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고 튀어오르고 춤춘다…삶의 파노라마가 담긴 ‘소리의 축제’

2022.06.03 20:49 입력 2022.06.07 11:42 수정
문학수 선임기자

(10) 바로크와 협주곡의 탄생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1635년에 그린 ‘마을 사람들의 춤’(Danza aldeanos). 남녀 17명이 미친듯이 춤추고 있다.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악사가 나팔을 불고 있다. 바로크 미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움직임’ 혹은 ‘생동감’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1635년에 그린 ‘마을 사람들의 춤’(Danza aldeanos). 남녀 17명이 미친듯이 춤추고 있다.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악사가 나팔을 불고 있다. 바로크 미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움직임’ 혹은 ‘생동감’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바로크란 무엇인가

바로크(Baroque)는 움직인다. 달리고 튀어오르고 춤춘다. 이 ‘활달한 생동감’이야말로 가장 두드러지는 바로크의 특징이다. 이와 관련해 여러 예술사 서적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례는 아마도 다비드상(像)일 것이다. ‘르네상스의 다비드’와 ‘바로크의 다비드’가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두 시기에 각기 만들어진 다비드상은 150년이 흐르는 동안에 일어난 예술적 변화를 한눈에 가늠하게 해준다. 르네상스의 조각가 도나텔로(1386~1466)는 다비드상을 두 점 남겼는데 하나는 대리석으로, 다른 하나는 청동으로 제작했다. 오늘의 시선으로 봤을 때 한층 극적인 작품은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의 명을 받아 1440년경에 완성된 청동 다비드상일 것이다. 당대에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었던 누드 청동상이다. 어린 소년의 몸매를 매우 노골적으로 묘사했다. 이어서 35년쯤 뒤에 화가이자 조각가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1436~1488)가 골리앗의 머리를 밟고 있는 다비드의 모습을 청동으로 제작했다. 득의 어린 표정과 자세,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중성적인 몸매와 미숙한 근육, 발에 밟힌 골리앗의 일그러진 얼굴까지 세세하게 묘사한 걸작이다. 물론 이보다 훨씬 널리 알려진 ‘다비드’는 미켈란젤로(1475~1564)의 것일 터이다. 1504년 완성한 이 대리석 조각은 앞서 언급한 다비드들에 비해 훨씬 성숙한 남성의 모습을 구현했다. 당당한 몸매뿐 아니라 정신적 측면에서도 그렇다. 물맷돌을 오른손에 든 다비드가 어딘가를 침착하게 응시하면서 앞으로 펼쳐질 골리앗과의 한판 싸움을 암시한다. 신체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지적인 고상함까지 느껴진다.

세 명의 예술가가 차례로 만들어낸 ‘르네상스의 다비드’는 멈춰 있다. ‘정지한 순간’을 통해 어떤 영원성을 지향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말하자면 관념을 작품에 투영했다. 하지만 이들보다 후대의 조각가인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의 손에서 태어난 ‘다비드’(1620)는 완전히 다르다. 움직임으로 충만한 이 대리석 조각상은 투석기에 돌을 감아 힘차게 날려보내는 순간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실물 크기(170㎝)의 다비드가 강렬한 운동감을 뿜어낸다. 머리칼은 헝클어졌고 눈빛과 표정은 전의로 불타오른다. 팽팽하게 긴장한 근육과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굳세게 버팅긴 두 다리는 실제 상황을 방불케 한다. 게다가 이 입체적이고 극적인 조각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곧 이어질 상황까지 상상하게 만든다. 적장의 이마를 향해 날아가는 물맷돌의 장쾌한 포물선, 그리고 그것이 명중하는 순간에 마침내 쓰러지는 골리앗의 패배까지 예감하게 한다. 이처럼 베르니니의 조각상들은 ‘움직임’이라는 특징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아폴론과 다프네’(1622~1625)도 그렇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성 테레사의 황홀경’(1645~1652)도 마찬가지다. 순간의 역동성을 통해 보는 이에게 즉각적인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극적인 상황을 상상하게 만든다.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의 ‘다비드’(1620).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의 ‘다비드’(1620).

