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여성운동가·출판문화운동가···사후 30여년간 더 넓어진 고정희의 세계

2023.03.05 17:04 입력 2023.03.05 19:53 수정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 다시 고정희’ 출간

문단 성폭력·미투운동 이후 등장한 신진 연구 모아

권력 카르텔·여성인권·자본주의까지 폭넓게 비판

고정희 시인(1948~1991) | 소명출판 제공

고정희 시인(1948~1991) | 소명출판 제공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 다시 고정희>(소명출판)는 이소희(한양여대 교수) 표현을 빌리자면 ‘시인 고정희(1948~1991)’라는 “문학적 광맥”을 캐낸 결과물이다. 20주기와 30주기 학술대회 때 나온 논문 18편을 모았다. 30주기 학술대회는 각별했다. 2015년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와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등을 거치며 진행된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 이후 등장한 신진 연구자들이 연구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2001년 6월 8일 이화여대에서 열린 고인의 10주기 추모 심포지엄 때 추모 공연을 진행한 단체 ‘소녀들의 페미니즘’과 같은 세대다. 12명의 청소년으로 구성된 이 단체는 고정희 시에 곡을 붙인 ‘하늘에 쓰네’와 여성차별 사회를 비판하는 내용의 랩음악을 불렀다.

이소희는 책머리에 1980년대 한국 사회에서 ‘여성-민중’을 역사적 주체로 상징화하려고 했던 고정희의 시 창작이 2015년 이후 ‘여성’을 정치적 주체로 내세우려는 ‘강남역 세대’ 여성주의자들에게 이어진 의미와 맥락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고정희는 1980년대 과거의 민중 시인이 아니라 2022년 ‘지금, 여기’에서 ‘우리’와 함께 호흡하면서 ‘연대’의 삶을 이야기하는 페미니스트 시인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이 맥락을 잇는 신진 연구자 논문 중 하나가 정혜진(제3그리스도연구소 연구원)의 ‘고정희 시의 섹슈얼리티와 페미니즘의 급진성’이다. 정혜진은 시집 <여성해방출사표>를 “1990년대 초 한국 여성운동의 공백으로 지목했던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실천이었다”고 평가한다.

<여성해방출사표>의 화자 중 한 명인 황진이는 ‘삼종지도’를 ‘남자 집권 보안법’이라 비판한다. “아직도 조선의 남녀 문사 머릿속엔/ 우리가 그토록 지긋지긋해 하던/ 가부장제 허세가 은연중 남아있어요/ 내가 서녀 출신이라 기녀가 되었다느니/ 혹은 나를 사모하다 죽은 총각 때문에 기녀가 되었다느니”(‘황진이가 이옥봉에게-여름편지’ 중). 신사임당은 ‘현모양처’ 신화를 허구라 부른다.

정혜진은 고정희가 <또 하나의 문화-새로 쓰는 성 이야기> 제8호에 발표한 글 ‘우리 시대 섹스와 사랑 공청회’도 분석한다. 이 글은 “정상성 규범과 일부일처제, 남성 중심적 성문화와 낭만화된 사랑, 자본주의 성산업에 대한 비판과 성해방 담론”을 실었다. 정혜진은 “(고정희는) 위계적 이성애가 남성성을 강화하는 체제 유지 구실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자본주의 작동 원리로서의 규범적 이성애와 남성우월주의 비판으로 밀어붙인다”고 했다.

유고 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중 연작시 ‘밥과 자본주의’의 하나인 ‘몸바쳐 밥을 사는 사람 내력 한마당’ 한 구절은 “어찌하여 구멍밥 먹는 놈은 거룩하고/ 구멍밥 주는 년은 갈보가 되는 거여?”이다. 정혜진은 “성매매 여성의 노동에 대한 낙인이 자본주의의 작동 기제이며 그 근간에 이성애 남성 우월주의가 있음을 폭로한다”고 했다. 이 시는 또 “성구매 남성들의 행위는 낭만화되는 성차별 구조를 지적함으로써 남성 중심적 민중시를 겨냥한다”고도 했다.

‘밥과 자본주의’ 연작은 ‘급진적 자본주의 비판’ 시다.

“권력의 꼭대기에 앉아 계신 우리 자본님/ 가진자의 힘을 악랄하게 하옵시매/ 지상에서 자본이 힘있는 것같이/ 개인의 삶에서도 막강해지이다/ 나날에 필요한 먹이사슬을 주옵시매”.(‘새 시대 주기도문’ 중)

“나절을 일한 자나 하루 종일 일한 자나 똑같이 최대생계비를 지불함이 하늘나라 은총이다 선포하셨건만, 반평생을 뼈빠지게 일한 자나 일년을 혼빠지게 일한 자나 똑같이 임금을 체불당한 채 밀린 품삯 받으러 일본으로 미국으로 다국적기업 뒤꽁무니 쫓아간 우리 딸들이 임금 대신 똥물을 뒤집어쓰고 울부짖을 때 당신의 말씀은 침묵했습니다”(‘행방불명 되신 하느님께 보내는 출소장’ 중)

양경언(문학평론가)은 ‘고정희의 밥과 자본주의 연작시와 커먼즈’에서 “자본주의 체제가 강화하고자 하는 질서인 약육강식의 구도가 개개인들을 강제하고, 급기야는 ‘개인의 삶’의 내적 질서로 체화되는 시대상황을 기도문으로 패러디한 작품”이라고 분석한다.

