짭짤·새콤·달달 ‘쏴’··· 부산 수제맥주는 목을 적시는 파도다

2019.05.08 17:52 입력 2019.05.10 11:00 수정
부산 | 글·사진 김형규 기자

부산은 한국 수제맥주 문화의 중심지다. 개성 강한 양조장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맥주를 맛보는 브루어리 투어는 하룻밤으로 부족할 것이다.

부산은 한국 수제맥주 문화의 중심지다. 개성 강한 양조장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맥주를 맛보는 브루어리 투어는 하룻밤으로 부족할 것이다.

몰랐겠지만, 부산은 맥주의 도시다. 그냥 맥주가 아니고 수제맥주(craft beer)의 성지다. 미국의 맥주 평가 사이트 ‘레이트비어’(Ratebeer.com)가 2016년 발표한 ‘한국 맥주 베스트 10’에 부산 맥주가 4개나 포함됐을 정도다. 수제맥주는 소규모 양조장에서 만든 개성 있는 맥주를 말한다. 부산의 수제맥주 양조장을 돌며 한 잔씩 마시다 보면 매력적인 상대를 계속 바꿔 만나며 소개팅을 하는 기분이 든다. ‘브루어리(맥주 양조장) 투어’의 묘미다. 부산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맥주를 만드는 브루어리 4곳을 엄선해 소개한다.

■부산 수제맥주의 조상님

갈매기 브루잉은 2014년 문을 연 부산 최초의 수제맥주 양조장이다. 외국인과 젊은층 유동인구가 많은 광안리에 갈매기 브루잉이 들어오면서 주변 상권에 맥주 펍이 우후죽순 생겼고, 이제 광안리는 부산 수제맥주 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캐나다와 영국 출신 외국인 4명이 모여 시작한 갈매기 브루잉은 홉향이 진한 미국식 수제맥주를 지향한다. 맥주는 소맥의 재료 따위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30여종의 개성 넘치는 맥주를 선보인다.

갈매기브루잉의 대표맥주 4종. 왼쪽부터 라이트하우스 블론드, 갈매기 IPA, 캠프파이어 앰버, 에스프레소 바닐라 스타우트

갈매기브루잉의 대표맥주 4종. 왼쪽부터 라이트하우스 블론드, 갈매기 IPA, 캠프파이어 앰버, 에스프레소 바닐라 스타우트

대표 맥주인 ‘갈매기 IPA(인디안 페일 에일)’는 강렬한 홉의 풍미와 은은한 솔향이 입안에서 만들어내는 조화가 일품이다. 전형적인 IPA 맛이지만 완성도 면에서 보면 한국에서도 이런 맥주를 만들 수 있구나 감탄하게 된다.

‘유자 고제’는 산뜻한 신맛에 삼키고 나면 입에 남는 짭짤한 맛이 좀처럼 잊기 힘들다. 고제는 독일식 사워(sour) 맥주인데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독일 고제 지방에서 만들기 시작한 맥주다. 발효 전 단계에서 국산 천일염과 고수 씨를 더해 유자 고유의 풍미를 독특하게 살렸다. 드라이한 끝맛은 화이트와인을 떠올리게 한다. 피자 같은 느끼한 음식과 궁합이 좋다.

갈매기 브루잉의 유자 고제. 고제는 독일식 사워 맥주의 일종이다.

갈매기 브루잉의 유자 고제. 고제는 독일식 사워 맥주의 일종이다.

신선한 커피 원두를 넣은 ‘에스프레소 바닐라 스타우트’는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고, 과일향이 도드라지는 ‘라이트하우스 블론드’는 에일맥주 입문자용으로 추천할 만하다.

남천동에 위치한 갈매기 브루잉은 3층 건물에 양조장과 펍을 운영하고 있다. 2층 펍에는 대형 젠가와 보드게임 등 맥주와 함께할 다양한 즐길거리가 준비돼 있다. 해운대·서면·남포·부산대·경성대 등 5개 지역 프랜차이즈 펍에서도 갈매기 맥주를 맛볼 수 있다.

■“진짜 맥주맛이 뭔지 보여줄게요”

“탱크에서 바로 꺼낸 맥주가 가장 신선하고 맛있어요.” 정통 체코식 맥주를 만드는 프라하993의 브루마스터(맥주양조사) 마테이 자바(30)는 인사를 나누자마자 맥주잔부터 건넸다. 투명한 황금빛이 선명한 맥주는 달고 시원했다. “한국 사람들에게 ‘진짜 맥주’의 맛을 보여주고 싶다”는 그의 말이 허튼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탱크에서 직접 맥주를 따라주는 프라하993의 체코인 브루마스터 마테이 자바

탱크에서 직접 맥주를 따라주는 프라하993의 체코인 브루마스터 마테이 자바

프라하993은 2016년부터 부산에서 체코식 맥주를 만들어 판다. 상호의 993은 체코에서 처음으로 맥주를 양조한 프라하 브제브노프 수도원의 설립 연도인 서기 993년에서 따온 숫자다. 몰트와 홉, 이스트 같은 원재료는 물론 발효탱크 같은 양조도구까지 전부 체코에서 가져다 쓴다. 그런데 왜 하필 부산일까. 분석업체에 의뢰한 결과 한국의 다른 도시보다도 부산의 물이 체코 물과 성분 면에서 가장 흡사했다고 한다.

