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입 속의 검은 잎 - 기형도

2022.01.27 20:40 입력 2022.01.27 20:41 수정
김동현 문학평론가·제주 민예총 이사장

시집에 새긴 아픈 문장들

[김동현의 내 인생의 책]⑤입 속의 검은 잎 - 기형도

1991년 5월의 거리는 뜨거웠다. 강경대,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박창수, 김기설, 윤용하, 이정순, 김철수, 정상순, 김귀정. 그해 4월부터 5월까지 이어졌던 숱한 죽음들. 나는 그들의 때 이른 부고를 감옥에서 들었다. 제주교도소 2사 3방 95번. 이름 대신 번호로 불려와 면회실에 앉으면, 스물의 아들을 감옥에 보낸 마흔 일곱의 어머니가 송곳 같은 울음으로 당신을 찌르고 있었다.

면회를 마치고 돌아오면 나는 일개 ‘잡범’이었다. 스물의 분노를 철없는 객기라며 손가락질하던 교도관들에게 대들고 싶었지만 나의 언어는 무기력했다. 감방은 5월에도 냉골이었다. 배식을 하고, ‘뼁기통’을 청소하는 틈틈이 기형도를 읽었다. 간수 몰래 숨겨놓았던 볼펜심을 건네준 것은 교통사고를 내고 들어온 서른 살쯤 되는 방장 형이었다. 방 안 죄수들 중에 유일한 먹물이라고 어쭙잖은 조언을 해준 덕택이었는지 모른다. 가느다란 볼펜심으로 기형도가 남긴 시의 행간에 나만의 글을 썼다. 얼마 남지 않았던 잉크가 말라버린 뒤에도 몇 개의 문장을 새기듯이 써내려갔다.

길지 않은 감옥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대학은 여전했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세상은 무탈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 여전함이 외로웠고 안온한 시간들이 서러웠다. 수업은 뒷전이었다. “마구 비틀거리는” 날들이었고, “어떤 고함소리도” “어떤 조롱도” 들리지 않는 고립의 시절이었다. “빈집”에 갇힌, “가엾은 내 사랑”의 그림자를 더듬다 고개를 들면 95번으로 불렸던 시간에 새겨놓은 문장들이 불쑥 찾아왔다. 지우고 싶었지만 잊을 수 없는, 나태와 방기의 날들을 찌르는 아픈 문장들이었다.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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