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세상에 던진 도발

2021.10.03 21:23 입력 2021.10.03 21:24 수정

김구림 개인전 ‘음과 양’

김구림은 시대의 현실, 사건을 다룬다. 그림은 2020년 코로나19 사태 직후의 혼돈과 죽음의 문제를 표현한 ‘음과 양 20-S 34’.

김구림은 시대의 현실, 사건을 다룬다. 그림은 2020년 코로나19 사태 직후의 혼돈과 죽음의 문제를 표현한 ‘음과 양 20-S 34’.

신문지 활용작 ‘음과 양 20-S 34’
코로나 관련 소식들 캔버스 도배
종교 등 주제 넘나들며 파격 시도
말기암 투병 중 신작 15점 선봬
“죽기 전에 인생작 만들고 싶어”

검정 마스크에 뼈다귀 하나를 붙였다. 캔버스에 입체 액자들을 박고는 그중 하나에 해골 조형물을 넣었다. 다른 액자엔 짓이겨진 종이를 양감이 드러나게 부착했다. 캔버스 면을 이루는 건 2020년 코로나19 발발 이후 재앙의 사태를 다룬 신문지다. 한국과 미국, 아프리카의 코로나 소식이 말 그대로 도배됐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최 중인 김구림 개인전에 나온 ‘음과 양 20-S 34’이다. 코로나19 사태 직후의 혼돈, 죽음의 문제를 다룬다. 신문지 텍스트에 흘러내린 물감은 소통 단절, 사태에 대한 해석 불가능을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을 보며 2006년작 ‘핵폭탄’이 떠올랐다. 뼈다귀 하나가 고무장갑에서 떨어져 두 동강 났고, 어지러이 널브러진 오장육부 파편들엔 피고름이 얼룩졌다. 핵전쟁에 대한 우려·경고를 그로테스크하게 표현했던 당시 김구림의 나이는 일흔이었다. 북한이 1차 핵실험을 한 해다.

2021년 신작인 ‘음과 양 21-S 75’는 이스마엘의 살인 행각을 기록한 <구약> 예레미야 41장에 해골을 올리고 피를 상징하는 붉은 피를 뿌렸다.

2021년 신작인 ‘음과 양 21-S 75’는 이스마엘의 살인 행각을 기록한 <구약> 예레미야 41장에 해골을 올리고 피를 상징하는 붉은 피를 뿌렸다.

개인전 ‘음과 양’ 전시장

개인전 ‘음과 양’ 전시장

‘음과 양 20-S 34’는 작가 정신으로나 작품 기법으로나 ‘핵폭탄’을 잇는다. ‘핵폭탄’의 오장육부 파편이나 ‘음과 양 20-S 34’의 뼈다귀는 극단의 사적 취향이 아니라, 시대에 대한 고민과 성찰의 결과물이다. 김구림은 항상 당대의 현실 문제를 작품에 구현했다. 고통스럽거나 불쾌하거나 더러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 했다. “추한 현실 속에서 발버둥 치는 인간이 창작하는 미술은 추한 것이 당연하다. 추한 진실을 직시해서 그릴 때 ‘추’가 ‘미’로 승화되는 예술적 순간이 생긴다”는 서경식의 말이나 “부패한 사회에서, 예술이 만약 진실하다면, 예술은 부패를 반영해야 한다”는 에른스트 피셔의 말이 김구림의 작품에 맞아떨어진다. 김구림은 이런 말을 했다. “예술이란 게 숭고하고 우아하고,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아니야. 인생에 고난도, 절망도, 좌절도 있고, 그 어떤 괴로움이 있고…, 그런 것들이 인생이잖아.” 가나아트센터 전시장 벽면엔 그 인생에 관한 작품들과 함께 이 말이 새겨져 있다.

기법 측면에서 볼 때 ‘음과 양 20-S 34’는 1964년작 <태양의 죽음>(영국 테이트 모던 소장)을 계승한다. 당시 김구림은 캔버스 대신 나무 패널을 사용했다. 비닐 같은 오브제를 패널에 태워 붙인 파격을 선보였다. ‘캔버스에 유채’라는 형식을 파괴했다. ‘형식의 파괴’로 김구림 특유의 ‘파괴의 형식’을 만들었다. 그가 일관한 건 평면 회화의 고정된 틀을 벗어난 ‘새로운 시도와 변화’, ‘파격’의 방법론이다. 파격 하면 또 떠오르는 게 2014년 구제역 파동 때다. 그는 살처분된 돼지와 흙을 직접 구해 오브제 작품을 만들려고 했다. 역병, 생명, 도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싶어했다. 구제역 방역 지침 때문에 이 구상은 이뤄지지 못했다.

‘도발’도 김구림의 미술 세계를 규정하는 말 중 하나다. 기존 체제·제도에 도발하는 미술 정신의 대상은 종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불교와 기독교의 상징물을 음양에 대비하는 작품을 여럿 제작했다. 2021년 신작인 ‘음과 양 21-S 75’도 도발의 미술 문법을 보여준다. 김구림은 <구약> 예레미야 41장을 펼쳐놓고는 진한 붉은 물감을 뿌렸다. 작은 플라스틱 해골 머리 하나를 얹었다. 예레미야 41장은 이스마엘의 잔인한 살인 행각을 기록했다. <구약>이 죽음으로 점철된 기록물이라는 걸 고발하는 듯하다. 그는 이번 개인전에 십자가·해골·뱀과 반가사유상·해골·태아 오브제 작품도 출품했다. 음양 연작의 주요 모티브인 ‘삶과 죽음’의 문제를 환기하는 작품들이다. 종교의 상품화를 비판하려는 듯 주로 상품 결제 때 사용하는 바코드에 반가사유상을 올린 작품도 선보였다.

화가 김구림. 가나아트센터 제공

화가 김구림. 가나아트센터 제공

이번 개인전엔 평면·입체 회화, 오브제, 드로잉 140점을 내놓았다. 혼돈의 세상을 드러내려는 듯 원색의 물감으로 거침없이 붓질을 해내려 간 대형 회화도 선보였다. 오브제는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뒤섞였다. 플라스틱, 마네킹, 새장, 케이블, 바이올린 몸통, 사진 등 온갖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다.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조합이 불협화음을 이루면서 묘한 조화를 이룬다.

한국 전위 예술의 선구자, 비디오아트 개척자, 한국 최초의 대지미술·실험영화·메일아트 수행자의 면모를 보여주기엔 역부족이다. 대형 미술관이 아니라면 김구림의 일단만 보여줄 수밖에 없는 공간적 한계에 부딪힌다.

김구림은 ‘음과 양’ 개인전에 신작 15점을 포함했다. 말기암과 심장 판막부전증 때문에 병원을 오가며 작업했다. 거동이 불편한 그는 자택 1층과 작업장인 지하를 연결하는 리프트 설치 공사를 진행 중이다. 개인전 개최 무렵 통화했을 때 김구림의 머릿속은 온통 작품 생각뿐이었다. 그는 “죽기 전에 내 인생 최고의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전시는 10월17일까지. 3000원.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