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과 미의 절묘한 조화…도심의 ‘이면’에서 ‘새 면’을 그리다

2023.03.07 20:42 입력 2023.03.08 11:36 수정
정다영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⑫ 정현아 디아건축사무소 대표, 강남 근린생활시설

정현아 디아건축사사무소 대표의 작품인 논현동 녹음스튜디오의 정면 모습. 신경섭 제공

정현아 디아건축사사무소 대표의 작품인 논현동 녹음스튜디오의 정면 모습. 신경섭 제공

강남 한복판서 맷집을 키우며 균형을 중시해온 젊은 건축가
구조적 명쾌함과 땅의 흔적에 대응한 ‘강남 레트로’에서 보듯
소규모 임대건물의 지속 가능성을 고민하며 그만의 색을 입혔다

2000년대 중반 특색 있는 작은 가게들로 독특한 분위기를 뽐냈던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곳이다. 가까운 신사역이나 압구정역 대로변의 커다란 건물과 달리 이면 도로 길가에 도열한 아기자기한 건물들은 카페나 소매점 등으로 사용됐다. 원래 인근 주민들이 이용하던 시설은 삽시간에 타 지역 사람들로 붐비고 유명해졌다. 그 후 10년 사이 작은 건물들은 사라지고 땅이 합쳐져서 대형 프랜차이즈 중심의 커다란 건물들이 들어선 거리가 됐다. 전국에 생긴 수많은 다른 ‘가로수길’의 원조였던 이곳이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은 이유다.

대지면적 40~60평, 연면적 300평, 층수 3~5층 규모의 근린생활시설은 우리가 가장 흔히 보는 건물 유형이자 도시 분위기를 장악하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근린생활시설이란 걸어서 쉽게 접근 가능한 일상생활에 필요한 시설을 뜻한다. 상가만 있는 건물 혹은 상업·업무 공간과 주거 공간이 결합된 다양한 유형이 있다. 이런 건물들은 한국 전체 건물 유형의 90%를 차지한다. 일상적인 건물인 만큼 공간 소비는 많이 됐으나 연구나 깊이 있는 관심은 덜했다. 최근에는 젊은 건축가들의 작업이나 건축학자·사회학자의 연구를 통해 가치를 부여받고 있다. 김성홍 교수는 저서 <길모퉁이 건축>에서 이런 건물들을 ‘중간 건축’이라 지칭하며 한국 도시건축의 미래가 되는 중요한 자산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도시 이면의 중소규모 건축물이 만들어 내는 완충 역할을 강조했다.

강남 이면도로의 현실

서울 강남은 이런 근린생활시설의 완충 역할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10차선이 넘는 대로를 가로질러 한 블록만 안으로 들어가면 앞선 거리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식당, 카페, 세탁소, 미용실, 꽃집 등 중소규모 건물들이 화려한 대형 오피스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위한 공간 인프라로 작동한다. 물론 이곳 또한 점진적으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최근 10년 사이 부동산 가치가 급등하자 이면 도로 안 투쟁은 더 극심해졌다. 다세대 주택들과 섞여 차분했던 골목의 변화 주기가 빨라졌다. 작은 필지들이 합쳐지고 큰 건물이 생기고, 원래 작은 필지였던 곳에도 높은 건물이 들어섰다. 주택을 개조했던 소소한 건물들이 화려한 리노베이션으로 거듭나는 등 경제적 효율을 위해 계속 탈바꿈한다. 일견 평온해 보이는 강남의 골목길은 보이지 않는 자본의 힘들이 경합하는 긴장 상태의 장소다. 아슬아슬한 힘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도시의 완충 역할은 사라지기 쉽다.

자본이 몰리는 첨예한 현장 속에서 성장한 건축가

디아건축사사무소 대표 정현아는 이런 강남에 터를 잡고 근린생활시설을 비롯해 여러 유형의 건축물을 설계해 온 건축가다. 2004년 디아건축을 설립한 그는 본인이 설계하고 2008년 서울시건축가상을 받은 신사동 근린생활시설에서 최근까지 사무실을 운영했다. 이 건물은 김성홍 교수가 중간 건축의 중요 사례라고 언급한 곳이다. 정현아는 1990년대 서울에서 건축 공부를 한 세대로 성장하는 대도시의 밀도와 속도를 직접 경험했다. 대학원생 시절 선경건설(현 SK건설) 후원으로 건축과 디자인 전공자들의 역량 함양을 위해 조직된 선경스튜디오 창립 멤버로 활동했다. 선경스튜디오는 김찬중 등 지금 한국을 대표하는 주요 건축가들을 배출한 집단이다. 서울 올림픽 이후 쌓인 도시의 풍요로움 속에서 대기업의 후원을 받으며 다양한 학생들과 교류하며 건축 공부를 한 셈이다. 그는 자연스레 현대 건축의 진원지라 할 수 있는 뉴욕으로 시선을 돌렸다. 뉴욕에서 공부하고 실무 작업을 한 그는 선배 건축가들과 달리 전통이나 한국성 문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 대신 그는 현대 도시의 고유한 복합성에서 작업 단초를 찾아 나섰다.

