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죽음의 단풍

2024.02.27 17:40 입력 2024.02.27 20:02 수정

한반도에 뿌리내린 모든 것이 이 땅의 주인이라면, 한민족보다 먼저 한반도에 터 잡은 소나무야말로 그러하다. 한반도에 인류가 살기 시작한 건 100만년 전이지만, 소나무는 최소 200만년 전부터 이 땅에 살고 있었다. 고조선의 건국과 조선의 멸망, 6·25의 비극을 모두 지켜본 소나무. 한반도 역사와 함께 숨 쉬고 애국가에도 나오는 그 소나무가 지금, 절멸 위기에 놓여 있다.

동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눈에 보이는 모든 산이 단풍 든 것처럼 울긋불긋하다. 한번 걸리면 고사율이 100%인 소나무재선충병에 걸려 잎이 붉게 타들어가는 ‘죽음의 단풍’이 든 것이다. 2007년과 2017년에 이어 7년 만에 재선충병 3차 대확산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전문가들은 일본처럼 한국에서도 재선충병으로 소나무가 절멸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한민족은 유난히 소나무를 사랑했다. 아기가 태어나면 금줄에 생솔가지를 꽂았고, 부정을 쫓기 위해 마을 앞엔 소나무 장승을 세웠으며, 선비들은 자신의 지조를 소나무로 표현했다. 2022년 국립산림과학원 조사에서도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로 소나무가 꼽혔으니, 소나무 사랑은 대대로 전승돼온 거라 할 수 있겠다.

그 사랑이 독이 된 것일까. 일각에서는 소나무 위주로 조성된 숲이 자연재해 피해를 더욱 키우고 있다고 지적한다. 내화성이 약한 소나무가 산불에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데다, 소나무가 지나치게 높은 밀도로 분포해 이를 먹이 삼는 재선충이 쉽게 활성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재 등 반드시 지켜야 할 지역 외에서는 소나무를 살릴지 포기할지 결정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해도, 그것이 어찌 너무 많은 소나무 탓만이겠는가. 기후변화로 적설량과 강수량이 줄면서 작은 산불은 쉽게 대형 산불로 번지고, 온난화로 인해 재선충을 소나무로 옮기는 매개 곤충은 활동 기간이 늘고 개체수가 많아졌다. 인간이 한반도를 소나무가 살기 힘든 곳으로 만든 것이다. 소나무가 자신의 서식지를 떼어주고 사람들을 품어줬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소나무를 지킬 차례다.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를 후손들도 볼 수 있도록 절멸만큼은 막아야 한다.

포항에서 경주까지 이어지는 도로 옆 숲에서 지난 23일 소나무재선충병에 걸려 잎이 누렇게 변한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녹색연합 제공

포항에서 경주까지 이어지는 도로 옆 숲에서 지난 23일 소나무재선충병에 걸려 잎이 누렇게 변한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녹색연합 제공

경남 거창군의 푸른 소나무.

경남 거창군의 푸른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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