바로크의 이런 특징은 회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회화 작품들이 이런 경향성을 보여주지만, 일단 당대의 미술사를 대표하다시피 하는 거장이었던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를 떠올릴 필요가 있겠다. 미술사학자 고(故) 임영방 선생(1929~2015)은 <바로크 - 17세기 미술을 중심으로>(한길아트)에서 “루벤스의 미술은 서정성이 강하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에서까지 여성의 관능성을 부각시키고, 따뜻한 색조 처리로 그림에 힘이 넘쳐나고 질적인 특성을 부여한다”고 썼다. 같은 책에서 ‘매질당하는 그리스도’(1618), ‘레우키포스 딸들의 납치’(1618), ‘아마조네스들의 결투’(1618) 등 루벤스의 걸작 여러 편을 예시하고 있다. 신화와 성서의 상황과 인물들을 재해석한 이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역시 하나의 공통점이 단박에 눈에 들어온다. 화폭에 그려진 인물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생생함이 바로 그것이다. 임영방 선생은 ‘아마조네스들의 결투’에 대해 “동적인 움직임이 더욱 발전하여 화면 전체에서 말과 인물들이 서로 뒤엉켜져 있는 가운데 장면의 격렬함과 생동감이 넘쳐난다”고 설명한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 했으니 구글을 검색해 해당 작품들을 일견하시길 권한다. 우리는 이처럼 루벤스의 걸작들을 통해 바로크 미술의 특징을 일람할 수 있거니와, 다분히 개인적 견해라는 전제하에, ‘움직임’을 가장 생생히 드러내는 작품을 딱 한 편만 꼽자면 ‘마을 사람들의 춤’(Danza de aldeanos)(1635)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시골 남녀 17명이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신나게 춤을 추는 장면이다. 악사 한 명이 커다란 나무 위에 올라가 악기를 불고 있다. 보는 이를 화면 속에 끌어당겨 함께 춤추게 하는 ‘마력의 그림’이다. 인물 17명이 드러내는 표정과 동작이 다들 제각각이어서 극적인 생동감을 더욱 끌어올린다. 신화와 성서의 과감한 재해석으로 널리 알려진, 그리고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던 루벤스에게 이렇듯이 민중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묘사한 작품들이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림의 상황과 맥락은 비슷한 시기에 루벤스가 그렸던 ‘플랑드르의 장터’(Flemish Kermis·1635)와 동일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 그림은 축제가 벌어진 장터의 전체적 풍경이 아니라 춤추는 남녀들에게만 초점을 맞춰 긴장감을 더욱 키웠다.

20세기부터 조명받은 ‘못난이 진주’

당대에 이런 역동성이 늘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절제와 균형을 중시하는 시각에서 바라보자면, 오늘날 ‘바로크’라고 불리는 양식은 무식하고 거칠뿐더러, 심지어 저질스럽게까지 여겨졌다. 이 폄훼의 시선은 거의 19세기까지 이어졌다. 아르놀트 하우저(1892~1978)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 따르면, “17세기의 예술이 총괄적으로 ‘바로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바로크라는 개념은 고전주의 예술이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무절제하고 혼란스러우며 기괴하게 느껴진 예술현상에만 적용됐다. (중략) 레싱, 괴테의 입장은 물론이고 부르크하르트의 입장까지도 근본적으로는 고전주의 예술이론의 관점에 의거하고 있다. 즉 그들은 모두 바로크를 ‘무규칙적’이고 ‘자의적’이란 이유를 붙여 비난”했다. 임영방 선생의 직설적인 표현을 좀 더 덧붙이자면, 적어도 19세기 말까지 유럽의 거의 모든 식자(識者)들은 “마치 점잖은 집안에 못된 망나니 같은 자식이 태어나 집안망신을 시킨다는 식으로까지 바로크를 취급”했다.

그래서 바로크를 ‘바로크’(Baroque)라고 부른다. 이탈리아어로는 ‘Barocco’, 독일어로는 ‘Barock’라고 부르는 이 명칭은 포르투갈어로 ‘찌그러진 진주’를 뜻하는 ‘Perola Barroca’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바로크는 진주 중에서도 가치 없는 진주였다. 진주는 둥글고 흠집이 없으며 표면이 매끈해야 제대로 대접받는 법이니, ‘찌그러진 진주’는 헐값에 팔려나가거나 버려지는 하품(下品)이었다. 이렇듯이 ‘바로크’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이었다.

그 고정관념을 뒤집은 사람은 스위스 태생의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뵐플린(1864~1945)이었다. 뵐플린은 1915년 출간한 저서 <미술사의 기초개념>에서 바로크의 존재적 정당성을 처음으로 개진했다. 이렇듯이 바로크는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제대로 된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뵐플린은 다섯쌍의 대립 개념으로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비교하면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 지면에서 그것들을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겠지만, 그중에서 두 가지만 꼽자면, “평면적인 것과 입체적인 것” “폐쇄적인 것과 개방적인 것”의 대립이 그것이다. 뵐플린은 ‘평면’과 ‘폐쇄’로 르네상스를 설명하면서, 이에 반해 ‘입체’와 ‘개방’을 바로크의 특징으로 꼽았다. 그래서 얻어지는 효과는 생동감과 연극성, 아르놀트 하우저는 이를 “영화적”이라고 표현했다.