30대 중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자기 사무실을 차린 그는 강남 한복판에서 20년 동안 작업하며 근처 신사동, 도곡동, 논현동, 역삼동 일대에 건물들을 설계했다. 그는 누구보다 이곳의 물리적 변화를 가까이서 본 관찰자다. 강남은 4대문 안 서울 구도심과 비교해 새로운 곳으로 취급받지만 사실 50년 넘은 역사가 쌓인 오래된 도시다. 이제 강남에서 건축 설계를 한다는 건 백지 상태에서 작업하는 것이 아니다. 이 땅이 갖고 있는 여러 시간 문제와 법적 상황, 도시적 욕망을 함께 해결해야 하는 대단히 복잡한 일이다. 정현아는 이런 밀도 높고 치열한 강남에서의 건축 활동을 통해 건축가로서 맷집을 키워 왔다. 좁은 도로의 주차난과 외관에 창을 낼 때 발생하는 공사 민원, 건물주의 대출 이자와 세금 문제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첨예한 현장 속에서 건축물의 고유한 아름다움과 기능적 논리를 세우는 일을 해왔다. 그의 포트폴리오 다수를 차지하는 강남 근린생활시설은 자본에 무력하기 쉬운 환경 속에서 차분하게 살아남아 있다.

그중 최근작 신사동 ‘강남 레트로’는 근린생활시설로는 드물게 건축적 완성도를 인정받아 2021년 한국건축가협회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강남 레트로’의 계단실 모습. 신경섭 제공

‘강남 레트로’의 계단실 모습. 신경섭 제공

강남 레트로의 탄생

강남 레트로는 이제 강남 안에서도 보기 힘든 4m 폭의 좁은 도로에 접한 근린생활시설이다. 20평 단위의 필지로 조직된 도시의 옛 흔적들이 합필 혹은 분필로 사라지는 가운데 이 건물은 이곳의 원풍경을 불러낸다. 20평 필지 3개가 합쳐진 L자 땅 위에 선 건물은 60평에 그냥 놓인 덩어리가 아니다. 건축가의 설계 도면 위에서 이 땅은 다시 20평 단위로 쪼개지고, 벽식 구조로 분할됐다. 양쪽 도로에 접한 강남 레트로는 고풍스러운 유리 블록과 거친 콘크리트로 마감됐고 앞뒤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내부 공간은 유연하게 통합되거나 분리될 수 있도록 설계돼 앞으로 닥칠 이곳의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게 했다. 일반적인 근린 시설이 최대 면적을 뽑아내기 위해 단조롭고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는 가운데 강남 레트로는 후면의 돌출된 계단실을 포함해 우아하고 매력적인 자세를 취한다.

이 건물은 구조적 명쾌함뿐 아니라 땅의 흔적에 대응하는 역사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건물 이름인 ‘레트로’는 장식적인 수사가 아니라 건축의 핵심 개념이 된다. 현대적인 장소에서 줄곧 모던한 건물을 설계해왔지만, 정현아는 “미래는 과거 속에 잠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역사적 장소의 재해석에 관련한 팔림프세스트(palimpsest·흔적 위에 덧쓰기) 건축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쓴 석사 논문에 담았던 문제 의식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정현아

정현아

현실적 요구에 대응하는 단단한 논리

정현아는 강남 레트로 외에 논현동 녹음스튜디오, 논현동 앤샵 등 여러 건물들을 설계하면서 소규모 임대건물의 지속 가능성을 고민해왔다. 높은 지가를 안고 최대 임대수익을 뽑아야 하는 건물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 건축가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탐색했다. 여러 실천과 경험을 통해 그는 현실적 요구에만 응하지 않는 그만의 전략과 태도를 만들었다. ‘짓는다’는 문제를 진정성 있게 다루며 정면 돌파하게 된 것도 건축적 이상과 땅이 가진 현실의 중간 지점에 다다르기 위해서였다.

