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스페인 무적함대의 영웅이었던 ‘괴짜 군인’의 전쟁 회고록

2013.03.01 19:25

▲콘트레라스 선장의 모험 … 알론소 데 콘트레라스 지음·정진국 옮김 | 글항아리 | 300쪽 | 1만6000원

“홀란드 포병이 적에게 노출된 포를 장전하던 중이었다. 놈들은 그에게 포를 쏘았고, 포탄은 그 머리에 떨어졌다. 박살이 났다. 주위 사람들은 그 골수를 뒤집어썼다. 또 뼛조각이 한 친구의 원래 뒤틀린 매부리코를 후려쳤다. (중략) 이날 우리는 난바다에서 종일 싸웠고, 밤이 되었을 때 적은 인근의 육지에 상륙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우리는 해안으로 그들을 쫓았다. 새벽에 다시 잠잠해졌다. 마침 동정녀 마리아의 날이었다.”

지중해 몰타 섬 ‘성 요한 기사단’ 단원이었던 알론소 데 콘트레라스(1582~1641)가 남긴 전투 기록이다. 콘트라레스는 1601년 오늘날 터키 영토 부근인 실리도니아 곶에서 오스만 함대와 벌어진 이 전투에 참가해 포로와 금화를 비롯, 총 1500두카트를 배당받는다. 그는 이 돈을 술과 여자와 도박에 완벽하게 다 써 버리고 다음 목적지인 함마메트(튀니지 근처)를 향해 배에 오른다.

[책과 삶]스페인 무적함대의 영웅이었던 ‘괴짜 군인’의 전쟁 회고록

이 책은 스페인 출신 군인 겸 선장 알론소 데 콘트레라스가 직접 남긴 회고록이다. 콘트레라스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16남매를 둔 가난한 기독교인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살 때 학교 친구와 싸우다 살인을 저질러 1년간의 유배생활을 한 뒤, 군인이 되고 싶다며 추기경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공동 통치하던 가문)의 6남 알베르토 왕자의 부대에 취사병으로 입대한다.

콘트레라스의 청년기는 유럽 대륙에서는 ‘30년 전쟁(1618~38)’이, 지중해에서는 ‘오스만 제국’과의 일전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그는 알베르토 왕자가 네덜란드로 부임하자 다시 이탈리아 민병대에 들어가 ‘레반트’라 불리는 동지중해를 중심으로 터키인·무어인(북아프리카인) 함대와 일전을 치르며 무훈을 쌓는다. 이후 서인도 제도에 진출해 영국의 사략선(국가로부터 공인받은 해적) 월터 롤리와 대적하는 등 ‘가톨릭 세계의 전무후무한 괴물’이라는 평가를 남긴 인물이다.

회고록을 발굴한 스페인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이 책을 두고 ‘유럽 역사 최초의 직업군인’의 삶을 그렸다고 평한다. 중세에 직업군인은 없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비정기적으로 전투에 참가하는 전사가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종교개혁, 신대륙의 발견 등으로 유럽에서 전쟁이 일상화되고, 총화기와 성곽축조술이 발달하면서 전통적 군대와 전술로는 전쟁에서 이기기 어렵게 됐다. 포병과 보병이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늘 제식훈련을 하는 ‘직업군인’이 등장하는 때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왕명을 따르는 직업군인은 국가와 폭력을 독점하면서 이뤄지는 근대국가 성립의 토대를 쌓았다.

하지만 콘트레라스가 활약하던 시대 ‘직업군인’은 아직 이 단계에 이르지는 않았다. ‘왕명을 따르는 직업적 전투집단’은 탄생했지만, 엄격한 규율과 확고한 민족의식 등이 개개인의 내면에까지 침투하지 않았던 것이다. 군인들은 여전히 충동적이고 모험가적인 동기에 지배받았다. 콘트레라스는 노획물은 남김없이 다 써버리고 저축 따위는 하지 않으며, 선장이 도박을 금하며 카드와 주사위를 다 빼앗아버리면 ‘벼룩과 이’를 이용해 도박판을 벌인다. 적군이 아군의 시신을 훼손한 데 대한 분풀이로 포로의 귀와 코를 잘라내 산 채로 바다에 수장시킨다. 가는 곳마다 유곽의 아가씨나 백작부인과의 로맨스도 빠지지 않는다.

중세적 낭만과 모험적 충동 대신 민족의식으로 단합하고 유기체로서 움직이는 근대국가의 군대는 18세기 나폴레옹 시대에 가서야 등장한다. 콘트레라스는 종교적 열정이 추동한 ‘십자군 전쟁’과 혁명이 만들어낸 ‘나폴레옹 시대’의 사이에 있다. 이른바 ‘대항해시대’의 끝무렵, 근대적 질서가 완벽하게 사회를 장악하기 전 자유분방하고 폭력적이며 충동으로 가득한 사회상은 군인 특유의 간결하고 담담한 문체를 통해 더욱 생생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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