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뒤틀린 돈이 찍어내는 월가의 괴물들

2023.03.04 08:00

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강동혁 옮김| 문학동네|488쪽|1만7000원

1929년 10월 31일 월스트리트 붕괴 당시 뉴욕과 직접 연락을 주고받는 전화 교환원들이 뉴욕 주식 시장의 변동을 지켜보고 있다. 게티이미지

1929년 10월 31일 월스트리트 붕괴 당시 뉴욕과 직접 연락을 주고받는 전화 교환원들이 뉴욕 주식 시장의 변동을 지켜보고 있다. 게티이미지

소설 속 ‘소설·자서전·회고록·일기’로
1929년 대공황 때 부 축적한
탐욕스러운 초기 자본가들 모습 담아
‘투자의 전설’ 칭송 이면에 숨겨진
부정한 ‘부호’의 추악함 폭로

미국 뉴욕 이탈리아인 거주지에서 청소나 심부름, 계산대 일로 돈을 벌던 아이다 파르텐자는 비서가 되려 한다. 비서가 되면 “경제적 독립을 향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갈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경리, 속기, 타자를 배웠다. 여러 실패 끝에 고용된 곳은 미국 최고의 부호 앤드루 베벨의 회사다. 아이다는 앤드루 자서전을 대필하는 일을 한다. 1938년 스물세 살 때다.

작업 시작 무렵 앤드루가 아이다에게 “읽어봤나”라며 건넨 책은 해럴드 배너의 장편소설 <채권>이다. 앤드루가 말했다. “다들 이 쓰레기를 읽은 것 같아. 모두가 이 책이 우리 얘기라는 걸 알지.” “중상모략을 일삼는 쓰레기일 뿐이야. 기회주의적 명예훼손이지. 내 사업 관행이 역겨울 정도로 잘못 그려졌네.”

자서전 작업은 해명이자, 반론이다. <채권>을 낸 출판사를 사들인 앤드루에겐 자신에 관한 유일한 ‘정본’이 되는 셈이다. “현실을 조정하고 구부리는” 자신의 능력과 권한을 소설 유통을 막는 데도 사용한 것이다.

“월 스트리트에서 전설적인 성공을 거둔 부부”에 관한 화자 네 명의 이야기를 담은 <트러스트>는 ‘소설-자서전-회고록-일기’ 순으로 이어진다. 회고록은 아이다가 자서전 대필 때 일을 기록한 것이다. 해럴드가 자신을 소설 속에서 어떻게 묘사했길래 앤드루는 분노했을까.

해럴드가 묘사한 벤저민 래스크(앤드루의 소설 속 이름)는 “돈이 자기 꼬리를 억지로 먹도록 만들 수” 있는 “돈의 뒤틀림에 매료”된 사람이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선조가 물려준 자본으로 군수품 제조, 조선 등에 투자해 돈을 번다. 투기적인 수단도 동원한다. 해럴드는 벤저민의 관점에서 투기를 이렇게 서술한다. “자본이라는 살아 있는 생물이 움직이기 시작해 아름다운 패턴을 그리며 점점 더 추상적인 영역으로 들어갔다.”

1929년 대공황 때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

1929년 대공황 때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

1929년 대공황 발발 때 벤저민은 대공황을 미리 안 듯 자산을 유동화하고, 금을 매수했다. 대공황 이후 완전히 무너진 회사 주식을 대공황 전 정확하게 골라 공매도했다. “폭풍우 속을 항해한 것만이 아니라 그 폭풍을 통해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렸다. “투기꾼들의 손실이 곧 그의 소득”이었다. 해럴드는 벤저민의 공매도를 “주식 쿠데타”이자 “장난질”로 규정한다. 벤저민은 대공황이 끝나고 시행된 뉴딜 정책 때도 1929년 같은 대규모의 공매도를 시도했다가 정부의 뉴딜 정책에 순조롭게 반응하는 시장을 보고 철회한다. 대중은 벤저민이 “국가가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데 도박을 건 것을 보고 분노”한다.

앤드루는 자서전 <나의 인생>에서 자신의 투기를 정당화한다. “연방준비은행이라는 독재적인 존재로부터 자유 기업을 보호했다. 내가 이런 행동으로 이익을 얻었느냐고? 당연하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시장의 해적질과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해방된 우리나라도 혜택을 볼 것이다.”

