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포스트모던 철골, 민중을 상징하라

2021.11.15 21:24 입력 2021.11.15 21:37 수정
박정현

‘반역’을 녹인 한겨레 사옥

민중을 상징하라

[콘크리트와 글로 빚은 20세기 한국 건축](5)포스트모던 철골, 민중을 상징하라

1991년(위 사진)과 2021년의 한겨레신문사 사옥. 외관은 조금 달라졌지만, 붉은색의 철골 부재는 여전히 전면부의 인상을 좌우한다.  건축문화·박정현 제공

1991년(위 사진)과 2021년의 한겨레신문사 사옥. 외관은 조금 달라졌지만, 붉은색의 철골 부재는 여전히 전면부의 인상을 좌우한다. 건축문화·박정현 제공

군사정권이 말하는 ‘민족’과 다른
‘민중’을 어떻게 건물로 드러낼까
한겨레신문사 사옥 설계의 시작점

건축은 권력 친화적이다. 엄청난 자본과 노동력이 필요한 건축의 숙명이기도 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건축의 역사는 지배 권력층과 종교 집단 건축물의 연대기와 엇비슷하다. 20세기 한국도 마찬가지다. 정부청사, 미술관, 박물관, 극장은 물론이고 아파트, 공장 등에 이르기까지 국가는 최대의 클라이언트였다. 건축을 국가의 개발 정책과 떼어 놓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다. 1960년대부터 길게 이어진 군사정권 및 고도성장 시기에 권력을 통해 건축은 (또는 건축을 통해 권력은) 쉼 없이 ‘국민’을 호명했다. 그 국민은 한국이 유구한 역사를 지녔음을 인식하고, 국난 극복과 민족 중흥의 소명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깨달아, 국가와 민족에 충성하는 ‘국민’이었다.

한편 군사독재를 끝내기 위한 1980년대의 여러 ‘운동’은 국민의 자리에 다른 주체를 세우려 했다. ‘민중’이다. 전국의 대학교, 공장, 야간학교 같은 운동의 현장은 온전한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할 역사의 주인공으로 민중을 상상했다. 민중문학, 민중미술은 1980년대 운동의 결과이자 동력으로 작동했다. 비슷한 것을 건축에서 찾을 수 있을까? 시대의 흐름에 동참하는 몇몇 학자들의 작업들이 간헐적으로 있었지만, 민중건축이라 부를 만한 흐름은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학생들과 젊은 건축가들이 1987년 청년건축협의회 같은 건축 운동을 표방한 단체를 결성하기도 했으나 운동의 이념 아래 지어진 건축물은 드물었다. 이 드문 예가 한겨레신문사 사옥이고, 역시 흔치 않은 진보적 성향의 건축가 조건영이 이 건물을 설계했다.

한겨레신문사는 1988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해직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국민주 모금을 통해 확보한 자금으로 창간된 일간 신문사다. 창간 당시 내건 사시(社是)는 ‘민주, 민족, 통일’이었다. 긴 민주화운동의 산물이자 수많은 시민들의 모금 참여로 탄생했으며 진보와 민주주의를 기치로 삼은 신문사의 설계는 여러모로 달라야 했다. 군사정권이 기념비적 국가 프로젝트에 계속해서 강요했던 ‘민족’과 단어는 같지만 의미는 다른 ‘민족(민중)’을 건물로 어떻게 드러낼 수 있었을까? 결코 쉽지 않은 과제였다. 한옥 지붕처럼 쉽게 연상 작용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도 없고, 따를 만한 선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반역은 역사와 사회를 썩지 않게 하는 유일한 처방”이라고 말한 건축가는 어디에 기대 이를 풀어냈을까?