상업성과 건축적 완성도를 모두 획득하기 위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을 중시한 그는 건물주의 요구, 법적 제약과 같은 첨예한 이슈에 대응하는 단단한 구축의 논리를 세운다. 그가 설계 초기부터 건물 구조와 재료에 먼저 집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때 구조는 기술적 문제이면서 건물을 관통하는 개념적 시스템이다. 그는 다른 곳보다 시간 단축이 요구되는 강남 현장에서 가볍고 빨리 짓는 문제도 연구해왔다. 이런 이유로 가장 효과적인 물질로 적절한 조직을 짜는 것에 대한 풍부한 경험이 있다. 석재를 얇게·가늘게·길게 쓰거나 붙이는 문제나 매달린 부재를 가뿐하게 처리하는 문제, 철골조를 사용해 매끈하고 선명한 상부를 만들거나 혹은 이 모두를 복합해 쓰는 문제 등은 디자인 전체와 부분을 모두 관통하는 내용이다.

정현아는 “부재를 접합하는 디테일의 해결, 재료와 구조 방식의 통합, 나아가 내부 공간 시스템이 하나의 통합된 원칙으로 조율될 때, 여러 다른 차원의 고민들이 명쾌”해진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그의 건축은 복잡한 현실 토대 위에서도 형식적으로 완결돼 보인다. 그의 건물을 보고 설명을 듣고 나서 나는 아이폰의 기능적 아름다움을 떠올렸다. 하이테크 건물은 아니지만 적정 기술을 사용해 통합적 형식으로 구현하려는 디아건축의 작업은 여러 다양한 문제·조건을 보자기처럼 매끄럽게 감싸는 아이폰 디자인 인터페이스의 속성과 닮았다.

쓰임을 만들고 경험을 쌓을 때 숨은 가치가 발견된다는 믿음
그는 민주인권기념관 등을 통해 새로운 도전을 이어간다

새로운 장소에서 또 다른 일상 건축

기술적으로 건축가가 고민해볼 현안이 확장되면서 정현아는 이제 큰 규모의 작업들도 수행하고 있다. 주택, 근린생활시설 등 작은 민간 프로젝트로 출발한 그의 이력은 교량 터널과 가압장 리노베이션 같은 도시 인프라부터 기념관과 체육시설까지 이른다. 강남의 동네 건축가였던 그가 다수를 위한 건물을 설계하는 모두의 건축가가 된 것이다. 그는 흥미롭게도 이런 공공 프로젝트를 디아건축의 변화의 계기로 삼고자 한다. 소규모 프로젝트에서 느끼는 질문의 한계를 공공 프로젝트를 위한 동력으로 이끄는 이런 적극적인 태도는 한편으로 공공건축 설계의 지난함에 지친 동료 건축가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특히 2024년 완공 예정인 민주인권기념관은 김수근이 설계한 남영동 대공분실을 문화시설로 바꾸는 작업으로 원 건물 자체가 가진 무거운 기억 때문에 주목받고 있다. 2025년 완공 예정인 춘천체육센터는 주 용도가 수영장으로 그간 아틀리에 건축가가 접하기 쉽지 않은 신선한 형식이라 기대를 받고 있다. 이 두 건물이 완성되면 디아건축이 우리 도시에 대응하는 폭넓은 태도에 대해 새롭게 말을 걸 수 있을 것이다.

디아건축은 강남에서의 20년 임대 생활을 청산하고 올해 1월 서울 마포구에 사옥을 지어 이전했다. 이 건물 또한 마포구의 작은 필지에 놓인 근린생활시설이다. 강남에서도 그랬지만, 본인이 설계한 건물에서 생활하는 것은 건물의 가치를 체화하는 일이다. 스스로 쓰임을 만들고 그 경험을 누적할 때 공간의 숨은 가치가 재발견된다고 말하는 정현아는 이곳에서 그간 소망했던 바를 실현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사옥 저층부를 갤러리와 같은 문화공간으로 사용할 예정으로, 5월에 임미강 작가의 전시를 열 계획이다. 도면 위 건축가가 긋는 이상적인 선과 현실적인 구축이라는 양 극단의 중심을 탐색해 온 그는 마포라는 또 다른 복잡성이 가득한 장소에서 어떤 실천들을 내놓을까. 그가 설계한 강남 근린생활시설이 그랬던 것처럼 사무실 주변 풍경을 우아하게 바꿔놓을 그의 미래 작업들을 기대해본다.

■정다영

[공감의 건축-또 다른 건축을 향해] 기능과 미의 절묘한 조화…도심의 ‘이면’에서 ‘새 면’을 그리다


정다영은 건축과 도시계획을 전공했다. 건축잡지 ‘공간’ 기자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한다.건국대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 2018베니스건축비엔날레 공동 큐레이터 등을 지냈다.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 ‘이타미 준: 바람의 조형’‘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 ‘김중업 다이얼로그’ ‘올림픽 이펙트: 한국 건축과 디자인 8090’ 등 여러 전시를 기획했다.<파빌리온, 도시의 감정을 채우다> <건축, 전시, 큐레이팅>(공동)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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