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대부분 6070·피해액 1조…해외 플랫폼에 집단소송 준비
AI 발달로 피해 확산 불 보듯…국제 공조·빅테크 핀셋 규제 필요
[주간경향] “자녀 결혼 등으로 모아놓은 돈이 없다 보니 노후 자금 마련을 위해 투자로 성공한 황현희씨에게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시작이었습니다.” 정년퇴직을 앞둔 A씨(60)는 방송인 황현희씨를 사칭한 투자 단체 대화방(주식리딩방)에 가입하게 된 계기를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황현희의 무료 투자 강의, 선착순 1000명!’ 지난해 12월 주식 공부를 하던 A씨 페이스북에 이런 광고가 떴다. 공중파 TV에서 황씨가 투자로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어 호기심에 광고를 클릭했다. 클릭은 네이버 밴드 리딩방 가입과 가짜 투자 정보를 제공하는 불법거래소 앱(애플리케이션) 설치로 이어졌다.
투자 매니저라고 자신을 소개한 B씨에게 종목 추천을 받아 200만원을 넣었다. 주가는 매일 20%씩 올랐다. 사기가 아닐까 하는 의심에 100만원을 출금해보니, 바로 돈이 입금됐다. 리딩방에서는 수익을 인증하는 사진과 글이 계속 올라왔다. 의심이 믿음으로 바뀐 A씨는 매니저에게 공모주 청약을 신청하라는 제안을 받자 빚을 내 2000만원을 넣었다. 새로 상장하는 기업의 공모주는 높은 시세 차익을 얻을 수 있어 인기가 많지만, 개인투자자는 1주를 받기도 쉽지 않다. A씨는 4주를 받았다. 그런데 공모주를 팔아 투자금을 출금하려 하자 B씨는 소득세 등을 요구하며 시간을 끌었다. 요구에 따라 총 5300만원을 넣었다. 그 후 B씨는 연락을 끊었고, 사기임을 감지한 A씨는 올해 2월 경찰서에 신고했다. A씨는 “경찰서에서는 ‘바보처럼 왜 그런 사기에 당했느냐’라는 반응이어서 당시엔 불이라도 질러버리고 싶을 만큼 속이 타들어 갔다”며 “똑같은 광고가 지금도 돌아다니는 걸 보면 경찰이나 정부는 뭘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유명인 사칭 온라인 피싱 범죄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넘어 유튜브와 뉴스 사이트에도 피싱을 유도하는 사칭 광고가 퍼지고 있다. 범죄에 자신도 모르게 명의가 도용된 유명인들과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자 정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지 6개월 만이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언론을 통해 공개된 사칭 피해 유명인 31명을 특정해 광고 차단을 요청하는 긴급 공문을 지난 3월 25일 국내외 플랫폼에 발송했다. 정부는 국무조정실이 주재하는 ‘불법 사금융 척결 범정부 TF’에서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국조실과 방통위 등 관련 기관은 3월 27일 회의를 열고 불법 사칭 광고 심의기간을 단축하는 방안 등을 논의키로 했다. 유튜브 운영사인 구글과 페이스북·인스타그램 운영사인 메타는 올해 4월부터 이용자들이 사칭 광고에 속아 피해를 보지 않도록 캠페인을 벌일 예정이다.
현재 온라인 플랫폼에서는 사칭 불법 광고를 규제하는 법규가 없어 정부는 업계에 자율적인 노력만 요구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유명인 사칭 온라인 피싱 범죄를 줄이려면 사칭을 막는 정보통신망법과 신속한 구제를 위한 통신사기피해환급법 개정 등에 대한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고 주문한다. 정부 관계자는 “불법 사금융 피싱 범죄가 굉장히 다양한 형태로 발생해 포괄적인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단계”라며 “사칭 피싱 범죄의 심각성은 인지하고 있지만, 관련 법안들을 개정하려면 국회 논의와 부처 간 이견 조율이 필요해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고령층 사칭 불법 광고에 속아 자살 시도
경찰청에 따르면 작년 9월부터 12월까지 접수된 투자리딩방 사기 건수는 1452건으로 피해액은 1266억원에 이른다. 경찰은 최근 전세사기와 보이스피싱 같은 악성사기 목록에 투자리딩방 사기도 포함했다. 다만 리딩방 사기 범행 대부분이 SNS를 통해 해외에서 이뤄지고, 대포폰과 대포통장을 사용해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유명인 사칭 피싱 피해자 소송을 대리하는 법무법인 대건은 실제 피해자들의 피해액 합계가 1조원을 넘을 것으로 추산한다. 한상준 대건 변호사는 “우리 로펌이 담당하는 (투자사기 사건) 비율이 전체 중 5%가량인 점을 고려하면 유명인 사칭 피해액은 최근 6개월간 총 1조원을 넘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대건에 따르면 피해자의 90% 이상이 60~70대로 유튜브 광고를 보다가 사기를 당했다. 유명한 연예인·경제계 인물 등에 대한 신뢰가 높다 보니 초기 투자금이 커 통상적인 리딩방 사기보다 피해 규모도 크다. 리딩방 사기 평균 피해액은 5000만~1억5000만원 수준이다. 사칭 피싱 범죄 피해 액수는 2억~3억원에 달한다.