한겨레신문사 사옥(이하 한겨레 사옥)은 여러 면에서 이채롭다. 우선 위치다. 서울 마포구 공덕동 로터리에서 만리재를 넘어가는 중턱에 위치한 한겨레 사옥은 서울시청과 정부청사 주위에 모여 있는 기존 언론사와 전혀 다른 환경에 처해 있다. 세종로나 여의도 일대의 고층 빌딩이 아니라, 좁은 골목과 빼곡히 들어선 저소득층 주거가 사옥이 마주한 주변 맥락이다(이후 주변 일부는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었다). 그래서일까, 한겨레 사옥을 신문사 건물이라고 짐작하기란 어렵다. 매끈한 유리로 덮이곤 하는 오피스 건물과 달리 시멘트 뿜칠로 거칠게 마감된 외벽은 거대하고 견고한 성채나 공장 같은 인상이다.

사실 한겨레 사옥은 실제로 공장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당시 많은 신문사 사옥에는 신문을 인쇄하는 공장이 딸려 있었다. 기사 작성을 마감하고 곧장 활판으로 지면을 짜 인쇄를 해야 하던 시절, 편집실과 윤전기가 돌아가는 공장은 가까울수록 유리했다. 매일같이 공장으로 들어가고 나가는 인쇄용지와 신문의 물류를 원활하게 하되, 이 작업 자동차의 동선을 사람들의 출입과 분리하는 것이 신문사 사옥의 과제였다. 이런 경우 물류 차량의 동선을 건물 뒤로 보내 보행 동선과 분리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한겨레 사옥은 경사지의 큰 높이 차이를 활용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건물에서 가장 낮은 층에 자리한 윤전실로 경사면 가장 낮은 쪽에 난 출입구를 통해 물류 차량이 곧장 드나들 수 있게 한 것이다. 대신 보행자의 주출입구, 건물 전체의 입구는 계단을 올라간 곳에 별도로 구획해 두었다. 이 덕분에 한겨레 사옥은 거리에서 분리된 성채 같은 인상을 더 강하게 띠게 된다.

“반역은 사회를 썩지 않게 하는 처방”
한국의 독보적 진보 건축가 조건영
노출 철골 부재를 과감하게 사용
시대 앞선 감각으로 ‘민중건축’ 남겨

이런 특징과 더불어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건물 외벽 바깥으로 튀어나온 철골과 기둥이다. 붉은색의 철골 부재는 무채색에 거칠고 둥근 벽과 강한 대조를 이루며 건물 전체의 이미지를 지배한다. 건물을 지탱하는 기둥과 보를 동물에 비유하자면 척추나 대퇴골 같은 뼈에 해당한다. 동물이나 건물이나 이 주요 골격은 근육/벽이나 피부/마감재 등에 의해 보호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철골 부재를 노출시켜 건물의 조형에 사용하려는 시도는 지금이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30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조건영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노출된 철골 부재를 사용했다. 한겨레 사옥 완공 1년 전인 1990년 조건영은 대학로에 파격적인 건물을 선보였다. 예리한 삼각형이 하늘을 찌르고 전면에 노출된 철골 뼈대 사이에 얇은 유리를 끼워 완성한 JS빌딩이다. 김수근의 붉은 벽돌 건물이 일대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던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도래한 미래의 풍경이나 마찬가지였다. 번화가의 임대용 상업 건물과 주택가의 신문사 사옥에서 공통적으로 노출된 철골 부재는 어디서 온 것일까.

조건영의 이 선택은 1980년대 말의 구도에서 이례적인 것이었다. 1987년 이후 문자 그대로 폭풍처럼 밀려든 새로운 담론의 흐름에 한국의 지성계는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탈구조주의, 해체주의 등 기존의 가치가 한물갔다는 알림과 이 새로운 물결은 서구 자본주의가 몰고온 유행이라는 반발이 동시에 있었다. 운동권과 진보 진영에서는 대체로 ‘포스트’가 붙은 담론을 경계했다. 여전히 군사정권 아래에 있던 한국에서 해방과 진보를 설정한 근대, 이를 추동하는 힘인 마르크스주의는 쉽게 버릴 수 있는 가치가 아니었다. 그런데 철골 부재가 강한 조형성을 드러내는 건물은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포스트모더니즘에 속했고 조건영은 한국의 독보적인 진보 진영 건축가이자 모더니스트였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모더니스트 운동권과 포스트모던 철골이 만난 것이다.