개인과 가족, 가문을 위한 부의 축적을 종종 국가와 시민을 위한 숭고한 행위로 포장하면서 훈계까지 하는 자본가들의 전형적인 인식도 드러낸다. “과거에는 자립이 군림했으나, 지금은 걸인의 굴종이 쭈그리고 앉아 있다. 노동자가 거지로 전락했다. 잔인한 악순환에 사지 멀쩡한 사람들이 붙들려 있다. 이들은 정부가 만든 비참함에 빠져 있으면서도, 바로 그 정부가 자신들을 구제해주리라 믿으며 점점 더 심하게 정부에 의존한다.” 앤드루의 이런 발언은 기업의 제한받지 않는 자유를 강조하는 아인 랜드 소설 <아틀라스> 주인공들의 그것과도 비슷하다.

소설 <트러스트>의 마지막은 앤드루 부인 밀드레드 베벨의 ‘선물(先物)’이란 제목의 일기다. 앤드루는 자서전에서 밀드레드를 자선 활동을 벌이고, 예술가를 지원하며 사는, 부의 축적에는 “중요할 것 없는 그림자” 정도로 묘사한다. 아이다가 찾아낸 일기장의 밀드레드의 면모는 다르다. 밀드레드는 앤드루가 준 소액으로 앤드루의 기금보다 더 나은 수익을 내기도 했다.

밀드레드는 앤드루가 대공황 때 어떤 투기 수법으로 돈을 벌었는지도 적었다. 주식 시세를 표시하는 기계 ‘티커(Ticker)’의 허점을 이용한 것이다. 급등 때나 폭락 때는 티커가 거래량을 좇아가지 못한다. 바닥의 매도가와 티커 액수가 크게 차이 난다. 티커가 한발 늦은 시세를 내놓는 것이다. 시세를 기계에 입력하기 전 뇌물로 키보드 관리자를 매수할 수도 있다.

앤드루는 밀드레드의 이런 생각을 실행한다. 밀드레드는 이렇게 썼다. “그(앤드루)가 내게 투자의 규칙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그에게 그런 규칙의 경계선 너머로 생각을 넓히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에르난 디아스. ⓒPascal Perich 문학동네 제공

에르난 디아스. ⓒPascal Perich 문학동네 제공

<트러스트>에서 여러 주제를 뽑을 수 있다. 하나는 바로 ‘여성’이다. 에르난 디아스는 아이다와 밀드레드를 주요 인물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지난해 4월 말 미국 공영방송 NPR과 인터뷰하며 “역사든 소설이든 미국의 부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때 여성이 완전하고도 완벽하게 지워진 걸 확인했다. 부의 서사에 나오는 여성 역할은 아내, 비서, 피해자 이 세 가지로 고정된다. 이 전형적인 세 지위를 받아들인 뒤 전복하는 데 관심을 뒀다”고 말했다. 아이다를 수동적 비서로 그리다가 점점 진실을 좇는 주체적 작가로 그리고, 밀드레드를 내조하는 아내에서 투자의 귀재로 전복한 것이다.

소설은 ‘돈’에 관한 이야기다. “공황 때 시총이 얼마나 날아갔는지 아나? 대략 500억 달러라네. 500억 달러어치의 지폐를 죽 이어붙이면 달에 열 번 갈 수 있어. 돌아올 수도 있고” 앤드루가 아이다에게 한 말이다. 앤드루는 자서전에서 “우리 존재는 이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에르난 디아스는 미국 자본가들의 성공학에 대한 안티테제로 마르크스도 동원한다. 자본 논리를 반박하는 이는 아이다 아버지다. 월스트리트에 취직했다는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돈이 뭐냐? 순전히 공상적인 형태의 상품이지.” “금융자본은 더더욱 그래. 증권, 주식, 채권 같은 것들. 강 건너의 저 노상강도들이 사고파는 것에 뭐든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

아버지는 “금융자본이 모든 사회적 불의의 근원”이라고 봤다. 이탈리아 출신인 그는 “ ‘이탈리아’라는 단어조차 중앙화된 부르주아 권력을 일컬을 뿐”이라고 여기는 무정부주의 운동가였다. “(1929년에 내 행위를 놓고) 아무 죄가 없는 헌신적인 혁명가로서 돌을 던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앤드루) 중 하나였다.

소설은 또 가족, 가문의 내력과 부부의 애정과 갈등, 소통에 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에르난 디아스는 역사, 철학, 경제학, 문학예술에다 인간관계, 생로병사에 관한 성찰을 녹인 이야기를 4가지 장르로 깊이와 재미를 갖춘 문장으로 풀어낸다. 이 소설은 지난해 미국 36개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뽑혔다.

[책과 삶] 뒤틀린 돈이 찍어내는 월가의 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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