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 김영수 작품 재구성도시 빈민 이야기 다룬 ‘혈맥’

2013.05.22 22:09
문학수 선임기자

모든 것이 다 불친절한 120분… 관습에 젖은 연극판에 ‘돌직구’

이 연극은 불친절하다. 관객의 눈앞에 펼져지는 장면들은 서사의 틀에서 벗어나 분절적인 이미지들로 채워진다. 줄거리로 작품을 이해하려는 관객에게는 러닝타임 120분이 고역이다. 그렇다고 이미지가 세련된 것도 아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난투극, 불어 터진 컵라면으로 허겁지겁 배 채우기, 죽기 살기로 펼쳐지는 남녀의 싸움, 허공으로 날아갔다가 갈갈이 찢겨 바닥으로 떨어지는 성경책 같은 것들이 관객의 이목을 괴롭힌다. 말하자면 ‘좋은 그림’을 무대에 펼쳐놓는 감각적인 이미지극도 아니다. 비논리적이고 몰상식한 장면들이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까닭에 관객은 불편하다. 그럼에도 연출가 김현탁은 극의 시작부터 능청을 떤다. 극중의 ‘털보’가 이발소 의자에 앉아 객석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오늘 잘 오셨네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재밌게들 보시기 바랍니다. 아자아자! 파이팅!”

극작가 김영수(1911~1977)의 <혈맥>이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무대에 올랐다. 이른바 사실주의 연극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중등과정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한국 현대연극사의 ‘고전’이다. 배경은 광복 직후인 1947년. 당시만 해도 서울 외곽이었던 성북동 방공호에서 비루한 삶을 이어가는 도시 빈민들의 이야기다. 지긋지긋한 방공호 속의 극빈, 그 안에서도 이리저리 꾀를 내는 인간의 이기심, 세대 간의 갈등, 좌우익의 대립 등 광복 직후의 세태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희곡이다.

[객석에서]극작가 김영수 작품 재구성도시 빈민 이야기 다룬 ‘혈맥’

하지만 연출가 김현탁은 원작을 해체해 재구성하면서 또 다른 <혈맥>(사진)을 무대 위에 올려놨다. 물론 하나의 맥락은 여전히 살아 있다. 원작에 등장하는 ‘과거의 헐벗은 군상’을 ‘지금 이곳의 헐벗은 배우들’로 치환했다는 점이다. ‘혈맥’이라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애초의 대본은 ‘가족 간의 끈끈함’을 강조했지만 연출가 김현탁은 그에 대해서도 도리질을 친다. 다시금 무대에 오른 <혈맥>은 ‘가족’이라는 단위마저 해체해 ‘개인’에 초점을 맞춘다. 아울러 ‘방공호’는 달리는 버스로 치환됐다. 텅 빈 무대에는 의자 몇 개가 놓였고, 천장에서 내려온 승객용 손잡이 두 개가 덩그러니 매달려 있다. 그렇게 인물과 공간과 시간이 ‘지금 여기’로 옮겨졌다. 불편하지만 강렬한 몇 개의 장면이 기억에 새겨진다. 예컨대 아버지 털보와 아들 거북이의 피 튀기는 싸움, 행상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원팔이가 버스 손잡이에 매달려 기계체조를 하는 장면, 신고산타령을 흥얼대던 옥매가 기독교 광신자인 어머니의 성경책을 빼앗아 갈갈이 찢어발기는 모습 등이 그렇다. 현실주의자 원팔과 이상주의자인 아우 원칠이가 뒤엉켜 싸움을 벌이던 와중에 영화 <러브 스토리>의 주제가 ‘눈싸움’이 천연덕스럽게 울려퍼지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옥매와 털보가 한바탕 격투를 치른 후에 숨 넘어갈 듯한 옥매의 신음소리도 강렬하다.

극중의 거의 모든 장면들은 중첩된 이미지로 계산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원팔이의 기계체조 장면. 그것은 ‘사회’라는 중력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위태롭게 흔들리는 삶, 버스 손잡이에라도 끝까지 매달려보겠다는 안간힘처럼 보인다. 그래서 웃기는 장면인 동시에 ‘숭고한 의식’처럼 다가온다.

‘잘 만들어진 연극’을 기대하고 예술의전당을 찾은 관객들은 이 ‘헐벗은 연극’을 대면하고 당혹스러울지도 모르겠다.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김현탁 연출가와 11명의 배우들이 보여주는 무대는 ‘헐벗은 삶’ 그 자체라고 할 만하다. 무대의 단출함은 물론이거니와, 연습실에서나 입음직한 허름한 트레이닝복을 그대로 입고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 직광으로 떨어지는 8대의 조명만으로 무대의 남루함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모습도 그렇다. 그래서 이 연극은 ‘웰 메이드’라는 관습에 함몰되고 있는 한국 연극판을 향해 날리는 ‘돌직구’처럼 보인다. 6월2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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