이 논문은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신식민주의, 가부장제 등이 낳는 억압과 경쟁, 폭력과 고립 등의 문제를 극복하고 이 과정에서 각성된 주체들이 협동과 공유와 돌봄의 가치를 추구하는 상황이 ‘밥과 자본주의’ 연작에는 표현되어 있다”고 했다. 그런 시가 ‘밥은 모든 밥상에 놓인 게 아니란다’이다.

“밥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것이란다/ 네가 밥을 함께 나눌 친구를 갖지 못했다면/ 누군가는 지금 밥그릇이 비어 있단다…. 우리가 밥상 앞에 겸손히 고개 숙이는 것은/ 배부름보다 먼저 이 세상 절반의/ 밥그릇이 비어 있기 때문이란다”.

양경언은 “지금의 불공평하고 부정의한 질서하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밥그릇이 비어’ 있는 누군가를 가시화하고, 그이들과 공평하게 먹거리를 공유하는 장소로 ‘밥상’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얘기를 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고정희는 <여성해방출사표>에서도 “저임금과 철야 잔업에 시달리며” “생산증대” “돈받이 달러받이” “성폭력과 강간폭력 노동통제 남근에 깔려” 같은 표현으로 자본주의와 여성 폭력에 대한 비판을 동시에 진행했다.

고정희의 비판은 5·18민주화운동, 군부독재, 빈부격차, 위안부 문제, 성평등, 여성인권, 사회 정치적 부패, 권력 카르텔, 신자본주의 구조, 빈곤 등에 걸쳐 있다. 이은영(아주대 강사)은 ‘고정희 시에 나타난 불화의 정치성’에서 고정희의 민중문학, 공동체적 문학에서 핵심을 정치적 지향성으로 꼽는다. 고정희는 일찌감치 5·18민주화운동의 주체를 지식인, 학생에서 노동자, 여성, 민중으로 자리매김한 이다.

“호남전기 생산부 우리 딸들/ 넝마주이 우리 아들들/ 황금동 흥등가 우리 딸들/ 전기용접공 우리 아들들/ 술집 접대부 우리 딸들/ 구두닦이 우리 아들들/ 야간학교 다니는 우리 딸들/ 무의탁소년원 우리 아들들/ 방직공장 우리 딸들/ 주저없이 망설임없이/ 총받이가 되고 칼받이가 된 저들/ 진압봉에 머리 맞아 쓰러진 저들”(‘저 무덤위에 푸른 잔디’ 중)

양경언은 “고정희의 마당굿시는 사회의 공통된 함의에 불화를 초래함으로써 여성, 노동자, 민중이 평등한 존재임을 끊임없이 감각하게 하는 정치성을 드러낸다”고 했다. 고정희는 1988년 ‘광주민중항쟁과 여성의 역할-광주여성들 이렇게 싸웠다’를 쓰기도 했다.

이경수(중앙대 교수)는 이소희와 함께 책을 엮었다. 그는 e메일 인터뷰에서 연구 결과를 두고 “차세대 신진 연구자들이 ‘시인’ 고정희에게 갇히지 않고 여성운동가이자 출판문화운동의 네트워킹 행위자로서 고정희를 호명하면서 고정희 연구를 국문학을 넘어 여성학, 문화학, 사회학의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다”고 했다.

“고정희 시인의 생애를 살펴보다 보면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일을 이토록 짧은 생애에 해내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들곤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수유리 한국신학대학에서의 경험이 바탕이 된 기독교 신앙과 광주로 상징되는 시대 의식과 민중 의식, ‘또 하나의 문화’를 통해 체득한 페미니즘과 여성의 경험과 역사성에 대한 인식, 탈식민주의와 디아스포라에 대한 인식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은 고정희의 문학 세계야말로 사후 30여 년이 흐르는 동안 더 많은 연구자가 고정희의 문학과 삶에 관심을 가져오게 된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경수는 “고정희 연구가 지속성을 가지면서도 젊은 연구자들에 의해 확장되어온 데에는 오늘의 한국 사회의 요구가 작용한다. 우리 시대가 고정희와 고정희의 시를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 “학생들과 함께 읽다 보면 시인 고정희가 꿈꾸었던 세상이 아직도 요원하다는 생각을 요즘 학생들 대부분이 하면서 고정희 시에 공감하더라”며 이렇게 말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면서 연대를 꿈꾸었던 시인의 언어가 2023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에도 ‘마주 잡을 손 하나’를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는 공명을 일으키기를 바랍니다.”

시인·여성운동가·출판문화운동가···사후 30여년간 더 넓어진 고정희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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