바로크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해석은 뵐플린에서 시작해 스페인의 철학자이자 미술사학자인 에우헤니오 도르스(1882~1954)에게로 이어졌다. 도르스가 1935년 내놓은 <바로크론>은 한마디로 말해 바로크에 대한 사랑 고백에 가까웠다. 이렇듯이 바로크는 등장 이후 약 300년이 지나서야 제자리를 찾았다. 물론 지금의 우리는 ‘찌그러진 진주’가 더욱 진실에 가깝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세상은 둥글고 매끈하지 않으며 오히려 울퉁불퉁하다. ‘무결점의 진주’란 관념일 뿐이다. 인간도 매한가지다. 대개의 인간은 찌그러져 있으며, 상처와 열등감을 드러내거나 감추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세상에는 온갖 드라마가 넘쳐난다. 바로크 시대의 예술가들이 바라보고 느꼈던 것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임영방 선생의 표현을 또 빌리자면, “그들은 혼란스러우나 생동감 있게 펼쳐지는 온갖 파노라마, 그 화려한 축제를 보고 즐겼다.”

협주곡(Concerto)의 탄생

‘역동성’과 ‘연극성’이라는 바로크의 특징을 음악에 대입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연히 오페라다. 음악에서의 바로크는 시기적으로 대략 ‘1600년부터 1750년까지’라는 합의가 이뤄져 있다. 다시 말해 그 출발점이 오페라의 탄생과 긴밀히 연관돼 있다. 이 연재에서 이미 서술했듯이(5월6일자), 오페라는 16세기가 저물던 무렵에 이탈리아 피렌체의 카메라타에서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1597년에 ‘최초의 오페라’로 알려진 <다프네>>(Dafne)가 초연됐다. 하지만 대본과 음악이 남아 있지 않다. 문헌적 증거가 오늘까지 온전히 전해지는 ‘첫 오페라’는 1600년 공연했던 <에우리디체>(Euridice)였다. 이어서 1607년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1567~1643)의 <오르페오>(Orfeo)가 초연됐다. 음악에서의 바로크는 이렇게 막을 올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가 타계했던 1750년까지 이어진다.

물론 바로크 시대의 음악을 논함에 있어서 오페라만을 거론할 수는 없다. 그밖에도 다양한 음악적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 오라토리오(Oratorio)라든가, 칸타타(Cantata) 같은 장르의 등장도 바로크 시대의 중요한 성과였다. 특히 고음악을 전문으로 연주하는 오늘날의 뮤지션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바소 콘티누오(Basso Continuo, 통주저음)”라는 답변을 내놓는다. 1600년 무렵 태동한 이 양식은 류트, 쳄발로, 오르간, 비올라 다 감바 등의 악기가 ‘계속되는 저음’을 연주하는 것을 일컫는다. 작곡가는 하나의 선율과 통주저음만을 악보에 표기했다. 여러 악기들이 통주저음의 리드를 따라가면서 각자의 선율을 채워넣어 화음을 만들었다. 통주저음은 음악이 개시되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규칙적인 악센트로 음악의 움직임을 계속 유지했다. 그렇게 음악의 추진력을 만들어냈던 통주저음은 바로크 시대를 온전히 풍미하다가 소멸한, 그야말로 ‘바로크적인 양식’이었다. 바로크 시대의 거의 마지막 작곡가라고 할 수 있는 바흐도 통주저음을 활용한 음악을 여러 편 남겼으나 그 이후에는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바로크 시대의 이탈리아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1695~1741). 그가 작곡한 <사계>는 ‘대비’를 통해 극적인 운동감을 구현한다.

바로크 시대의 이탈리아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1695~1741). 그가 작곡한 <사계>는 ‘대비’를 통해 극적인 운동감을 구현한다.

음악을 감상하는 수요자, 특히 기악음악을 애호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페라의 등장에 버금가는 바로크의 유산으로는 역시 ‘협주곡(Concerto)의 탄생’을 꼽아야 할 것이다. 앞서 바로크의 ‘움직임’과 ‘역동성’을 길게 서술했거니와, 조각과 미술은 이를 형상으로 보여줄 수 있었으나 음악은 오로지 ‘소리’로써 그것을 구현해야 했다. 이 지점에서 음악가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대비’(Contrast, 이탈리아어로는 Contrasto)였다. 음악의 움직임과 입체성은 대비에서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큰 것과 작은 것, 강한 것과 부드러운 것, 빠른 것과 느린 것이 부딪혔을 때 음악은 그 자체로 생동감을 획득하면서 듣는 이의 감정을 뒤흔든다. 따라서 “바로크 음악은 역동적 대비의 음악”(임영방)이라는 표현은 전적으로 옳다. 특히 협주곡은 ‘오케스트라’와 ‘독주자’라는 두 주체를 대비시켜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었다. 협주곡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콘체르토 ‘Concerto’는 라틴어 ‘Concertare’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경쟁하다, 겨루다’라는 뜻을 지녔다. 오늘날 커다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안토니오 비발디(1695~1741)의 <사계>가 바로 이 지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클래식 오디세이 - 음악의 역사를 항해하다]달리고 튀어오르고 춤춘다…삶의 파노라마가 담긴 ‘소리의 축제’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