한상준 변호사는 “인공지능(AI)과 정보기술(IT)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가짜 영상이라는 것을 모르고 온라인 금융거래 경험이 없는 어르신들이 대출을 유도하는 리딩방에 속아 노후 자금을 날린다”고 말했다. 이어 “신분증 복사본을 범죄조직에 넘기는 경우도 많아 명의도용에 따른 3~4차 피해로 이어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사칭 광고 플랫폼은 계속 열려 있는데 불법 거래 사이트에 대한 당국의 즉각적인 조치는 없고 자금 세탁 창구도 열려 있다 보니 피싱범이 파고들고 있다”며 “보이스피싱 의심 계좌처럼 리딩방 사기에 사용된 계좌는 지급 정지할 수 있게 통신사기피해환급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보이스피싱은 통신사기피해환급법에 따라 은행이 사기 이용 계좌를 즉시 지급정지할 수 있지만 리딩방 사기는 이를 적용받지 못한다.
한 변호사는 불법 광고를 게재한 해외 플랫폼을 상대로 집단 소송을 준비 중이다. 그는 “미국에 있는 로펌과 공조해 페북과 인스타, 유튜브를 상대로 손배 청구를 위한 무료 집단소송 진행을 검토하고 있다”며 “미국 법원은 한국 법원과 달리 징벌적 손해 배상을 폭넓게 인정해 소송의 인용 가능성 등을 따져보고 있는 단계”라고 말했다.
■사칭 피해 유명인 신상정보 털려도 속수무책
피싱 범죄에 자신도 모르게 동원되고 있는 유명인도 갑갑하기는 마찬가지다. 피해자임에도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거나 방조한다는 대중의 오해와 질타를 받고 있다. 이들이 지난 3월 22일 기자회견을 하고 ‘유명인 사칭 온라인 피싱 범죄 해결을 위한 모임(유사모)’을 발족해 공동행동에 나선 이유다. 회견에는 유명 강사인 김미경씨를 비롯해 방송인 송은이씨와 황현희씨, 존 리 전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 등이 참석했다. 유사모 성명서에 동참 뜻을 밝힌 이들은 방송인 홍진경씨, 유재석씨, 한국의 닥터둠(doom·파멸)으로 불리는 경제학자 김영익 교수 등 137명에 달했다.
김미경 강사는 유튜브와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씨는 회견에서 “플랫폼은 사전 필터링 시스템이 없고 사후 대응도 소극적이다”라며 “여러 차례 유튜브에 신고해 계정을 1개 지우면 다음 날 10개 이상 사기 계정이 새로 생긴다”고 토로했다. 그는 “사기 영상 하나에 조회 수가 50만에 달한다”며 “명예 실추도 억울하지만 사기 계정으로 피해자가 생기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에 모임을 만들었다”고 했다.
이들은 국내 기업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네이버와 카카오에서는 사전 검열 등으로 해당 포털에서는 사칭 불법 광고가 뜨지 않는다. 그러나 카카오톡 채팅방과 네이버 밴드는 해외 범죄조직의 소통 창구로 활용되고 있다. 황현희씨는 “해외 플랫폼이 사칭 광고로 사람들을 현혹해 카톡과 밴드로 끌어들여 사기성 짙은 말로 유인한다”며 “사칭방에 들어가 ‘제가 황현희입니다’ 라고 하니,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라는 제 유행어까지 해 너무 놀랐다”고 말했다. 이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국내 기업도 유선상 상담원이 없고, 대화하려면 e메일을 보내고 답장을 받으려면 최소 2∼3일이 걸린다”며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신고하니 ‘국민신문고에 신청해 보라’는 답변만 들었다”고 했다.
사기조직단들은 유명인의 가족사진과 신상정보까지 불법 광고에 활용한다. 하지만 사후 처벌도 쉽지 않다. 한국에서 사칭 행위 자체로는 형사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 민사적으로 사칭 피해 당사자가 초상권 침해를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해 재산상·정신적 피해를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사칭 피싱 범죄를 당장 멈추게 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온라인상에서 조직적으로 이뤄지고 근거지가 해외에 있어 범죄 조직을 특정하기가 쉽지 않다. 주진형 전 한화증권 대표는 불법 광고 범죄자들을 고소했지만, 경찰·검찰 모두에게 “수사 단서 발견 곤란으로 수사 중지”라는 통보만 받았다.
■ 사칭 광고 사전 규제도 사후 처벌도 어려워
앞서 2020년 국회에서 온라인에서 사칭을 할 경우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는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방통위가 “형벌권의 지나친 확대”라며 반대했다.
구글과 메타 측은 AI 등 최첨단 기술과 인력을 동원해 불법·유해 콘텐츠를 삭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불법 광고를 삭제하고 있지만, 범죄조직이 잡히지 않다 보니 생성되는 불법 광고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승주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보이스피싱 문제처럼 부처 간 공조를 넘어 국제 공조가 필요하다”며 “당장은 방통위 내 직통으로 연결되는 신고센터를 만들고 국민에게 심각성을 알리는 등 중장기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최소한의 핀셋 규제가 필요하다는 주문도 나왔다. 강정수 미디어스피어 AI 연구센터장은 “AI 발달로 사칭 광고를 둘러싼 피해가 더 확산할 것”이라며 “미국과 유럽연합이 불법 광고를 방치한 빅테크 기업에 책임을 묻는 것처럼 한국도 최소한의 규제가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