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철이 노래를 들을 때 가장 그리워", <신해철 평전> 쓴 강헌 대중음악평론가

2018.03.20 16:57

살아있다면, 반백의 나이가 됐을 그다. 신해철은 30년전 대학가요제 대상곡 ‘그대에게’로 강렬하게 등장했다. 그리고 26년간 우리 곁에서 여러 얼굴을 하고 머물렀다. 한 때 절정의 인기를 구가한 ‘아이돌’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밴드 리더’로 폭을 넓혔고, 2014년 의료사고로 숨지기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매번 새로운 시도를 하는 ‘뮤지션’으로 살았다. 그의 음악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도 신해철은 거침없는 입담을 자랑한 ‘마왕’, 구체제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논객’이었다.

대중음악평론가 강헌(56)에게 신해철은 “친동생보다 가까운 동생”이자 “(그보다) 나이가 어린 유일한 형”이었다. “평론가가 해당 분야 예술가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좋지 않다”는 소신을 가진 그였지만, 신해철만은 예외였다. 1994년 인터뷰를 계기로 만난 두 사람은 평생 벗으로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또 일을 도모했다.

4년 전 신해철의 죽음이 “엊그제 일 같다”는 강헌이 ‘긴 추도사’를 썼다. 이달말 출간되는 <신해철: In Memory of 申海澈 1968-2014>(돌베개)은 신해철의 삶과 음악에 강헌이 평론가 이전에 친구로서 바치는 헌사다. 지난 19일 자택에서 만난 그는 “해철이 노래를 들을 때 가장 그립다”고 말했다.

1988년 대학가요제에 출전한 고 신해철(1968~2014)의 모습. 신해철이 이끈  ‘무한궤도’ 팀은  ‘그대에게’로 대상을 수상했다. MBC 화면캡처

1988년 대학가요제에 출전한 고 신해철(1968~2014)의 모습. 신해철이 이끈 ‘무한궤도’ 팀은 ‘그대에게’로 대상을 수상했다. MBC 화면캡처

-발인 날(2014년 10월31일)부터 보름만에 원고를 썼다. 감정을 추스리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내가) 퇴원하는 날 그가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기사를 봤다. 그 며칠 뒤에 사망했다. ‘멘탈’이 붕괴된 상태였지만, 할 수 있는 것이 글쓰기밖에 없었다.”

-글을 쓰면서는 어땠나.

“서로 함께 한 일이 이렇게 많았었나 싶을 정도로 놀라웠다. 얘가 그저 나한테는 밀접한 한 명의 친구나 후배가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이 새록새록 들었다.”

-생전에 고인과 함께 구상했던 ‘주크박스 뮤지컬’의 대본도 실렸다.

“49재를 지낸 뒤에 윤원희씨(신해철의 아내)가 찾아와서 ‘뮤지컬이 현실화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2015년초 대본을 끝냈는데, (제작)하려고 보니 ‘블랙리스트’ 세상이라 명함을 내밀 수도 없었다. 대자본 콘텐츠인 뮤지컬에 선뜻 거액을 투자할 사람이 없었다. 나 혼자서는 어렵다는 점을 깨달았다. 대신 책에 넣었다.”

강헌은 이 책을 신해철이 숨진 그 해말 펴내려다가, 유고집 <마왕 신해철>(문학동네)이 나온다는 소식에 미뤘다. 출간을 앞두고 묵혀둔 원고를 다시 읽으면서 “지나치게 감정에 치우친 부분들은 조금 손을 봤다”. 본문의 각 장은 ‘스타덤’ ‘밴드’ ‘솔로 플라이트’ ‘애티튜드’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데뷔 시절부터 신해철의 음악적 여정을 연대순으로 짚었다. 강헌은 책을 두고 “평전이 아니라 추도사”라고 했지만, 대중문화사를 궤뚫는 해박한 지식과 필력 덕에 신해철이라는 거울로 시대를 비추는 텍스트로도 읽힌다.

-둘이 어떻게 오랜 시간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었나.