이 둘을 만나게 한 주선자는 소비에트 구축주의다. 1920년대, 그러니까 러시아혁명 직후에서 스탈린의 집권 사이, 러시아에서는 사회주의의 도래를 앞당길 새로운 미학적·건축적 실험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었다. 독일을 비롯한 중부 유럽에서 바우하우스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 건축, 미술, 조각, 무용, 연극 등 조형 및 공연 예술의 개혁과 유사한 것이었다. 러시아가 사회주의라는 전인미답의 길을 성공적으로 걷기 위해서는 새로운 주체가 필요했고, 새로운 주체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건축과 예술이 전면적으로 갱신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부르주아와 지배 계급을 위해 복무한 기존 예술이 형태의 비례와 조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구성(composition)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사회주의 건축은 삶의 물질적이고 생산적인 면이 핵심이라고 믿었다. 건축가와 예술가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이제 구성이 아니라 구축(construction)이었다.

건축에서 구축은 무엇보다 구조의 강조로 나타났다. 건물이 지구의 중력에 맞서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구조체가 모든 하중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노동에 참여하고 있는 구조 부재야말로 건축에서 가장 진실된 것이었다. 구조의 두께와 크기를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내려온 비례체계가 아니라, 과학적 계산에 따라 산정해야 한다는 생각은 19세기에도 있었다. 이를 구조합리주의라 부른다. 구축주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문화혁명의 선도적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다른 아방가르드 운동과 마찬가지로 구축주의도 이내 또 다른 양식이 되어갔다. 산업 후진국이었던 러시아에서 건축가들은 상상한 것만큼 건물 전체를 지탱하는 철 구조물을 만들 수 없었다. 구축주의는 구조 부재를 과장하고 노출해 조형적 요소로 삼는 하나의 스타일을 일컫게 된다. 1980년대 중반 냉전체제가 완화되면서 한동안 잊힌 러시아 아방가르드 운동에 대한 해석과 연구가 새롭게 진행되었고, 서구 유럽의 젊은 건축가들은 러시아 구축주의의 형태와 조형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한국 건축도 이 분위기에 동참했다. 1987년 민주화 이전에는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소련 건축에 대한 관심이 대학원생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이들은 관련 서적을 번역해 내는 등, 소련발 구축주의를 원용한 흐름에 대해서 무척 우호적이었다. 서구 고전주의의 형태를 차용한 역사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적대시한 것과는 대단히 대조적이었다. 조건영의 한겨레 사옥은 이 시대적 정서 속에서 탄생했다. 대통령 직선제 성취의 환희와 군사정권 연장에 대한 좌절, 기존 언론에 대항하는 진보적 일간지를 창간하려는 시민들의 열망, 시내 중심지에서 벗어난 위치 등, 모든 조건에서 한겨레 사옥은 관습적인 형태의 건물에서 벗어나야 했다. 러시아 구축주의는 여러모로 더할 나위 없이 딱 맞는 옷이었다. 이런 형태의 의미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는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말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를 향한 돌진에 발맞추어 구축주의적 형태 역시 상업 건물에서 더 양식적인 요소로 이용되었다. 더 이상 돌출한 구조물에서 반역의 정신을 읽어내는 이는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전환기였던 한국 현대사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급변기에 탄생한 한겨레 사옥은 당대의 흐름을 날카롭게 포착한 문제작이었다.

■박정현

[콘크리트와 글로 빚은 20세기 한국 건축](5)포스트모던 철골, 민중을 상징하라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발전국가 시기 한국 현대 건축>을 비롯해 <김정철과 정림건축>(편저), <전환기의 한국 건축과 4.3그룹>(공저) 등을 쓰고, <포트폴리오와 다이어그램> <건축의 고전적 언어> 등을 번역했다.

2018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국가 아방가르드의 유령’ 등의 전시에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현재 도서출판 마티에서 편집장으로 일하며 건축 비평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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