에 전파를 탄 「NHK 스페셜」의 ‘원폭투하-살리지 못한 극비정보’다. 세계대전 끝무렵에 미국은 2발의 원자폭탄을 일본에 떨어뜨렸다. 8월6일 히로시마에 우라늄 폭탄을, 8월9일엔 나가사키에 플루토늄 폭탄을 투하한 것이다. 2발의 폭탄으로 히로시마에서는 9만~12만명이 숨지고 나가사키에서는 6만~7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의 전쟁 책임, 전쟁범죄 책임을 인정한다 해도 원폭투하는 제노사이드(집단학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와다 하루키 칼럼]나가사키와 후쿠시마 ‘비극의 뿌리’

그러나 이 원폭투하는 일본을 항복으로 몰기 위한 미국의 군사작전이었다. 다만 그 효과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돼왔다. 최근에도 하세가와 쓰요시 캘리포니아 대학 교수와 아사다 사다오 도시샤 대학 교수 간 논쟁이 화제가 됐다. 이 논쟁에 대해 필자는 히로시마 원폭투하와 소련의 참전이 일본의 패전에 공히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했다는 것만으로 미국을 비난할 수 없다. 그러나 나가사키 원폭투하는 별개의 문제다. 이는 소련의 참전 영향력에 대항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형태의 원자폭탄을 실험하기 위해 행해진 범죄적인 살육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진 후 무방비 상태에서 나가사키에 또 한 발의 원폭이 투하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일본 군부는 파상적 공격을 퍼부은 B29에 대해 전투기 추격을 관둔 상태였다. 이는 본토 결전에 대비해 병력을 아낀다는 명목으로 취해진 방침이었다. 즉 100대의 B29 공습에 프리패스를 준 일본군은 히로시마에 온 단 한 대의 B29에 눈을 돌리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 B29가 원폭을 투하했다면 3일 후 나가사키에 날아온 B29 한 대는 왜 무시했을까. 여기엔 큰 의문이 남는다. 이 의혹을 파헤친 것이 8월9일의 이었다. 방송은 놀랄 만한 사실을 공개했다.

일본 군부는 1943년께부터 원자폭탄 개발에 착수했으나 1945년 6월에는 단념했다. 미국이라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거짓 보고했지만 내심 불안했다. 이에 육군참모본부는 B29의 특이한 움직임이 없었음에도 ‘특종정보부’를 극비 설치, 전파 도청에 힘을 쏟았다. 1945년 6월, 갑자기 ‘콜사인 V600’대의 전파를 사용하는 10여기의 B29가 티니안 섬에 들어간 사실을 알아냈다. 특종정보부의 첩보결과를 참모본부에 보고했던 호리 에이조 소좌는 “이 부대가 어떤 목적을 가진 부대인지는 몰랐다”고 말하지만 방송은 의문을 던진다.

8월6일 오전 3시, 특종정보부는 V675의 콜사인에서 통신하는 B29가 이오지마를 통과할 때 “목표에 진행 중”이라는 무선내용을 잡았다. 7시20분 B29 한 대가 히로시마로 향했고 히로시마 상공에서 V675의 전파를 쐈다. 호리 소좌는 참모본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참모본부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히로시마군사령부에도 보고하지 않고 발령됐던 경계경보를 해제했다. 이 첫 번째 B29는 기상정찰기였다. 한 시간 후 두 번째 B29가 히로시마 상공에 도착, 원폭을 투하했다.

육군은 당초 이 폭탄을 원폭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참모본부 내부에서는 원폭임을 인정했다. 8월8일 특종정보부가 원폭 탑재기의 콜사인을 밝혀낸 공적에 대한 표창식이 열렸다. “이 비행기가 다시 오면 전부 격멸한다, 너희들 수고했다”고 치하했다고 그 자리에 있던 다나카 구니오 대위(90)가 증언했다.

다음날인 9일 미명에 다시 V675의 콜사인을 가진 전파가 티니안 섬에서 발신됐다. 이를 포착한 오타 아라오 중위(90)는 “알고 있었음에도… 너무 분하다”라며 자신이 탐지한 정보가 활용되지 않은 데 대해 분개했다. 물론 이번에도 참모본부에는 보고됐다. 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의 측근 이노우에 다다오 중좌의 <비망록>에는 “8월9일 특수폭탄 V675 통신상 사전에 탐지 나가사키 폭격 5시간 전”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러나 이때도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나가사키에 경계경보도 발령되지 않은 채 오무라 비행장의 전투기도 출격하지 않았다. 당시 히로시마 상공에서 원폭투하 순간을 본 오무라 비행장의 전투기 조종사 혼다 미노루(88)는 나가사키 투하는 자신이 저지한다는 결의를 가졌으나 명령이 떨어지지 않고 추격할 수 없었다는 데에 자책해왔다. 그는 방송 마지막에서 일련의 과정을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알고 있으면서 왜 명령을 내리지 않았을까요. 5시간이면 충분히 준비할 수 있었는데도. 이것이 일본의 모습입니까. 이런 일을 용서한다면 같은 일이 또 일어날 것입니다.”