“사실 나는 그와 취향, 관심사 어느 것도 같지 않다(웃음). 비평가가 당대에 활동하는 작가들과 개인적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가수들과 개인적인 모임을 해 본적도 없다. 그런데 신해철과는 이상하게 자꾸 일로 엮이게 됐다. (강헌의 제안으로 신해철은 영화 <정글스토리> OST(1996)를 시작으로, <박노해 ‘노동의 새벽’ 20주년 트리뷰트>(2004),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탈상-노무현을 위한 레퀴엠>(2012)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또 해철이는 토론을 통해 생각을 발전시켜나가는 스타일이라 전문적인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서로 대화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대에게’를 뛰어난 데뷔곡이라고 평가했다. 신해철은 데뷔곡을 넘어섰나.

“천상병 시인의 문구를 빌리자면 ‘그에게는 언제나 다음이 있었다’. 대부분 스타들은 정상에 오르면 자신의 주무기를 고수한다. ‘발라드 황태자’ 같은 트레이드마크를 만든다. 반면 신해철은 ‘장르의 순례자’였다. 음악 자체에 대해 제어할 수 없는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많은 손해를 보고 실패를 했지만, 늘 다음에 할 일들이 많았다. 그 중 15%도 하지 못하고 떠났다. 끊임없이 새로운 영토를 찾아 헤매는 유목적 예술가. 이것이 그의 약점이자 동시에 강점이다.”

-동시대의 음악인들과 비교할 때 신해철이 두드러지는 점은 뭔가.

“1990년대의 신해철은 ‘위대한 2인자’였다. 서태지라는 ‘언터쳐블’이 항상 앞에 있었지만, 자신의 처지를 결코 비관하지 않았다. 또 다양성의 공존을 중시했다. 록 진영이 폄하한 댄스뮤직 그룹들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로 바라봤다. 이 점이 동시대 다른 예술가나 경쟁자들과 결정적으로 구분되는 지점이다. 라디오 DJ를 할 때도 무명의 신인 앨범에서도 장점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멀리 떨어진 핑크플로이드만 동경하지 않고, 앨범 한 장만 내고 사라질 수밖에 없는 동료나 후배들에 대해서도 따뜻한 시선을 갖고 있었다. 뮤지션 이전에 인간으로서 높이 평가하는 점이다.”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이 지난 19일 자택에서 故 신해철과의 일화를 말하고 있다. 강헌은 2014년 10월 신해철이 사망한 뒤에 그의 음악과 삶을 돌아보며 쓴 <신해철>을 이달말 펴낼 예정이다. 이준헌 기자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이 지난 19일 자택에서 故 신해철과의 일화를 말하고 있다. 강헌은 2014년 10월 신해철이 사망한 뒤에 그의 음악과 삶을 돌아보며 쓴 <신해철>을 이달말 펴낼 예정이다. 이준헌 기자

책에서 강헌은 신해철이 ‘노력파’ 음악인이었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한다. 신해철 스스로도 천부적인 음악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다는 ‘한계’를 알고 있었기에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것이다. 앨범 작업에서도 ‘스매시히트’를 배출하려고 하기보다, 전체적인 콘셉트를 잡고 완성도를 높이는 데 집중했다. 가톨릭 배경, SF적 상상력이나 판타지에 대한 애정이 음악 세계에 투영되었다는 분석도 내놓는다. 마흔을 넘긴 신해철은 신체적·경제적으로 다소 쇠약해졌지만, “여전히 작업실에 가면 작업 중인 곡을 들려줄 정도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숨지기 직전 그는 솔로 활동, 넥스트 재결합, 오케스트라 공연, 신대철과의 프로젝트 등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다. 강헌은 “책을 통해 그의 방대한 디스코그래피가 철학에 입각해 엄청난 시간을 노력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신해철이 평생 ‘존재의 다양한 의미와 가치의 균등성’이라는 화두를 추구했다고 표현하는데.