프라하993의 맥주를 골고루 맛볼 수 있는 샘플러

프라하993의 맥주를 골고루 맛볼 수 있는 샘플러

프라하993의 대표 맥주는 필스너 계열의 ‘페일 라거’다. 라거맥주는 수제맥주의 주류를 이루는 에일맥주에 비하면 향과 빛깔의 다양성은 덜하지만 청량감과 신선함이라는 결 다른 매력이 있다. 다양성이라는 수제맥주의 매력을 보여주기 위해 위트(밀맥주), IPA, 스타우트 등 다른 맥주도 만들고 있다. 국산 농산물을 활용한 녹차 라거, 유자 맥주도 개발 중이다.

맥주 안주로는 체코 전통 레시피로 만든 콜레뇨가 그만이다. 돼지 무릎뼈를 오랜 시간 훈제한 요리인데 다양한 소스와 양배추 절임을 곁들여 먹는다. 매주 화요일 오후 5~8시에는 맥주 1+1 서비스(해피아워)를 제공한다.

체코 전통 레시피로 만든 훈제 족발요리 콜레뇨

체코 전통 레시피로 만든 훈제 족발요리 콜레뇨

프라하993은 부산에서 요즘 핫한 복합문화공간 ‘F1963’에 입점해 있다. 45년 동안 고려제강의 와이어로프 공장으로 사용되던 공간은 전시공간과 산책로, 서점, 커피숍 등이 밀집해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소주 배럴에 숙성시킨 색다른 ‘소맥’

부산에서 영국식 맥주 문화를 경험하고 싶다면 고릴라 브루잉으로 가면 된다. 영국 맥주는 홉향이 강조되는 미국 맥주에 비해 홉과 몰트의 균형을 중시한다. 맛이 튀지 않고 목넘김이 부드러우며 알코올 도수도 높지 않게 만드는 건, 맥주를 물처럼 매일 마시기 위해서다.

맥주맛 못지않게 중요한 게 있는데 바로 양조장이 만드는 문화다. 고릴라 브루잉을 설립한 앤디 그린 대표(36)는 “지역 공동체 안에서 다양한 모임을 열거나 다른 양조장과 협업해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게 영국 맥주 문화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고릴라 브루잉의 대표맥주 4종. 왼쪽부터 고릴라 IPA, 부산 페일 에일, 브리티쉬 스타우트, 라즈베리 위트

고릴라 브루잉의 대표맥주 4종. 왼쪽부터 고릴라 IPA, 부산 페일 에일, 브리티쉬 스타우트, 라즈베리 위트

고릴라 브루잉이 만든 흑맥주 ‘초코 칠리 홉스’는 그가 설명한 영국 맥주의 특징에 잘 들어맞는다. 충남 서산의 브루어리와 협업한 이 맥주엔 태양초 고추가 들어갔다. 강한 탄산과 보디감이 입에 머금을 때부터 존재감을 과시하는데, 삼키고 나면 매콤한 기운이 안개처럼 희미하게 올라온다. 화요의 ‘프리미엄 소주’를 숙성시킨 오크통에서 1년 숙성시킨 흑맥주 ‘킹콩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계절 한정판으로 마니아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맥주다. 고릴라 브루잉은 지금도 미국·중국·베트남 등 여러 나라 양조장과 협업 제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고릴라 브루잉 앤디 그린 대표(36)는 “영국에서 맥주는 문화”라고 강조했다. 일과 후 동료나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며 일상을 공유하는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고릴라 브루잉이 광안리에서 요가, 조깅 등 다양한 모임을 이어가는 이유다.

고릴라 브루잉 앤디 그린 대표(36)는 “영국에서 맥주는 문화”라고 강조했다. 일과 후 동료나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며 일상을 공유하는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고릴라 브루잉이 광안리에서 요가, 조깅 등 다양한 모임을 이어가는 이유다.

광안동에 위치한 널찍한 펍을 활용한 행사도 다양하다. 매주 첫째·셋째 토요일 정오에 함께 요가를 하고 맥주를 마시는 ‘비어&요가’ 프로그램을 무료로 진행한다. 둘째·넷째 토요일 같은 시간엔 주짓수를 배우는 호신술 교실이 열린다. 목요일 오후 7시30분엔 광안리 바닷가를 5㎞가량 뛰고 돌아와 맥주를 마시는 ‘러닝클럽’ 행사가 있다. 15명 이상이 예약하면 양조장 투어 프로그램도 무료로 진행한다.

■야생에서 채취한 신맛

부산 송정역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와일드웨이브는 국내 최초의 사워맥주 전문 양조장이다. 벨기에와 독일에서 유래한 사워맥주는 신맛이 나는 맥주다. 인위적으로 배양한 효모 대신 공기 중 떠도는 야생효모를 이용해 자연발효시키거나 젖산균을 넣어 만드는 게 특징이다.