방송은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으로 갈무리했다. “원폭투하를 둘러싼 움직임을 군이 포착했다는 사실은 모두 없는 것으로 돼버렸습니다. 군 지도자들은 위험이 닥쳐오는 걸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그 정보를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에 걸친 비극은 국가를 이끌어갈 사람의 책임의 무게를 현 시대에 묻고 있습니다.” 일본군이 국민을 지키지 않은 죄의 깊이를 이만큼 파헤친 작품은 없다고 필자는 느꼈다.

두 번째 프로그램은 8월14일 방영된 ‘미국발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심층’이다. 사고를 일으킨 후쿠시마 제1원전의 1호기부터 5호기 원자로까지는 모두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GE)이 개발한 비등수(沸騰水)형 원자로 ‘마크 1’이다. 이 방송은 미국에서 1975년 이후 마크 1의 구조상 결함으로 논란이 돼왔으나 일본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담담히 고발했다.

3명의 GE 기술자가 마크 1의 구조적 결함을 지적하는 의견서를 1975년에 제출했다. 격납용기가 너무 작고, 중대사고가 발생하면 고압수증기로 압력제어 튜브를 파괴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3명은 안전이 확인될 때까진 운전을 정지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러나 상사는 GE의 원자력사업은 끝나게 된다며 무시했다. 이에 항의한 3명은 1976년 2월 GE를 퇴사했다. 같은 달 의회 원자력위원회에서 공청회가 열렸고 기술자의 진술에 맞서 GE 측도 맹렬히 반격했다. 정부의 촉구로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교수 등이 보고서를 제출했다. 결론은 자동차 사고, 항공기 사고와 비교해도 원전으로 사람이 죽는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낮아 그 확률은 50억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가 힘을 얻어 GE 기술자들의 직을 건 비판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끝났다.

그러나 3년 후인 1979년 3월28일 스리마일 섬 원전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운전 실수로 멜트다운이 일어난 것이다. 이 사고 후 1981년 미국 정부 산하 원자력규제위원회(NRC)는 중대사고 발생 시 원전의 안전성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오크리지 국립연구소가 마크 1에 대해 모든 전원이 차단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보고했다. 비상용 배터리가 4시간 사용된다면 모든 전원이 차단된 지 5시간 후에 연료가 노출해 6시간 후에 멜트다운이 시작되고 7시간 후에는 압력용기 하부가 손상돼 수소가 압력용기에서 나와 8시간 후에 격납용기도 손상한다는 게 보고서의 결론이다. 마크 1은 모든 전원이 차단되면 매우 약하고 위험한 원자로라는 얘기다.

이 보고는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또다시 원자력 업계의 강한 반격으로 이번에도 흐지부지됐다. 1989년 9월이 되자 NRC는 멜트다운으로 용기 내의 압력이 높아졌을 때 수증기와 수소가스를 밖으로 방출하기 위해 마크 1에 긴급환기통을 부착하라고 지시했다. 미국에서 시작한 이런 움직임은 일본에도 전달돼 1987년부터 중대사고 대책 필요성이 검토됐다. 1993년 5월 일본 원자력위원회는 “우리 나라의 원자로 건설의 안전성은 충분히 확보돼 있으며 공학적으로 심각한 사고는 현실적으로 일어난다고 보지 않는다”면서도 미국의 대책을 따라, 긴급환기통을 설치할 것을 지시했다.

미국 기술자들이 보기에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무엇보다도 마크 1의 사고였다. 35년 전부터 사고 시뮬레이션을 거친 마크 1이 드디어 3월11일에 현실로, 그들이 예측한 대로 사고를 일으킨 것을 보고 흥분을 감출 수 없다. NHK 프로그램은 이 사실을 잘 전달하고 있다. 한편 NRC의 전 안전부장 덴튼은 “미국에서 마크 1은 지진이 없는 동부지방밖에 없다”며 “NRC는 지진 다발지역에서의 마크 1에 대한 안전성은 검증하지 않았다”고 변명했다. 미국이 일본에 판 마크 1 원자로는 결함상품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후쿠시마 사고는 미국 정부와 기업에도 책임이 있다. 그리고 미국에서 그만큼 안전성이 논의됐음에도 이에 무관심하고 원전 안전신화에 취한 일본의 관청, 전력회사, 학자들의 무책임도 심각하다.

원폭투하의 정보를 알면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무책임이 반복되고 있다. 이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이어졌다. 두 번째 방송을 보고 필자는 거듭 충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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