“신해철은 가요 가사를 사랑타령으로만 보는 통념과 싸우면서 이전까지 만나보지 못한 관념적 질문을 던졌다. 대중음악은 문학과 음악의 하이브리드 장르다. 멜로디, 화성, 리듬만으로는 대중과 소통하기 어렵다. 밥 딜런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도 가사를 시적, 문학적 가치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신해철의 가사를 밥 딜런과 바로 연결시키기는 좀 그렇지만, 미학적 공로에서는 비견되지 않을까 한다. 90년대 세대 젊은이들에게도 철학적 공감을 끄집어냈다. 사실 그가 던진 화두는 단순하다. 내가 무엇이고, 세계는 무엇이며, 세계 속에서 내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와 같은 존재론적 질문이다. 이것들을 대중음악의 틀에서 일관되게 수용했다. 지금 들어도 가사가 훌륭하다.”

-2000년대 이후에는 사회적 발언을 하는 연예인으로 더 이름을 날렸다.

“어찌보면 안타깝고 내가 물을 잘 못 들였나 하는 죄책감도 있다. (2002년 노무현 후보 선거운동 당시) ‘네가 좀 도와주면 안되겠니’ 했더니 덥석 (지지연설을) 하겠다고 했다. 한참 지나서야 그게 내 결정을 뿌리치지 못해서나 갑자기 정치에 대해 관심이 생겨서가 아니라, 결혼 이후 새로운 자각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논객이 된 것도 어쩌면 한 명의 성숙한 성인으로서의 책임감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결과였을 것 같다.”

-지금 신해철의 음악을 듣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닐까.

“그의 노래들은 소설 <데미안>처럼 인간이 사회화되면서 겪는 통과제의적 질문으로 가득 차 있다. 4차산업 시대가 된다 한들 인간이라는 종은 필히 겪어야 하는 과정이다. 앞으로도 그의 음악이 새로운 세대에 의해 새롭게 호명될 것이라고 믿는다.”

-개인적으로 더 와닿거나 알려졌으면 하는 노래가 있나.

“대표적인 히트곡 정도만 아는 사람들에게 신해철의 방대한 디스코그래피는 경이로움을 안겨줄 것이다. 나도 들으면 들을수록 좋아지는 노래들이 생긴다. 하나를 꼽자면 넥스트 첫 앨범 <Home>(1992)에 실린 ‘영원히’다. 당시에는 심드렁하게 들었지만, 요즘은 청년 신해철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애정이 너무 살갑게 느껴진다.”

신해철과 ‘형, 동생’ 사이로 교분을 나눠 온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은 지난 19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해철이 노래를 들을 때 그가 가장 그립다”고 말했다. 이준헌 기자

신해철과 ‘형, 동생’ 사이로 교분을 나눠 온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은 지난 19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해철이 노래를 들을 때 그가 가장 그립다”고 말했다. 이준헌 기자

대형 매니지먼트의 스타시스템이 지배하는 현재의 음악산업은 신해철이 왕성하게 활동했던 90년대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강헌도 본업인 음악평론에서 저술과 명리학 강의·상담으로 활동 반경을 넓혔고, 올 상반기에는 소설도 펴낼 예정이다. 강헌은 “지금은 음원의 시대이고 음악이 일회성 소비재나 일상 배경음악 정도로 이미 전락한 것 같다”면서도 “(신해철과 같이) 앨범 아티스트로서의 진지함을 가진 음악인들이 멸종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또한 윤상이 평양 공연의 남측 예술단 수석대표를 맡았다는 소식에 “놀라운 일”이라며 “살아있다면 신해철이 하지 않았을까”라고도 했다.

-신해철이 지금 한국사회를 보면 뭐라고 할 것 같나.

“신해철이 남긴 말 중 가장 맘에 드는 말이 있다. 팬클럽의 추도사 첫 문장이기도 한데, “우리가 세상에 온 것은 거대한 업적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신해철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행복을 약탈하는 사고나 노선, 집단 등 무엇과도 본능적으로 싸우려고 했다. ‘사람이 먼저다’는 철학을 가진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남북 화해가 이뤄지는 것이 그에게는 적어도 자신의 작은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더 거대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을까.”

이달말 출간 예정인 <신해철: In Memory of 申海澈 1968-2014>(돌베개)  표지.

이달말 출간 예정인 <신해철: In Memory of 申海澈 1968-2014>(돌베개)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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