야생효모는 우연적이고 불균질한 맛과 향을 내는데, 양조사가 블렌딩을 통해 일정한 품질을 유지한다. 그만큼 실험적이고 독특한 맥주를 만든다는 얘기다.

와일드웨이브의 맥주 샘플러. 왼쪽부터 겨울호랑이와 곶감, 패션프루트 사우어, 포도 사우어, 서핑 하이

와일드웨이브의 맥주 샘플러. 왼쪽부터 겨울호랑이와 곶감, 패션프루트 사우어, 포도 사우어, 서핑 하이

대표 맥주인 ‘설레임’은 새콤달콤한 맛의 레모네이드 같은 맥주다. 한모금 들이켜면 경쾌한 신맛에 입안 가득 침이 고인다. 국산 포도를 넣어 만든 ‘포도 사우어’는 상큼한 뒷맛이, ‘패션프루트 사우어’는 열대과일 특유의 깊은 산미가 인상적이다. 포도 사우어와 패션푸르트 사우어는 각각 오크통에서 1년 이상 숙성을 거친다. 와일드웨이브는 맥주 종류에 따라 와인을 숙성한 프렌치 오크통과 위스키를 숙성한 아메리칸 오크통을 번갈아 쓴다.

와일드웨이브 김준영 양조사가 끓인 맥즙의 당도를 측정하고 있다.

와일드웨이브 김준영 양조사가 끓인 맥즙의 당도를 측정하고 있다.

와일드웨이브가 자리 잡은 송정해수욕장은 부산에서 서핑으로 유명한 곳이다. 쾰시맥주(에일과 라거의 장점을 섞은, 독일 쾰른 지방의 맥주)인 ‘서핑 하이’는 지역 서퍼들에게 헌정한 맥주다. 가볍고 청량한 맛이다. 바닷물에서 한바탕 뒹굴고 난 뒤 마시기 좋은 맥주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서퍼들을 고려해 가격도 3900원으로 다른 맥주(5000~8000원)보다 저렴하게 책정됐다.

와일드웨이브는 국내 최초의 사워맥주 전문 양조장이다.

와일드웨이브는 국내 최초의 사워맥주 전문 양조장이다.

■누구나 마시기 편한 ‘로컬 맥주’

부산 하면 저마다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테트라포드 브루잉은 파도에 맞서는 거대한 구조물을 항구도시 부산의 상징물로 여겼고, 업체명으로 삼았다. 박서준 공동대표(37)는 “부산 사람들은 ‘삼발이’ 하면 다 알아듣는다”면서 “지역의 자부심을 걸고 부산을 대표하는 ‘로컬 맥주’를 만들려 한다”고 했다.

테트라포드 브루잉이 만드는 IPA는 최근 유행하는 뉴잉글랜드 스타일이다. 홉의 풍미는 강하지만 쓴맛이 적고 부드러우며 과일향이 상큼하다.

테트라포드 브루잉이 만드는 IPA는 최근 유행하는 뉴잉글랜드 스타일이다. 홉의 풍미는 강하지만 쓴맛이 적고 부드러우며 과일향이 상큼하다.

테트라포드 브루잉은 독자 레시피를 다른 양조장에 의뢰해 맥주를 만드는 집시 브루어리’로 2017년 부산 서면에 펍을 개장했다. 지난해 서울 경리단길에도 지점을 냈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수제맥주 문외한도 쉽게 즐길 수 있도록 접근성이 높은 맥주를 주로 만든다.

테트라포드 브루잉의 대표 맥주는 IPA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미국 뉴잉글랜드 스타일의 IPA로 홉의 풍미는 강한 반면 쓴맛은 적고, 풍부한 과일향과 탁한 색이 특징이다. 성격 급한 이들을 위해 한마디로 표현하면, 맥주가 아니라 오렌지주스 같은 느낌이다. 그 정도로 산뜻하고 가볍다는 듯이다. 페일 에일 역시 화사한 산미가 두드러지는 상쾌한 맛으로 수제맥주를 처음 접하는 이들도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술이다.

테트라포드 모양을 본뜬 탭

테트라포드 모양을 본뜬 탭

지역명을 쓴 ‘서면맥주’는 페이스북 페이지 ‘부산오빠’와 협업한 작품이다. 누구나 마시기 편한 비엔나 라거로 탄산감이 약하고 술술 넘어가는 목넘김이 특징이다. 디자이너 그룹 ‘슈퍼픽션’이 만든, 맥주를 즐기는 노동자 캐릭터 ‘프레디’를 활용한 ‘프레디 스타우트’도 인상적이다.

테트라포드 브루잉은 매주 월~목요일 오후 6~8시에 피자 한 판을 1만원에 한정 판매하는 이벤트를 벌인다. 주문과 함께 도우를 만드는 피자는 맥주와 잘 어울린다. 펍 인근의 전포동 카페거리도 함께 들르기 좋은 명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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